브런치북 문득 마흔 19화

인생지사 새옹지마

정말 알 수 없는 것

by Snoopy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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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굉장히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왜 인생이 연달아 강펀치를 날려 정신없게 하는 때가 있다면 또 반대로 엄청나게 맛있고 달콤한 것들을 마구 입에 물려 정신 못 차리게 하는 때가 있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지금 내가 그런 시기를 맞이한 듯하다. 늘 이러다가 갑자기 언제 싸다구를 날릴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모르는 내가 아니기에 마냥 그 단물을 쭉쭉 빨며 취해 있지는 않다. 오히려 한쪽으로 바짝 긴장한 상태로 각과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랑 통화하며 근황을 전하다가 “너 이제 좋은 때가 온 거 아냐? 그동안 너무 가혹하게 살았잖아. 그냥 좀 의심 없이 좋아하면 안 되니? 잠깐이라도……”라는 말을 들었다.


당연히 좋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헤벌쭉할 생각은 없을 뿐이다. 이렇게 억누르지 않으면 추락할 때 상당히 힘들 거란 걸, 그리고 나의 성격상 회복을 위해 애쓰는 시간과 에너지가 굉장히 많이 든다는 것을 잘 알기에 이젠 그러지 않을 뿐이다.


나라고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었을까, 원래는 꽤 극단적인 편이었다. 좋으면 거기에 도취되어 누가 봐도 이마에 ‘좋아 죽겠음’이라고 써 있고, 싫고 힘들면 ‘나 건드리면 죽여버리겠음’이라고 써 있었다.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살았다고나 할까.


그런데 마흔이 다되어 취업됐다고 너무 좋아했더니 폭망하고 몇 개월 동안 애를 태운 경험을 한 뒤에는 그러지 말기로 마음을 굳혔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체험으로 아주 깊이 새겼다고나 할까. 정말 어둠 속에 깊이 잠겨 있던 시간이었다. 난 정말 끝난 것만 같았고 뭘 해도 계속 폭망할 것 같았다. 마흔이 다되도록 이렇게밖에 살지 못하는 게 너무 사무치게 괴로웠다. 아무도 만나기 싫었고 무기력했다. 그러다 이 말을 만났다.


“아무 일도 하지 않더라도 죽음을 피하기 어렵다면 어찌 죽음에 이르기까지 투쟁해보지 않겠는가!”


우리의 멋진 시인 호메로스의 명언이다. 저 문장을 마주한 뒤, 나는 삶의 태도를 바꾸기로 했다. 나도 모르게 투쟁에의 의지가 샘솟기 시작한 것이다. 그야말로 무기력한 채로 지내다가 죽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가는 건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이 팍 들었다.


사람이 커다란 풍랑에 만나 쓰러져버린다면 당연히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 그런 때는 그야말로 잠시 모든 창문을 닫고 혼자 웅크리고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마치 우리가 정말 너무 심하게 아파서 손가락 하나 들 힘조차 없을 때는 그저 약(처방 약이든 따끔한 주사이든 병원 침대에 의지해 똑똑 떨어지는 링거액이든) 먹고 누워 자는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그러다 보면 내 몸이 스스로 나를 일으킬 방도를 찾는다. 긴 잠을 몇 번 자고 눈을 뜨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기적 같은 기쁨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


나에겐 그 계기가 저 말이었던 것 같다.


어둠 속에서 빛이 어디 있을까 찾기 시작했고, 어차피 망할거라며 자조적이었던 강의 준비를 시작했고, 하도 여러 번 이야기해서 지겨울 수도 있겠지만 유튜브 채널도 시작했고, 뒷산을 통과해야만 닿을 수 있는 곳에서 약수물을 떠다가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누가 만나자면 시간을 잡고 몸을 이끌고 나와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유튜브로 불특정 다수에게 말하는 연습을 한 덕분에 강의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약수물을 끓여 우려 마시는 차의 맛은 평소에 사용하는 아리수의 그것보다 훨씬 맛있었고, 유튜브 채널은 구독자 0명으로 출발해서 이제 100을 향해 가고 있다.


무엇보다 수개월 동안 나를 괴롭혔던 문제가 해결되던 그 날, 지금 진행중인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동대문 DDP와 간송미술관이 콜라보로 여는 마지막 전시가 될 것이고, 나는 그 전시의 텍스트 담당이 되었다. 연초에 기획된 전시인데 조금 급하게 투입되었다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급한 대로 스펀지가 되어 ‘간송 전형필’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우리의 문화재에 대해서 쫙쫙 흡수하는 재미가 있다. 공교롭게도 이번 전시의 하일라이트가 그가 통 크게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과정을 거쳐 인수한 도자기 컬렉션인데 차 공부하면서 자기에 대해서 조금 공부해둔 것이 있다. 게다가 작년부터 동양미술 전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글도 쓰고 많은 책을 읽어와서 지금의 리서치가 고행이라기보다 즐거움에 훨씬 더 가까이 있어서 기쁘고 다행이라며 매일 아침 일기에 감사하다는 말로 시작한다나 뭐라나.


진심으로 감사할 수밖에 없는 건 역시 이 꿀같은 시간이 언젠가 반드시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


그래도 친구 말마따나 조금은 더 기뻐해도 될까?


아, 아직은 아니다. 전시가 무탈히 오픈하면 그때 기뻐하자. 지금은 투쟁하는 시기다. 그러니 조금은 긴장한 상태로 지내자.


부디 아프지만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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