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의 마흔
참 오랜만에 한 남자에 푹 빠졌다. 세상을 웬만큼 떠돈 덕분에 무슨 일이 생겨도 놀랍지 않고 뭘 봐도 시큰둥한 마흔에 이런 감정이 다시 찾아올줄이야! 그렇게 나는 설레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여러분께도 그 사람을 소개시켜주고 싶어서 이렇게 컴퓨터를 켜고 자판을 두드린다. 어쩌면 몇 몇 사람은 이미 그 남자의 이름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워낙 멋있는 사람이니까.
그의 이름은 전형필. 어떤 사람은 간송澗松이라는 칭호를 더 잘 알지도 모르겠다. 방금 고개를 갸웃하신 분, 당신이 생각하는 게 맞다. 간송미술관의 그 간송.
몇 해 전부터 간송미술관이 동대문디자인플라자와 협약을 맺고 전시를 개최하고 있다는 걸 아실랑가 모르겠다. 그리고 벌써 그 마지막 시간이 돌아왔고, 나는 이번 마지막 전시의 텍스트를 맡게 됐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가볍게 전시에 나오는 유물과 기획 의도를 유기적을 접합하는 글을 쓰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이 전시에 들어갈 글을 쓰기 위해서는 전형필이라는 사람의 인생과 행적을 이해하는 일이 요구되었던 것.
막상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는 정말 휘청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스캔하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으니까. 그렇다고 발을 빼자니 그러기엔 너무 늦었고.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발뺌을 해본들 딱히 그보다 더 나은 일이 나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기에 기왕 하는 거 잠을 줄여서라도 완전 제대로 하자고 마음 먹었다.
그쪽에서 제공하는 참고자료를 꼼꼼하게 살피는 건 기본이고, 그걸 기반으로 내가 생각하기에 유용할 것 같은 다른 참고자료들을 요청해서 살폈다. 책상은 점점 종이와 자료로 뒤덮이고 한쪽 구석에는 책탑이 쌓여갔다. 늘 집에 처박혀 작업했지만 이번에는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어서 집-DDP-보성고, 삼각형의 동선이 형성됐다.
참으로 신기한 건 하면 할수록 이 일이 재미있다는 점이다.
고등학교 때 미술 선생님의 미움을 사(이유도 모름) 수묵화 난초 그리는 시간에 자기가 직접 A+를 불러놓고 막상 내가 그 그림을 그렸다고 손을 들자 “너야? 그럼 C!”를 외치는 바람에 생긴 트라우마(그 선생의 그런 미친 행각은 이후에도 계속되어서 내 미술 성적은 엉망이었다) 때문인지 미술과는 담을 쌓았더랬다. 그나마 서양미술은 유럽 미술관과 박물관을 다니며 관계가 회복됐지만 동양미술은 아예 관심 밖으로 밀려난 지 한참이었다.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차를 마시게 되면서 동양화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됐고, 한 해 전부터는 본격적으로 동양미술에 관한 책들을 열심히 찾아서 읽게 되었다. 간송이라는 이름은 나도 미술관으로만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 미술 작품 중 소장자로 자주 등장한 것이 간송미술관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 이상에 대해선 아무런 정보도 없었는데 이 프로젝트를 하게 되면서 간송이 전형필이라는 사람의 아호이고 그가 수장한 많은 미술품들을 개인이 사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놀라움이 시작됐다.
“그 사람 엄청난 부자였다면서요? 그럼 그 정도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사실이다. 만약 그가 막대한 금수저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문화재 수집이 웬말인가, 먹고 사는 것조차 힘에 부쳤을 것이다. 하지만 딱 한 발자국만 더 가까이 다가와서 살펴본다면 그저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을 거란 것도 알게 될 것이다. 그 시절에 돈이 많아 미술품, 골동품 사 모으는 사람들은 꽤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여전히 컬렉션을 온전하게 지키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박물관 등지에 기증한 사람들이 있기도 하지만 직접 자신의 재산을 써가면서 박물관을 짓고 그냥 박물관이 아니라 그 자료를 연구자들이 마음껏 볼 수 있도록 준비한 개인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의 식민지배가 가장 악랄했던 시절이고 우리의 긴 역사에 비해서 그저 잠깐일 뿐인 세월 동안 전국 각지의 무덤이 도굴되고 문화재가 나라 밖으로 실려 나가던 시절이었다. 전형필이 일본 고위 인사가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을 보고 싶다 했을 때도 그를 한 시간 정도 기다리게 한 뒤에 홍차 한 잔 대접한 뒤 보냈다는 일화는 비록 소소한 복수일지언정 통쾌한 기분마저 든다. 반대로 제대로 학술 연구를 하는 일본 학자의 요청에는 기꺼이 응하고 긴 시간 동안 학술적인 대화를 나누고 융숭히 대접해서 보냈다니 역시 호인은 호인이란 생각.
도쿄 유학 시절 그가 방학 때 귀국해서 음식점이나 다방에 가면 그 일대 구두 만드는 사람들이 신발을 빌려가 디자인을 본뜨고 가져다 놓았다고 전해질 정도로 멋쟁이었던 양반인데 나중에는 늘 수수한 옷을 고집했다고 한다. 어떤 일화를 보면 다 헤져서 구멍이 난 스웨터에 손가락을 넣고 이렇게 됐구먼, 허허 하는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 많던 재산을 문화재 구출에 다 쓰고 검소해질 수밖에 없었을까 싶어서 짠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건 간송의 사랑방에서 벌어진 한밤중의 주연과 다회에 대한 에피소드였다. 깊은 밤에 신윤복의 미인도를 걸어놓고 이조백자에 따라 마시는 술맛은 어떤 것일까? 푹푹 찌는 한여름 정선의 고사관폭을 걸어두고 아껴두었던 좋은 녹차를 고려청자에 따라 마신다면? 상상만으로도 너무 황홀해 머리가 멍해지고 다리가 휘청거리는 것만 같다. 아니, 마셔본 적도 없는 사람이 어찌 그걸 아냐고? 고려까지는 아니어도 조선의 초기 백자에 차를 마신 경험이 있는데 확실히 그냥 잔에 마셨던 것과는 달랐기에 나는 그 경험이 황홀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문득 궁금해 전형필의 마흔이 언제였는지 헤아려봤다.
1906년에 태어났으니까……1945년.
우리가 광복을 맞이했던 해. 삼천만의 기쁨으로 들썩였던 그 해.
1940년에 인수해 일제의 탄압을 이겨내고 민족사학으로 키워낸 보성학원의 교장으로 잠시 취임했던 해이기도 했다. 사실 그는 광복 이후에는 더 이상 골동서화 수집에는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교육을 통한 후진 양성과 여태껏 힘껏 모아온 컬렉션에 대해 연구하는 일, 그리고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새롭게 발굴해내고 보존하는 일에 힘썼다고. 이제 다시 주권을 찾았으니 문화재가 반출될 염려가 없으니 자신의 일은 미래를 바라보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어찌 보면 마흔이라는 시간을 기점으로 인생이 다른 방향으로 전환된 셈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광복 이후 우리 국민 모두가 전환점을 맞이했겠지만 이렇게라도 어떻게든 마흔의 연대감을 형성하고자 하는 나의 애처로운 마음을 너그러이 품어주시길.)
타임머신을 타고 그 해로 가고 싶다.
당신이 모으고 지켜낸 유물들의 안부를 전하고 싶다. 근자감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나에게 차 한 잔 정도는 내주지 않을까 싶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그게 꼭 고려청자였으면 좋겠다는 건 나의 작은 소망이다. 그럼 비로소 나도 고려청자에 마시는 차 맛이 어떤 건지 알게 되겠지. 함께 마흔을 맞이한 소감에 대한 담소도 나누면서……
그나저나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난생 처음으로 어떤 어려움도 재미있고 신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니 이것도 전환점이라면 전환점? 부디 이 모퉁이를 돌면 가시덤불 사이에도 꽃이 이따금씩 보이는 풍경으로 변해가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