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다오에서 생긴 일 #4

_ heavy hangover

by Snoopyholic

M의 조촐한 동향회를 방해하던 덴마크 남자는 이제 그녀를 제쳐두고 순하게 생긴 남자와 종교에 관한 열띤 토론을 벌이는 중이었다.

이때다 싶었던 동유럽계 남자가 그녀를 공략했지만 M은 꿈쩍도 않고 눈앞에 벌어지는 토론에 집중했다.

덴마크 남자는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밝힌 뒤 세상의 어떤 종교 혹은 영적인 존재를 믿는 행위보다 미개한 짓거리는 없다고 선언했다.

데시벨이 얼마나 높았던지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날아드는 날카로운 시선의 화살이 다다닥 그의 몸으로 날아가 박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M과 같은 지역 출신으로 순하게 생긴 남자는 종교를 믿는 사람으로서 다른 종교나 믿음, 신념을 가진 사람을 존중하므로 그런 의견 또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싸잡아 말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논리적으로 답했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박수가 곳곳에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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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 따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덴마크 남자가 목소리를 높여 역사적으로 종교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희생시켰는지 억압과 권력을 위한 도구로 쓰였는지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열변을 토했다.

그런 비논리적이고 위선적인 행위는 기만에 지나지 않으며 저속하고 미개한 무언가에 지나지 않는다며 맹렬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순하게 생긴 남자는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종교나 믿음으로 인해 파생되는 정신적 안정과 종교가 저지른 잘못도 있지만 사회를 유지하는 보조 수단으로서 행해온 업적을 완벽하게 무시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반박했다. 상대는 즉시 그거 보라고, 왜 스스로 완전하지 못하고 의존하느냐고, 국가 같은 불완전하고 허점투성이의 시스템이 여러 곳에서 뒤틀려 있어 사람들이 억압당해도 변화하지 못하는 것이 다 그런 이유라고 이죽거렸다. 많은 사람들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자리를 떠나갔다.

M, B, L은 저 인간이 아까 그들을 웃겨주던 덴마크 남자와 같은 사람 맞느냐며 얼굴에 펀치라도 날려 입을 닥치게 하고 싶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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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의 시끄러운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바는 다시 새로운 바람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조용해졌다.

작년 여름에 절정을 달렸을 한 철 지난 인기 팝송만이 기죽지 않고 소리를 냈다.

많은 영어 사용자들에게 원성을 사게 된 덴마크 남자는 타깃을 중국어 사용자로 돌리고 서양인 무리를 떠나 바의 완전 다른 편으로 건너가 버렸다.

그의 바람대로 안경 낀 중년의 중국인 여성 사업가는 귀여운 금발의 푸른 눈 외국인이 중국어를 하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기특해 자꾸만 그에게 맥주를 사주었다.


M은 다시 동향의 순하게 생긴 남자와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는데 그는 중국인 여자친구와의 결혼을 앞두고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인가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음을 암시하는 말들을 쏟아냈다.

B는 바텐더랑 수다를 떨다가 새로운 남자를 발굴했다. 조막만 한 얼굴에 멀끔한 외모는 흡사 요즘 여자들이 열광하는 아이돌 그룹 멤버처럼 생겼고 바에 기대 다른 사람들을 관망하는 포즈는 좀 놀아본 ‘오빠’의 관록을 풍겼다. 생긴 것이 딱 자기 스타일이라고 L의 귀에 속삭였다.

이미 간단한 조사는 마친 뒤였다. 국적은 중국, 칭다오 출신. 9월부터 호주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하지만 그 이상의 진전은 없는 듯했다. 심심했던 L이 조금 더 캐본 결과 유학생일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인 전여친이 있었고 아직 완벽히 극복하지 못한 정황들까지 알아냈다. 남자도 B도 먼저 다가갈 것 같지도 않은 분위기라 L은 사랑의 대사를 자처하고 둘을 이어주려고 나섰다. B에게 의중을 물으니 흔쾌히 OK.

우선 사진을 찍자고 해서 자연스럽게 둘이 가까이 붙을 수 있도록 유도하고 B를 띄워줬다. 뭔가 여전히 서먹한 느낌이 있어서 뭘까 생각하다가 서양인에 대해 수줍어하는 듯하여 차라리 직접 B가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주니 그때부터는 둘이 알아서 즐거워졌다. 잘생긴 그는 갑자기 신 나서 자신의 생일임을 공표한 뒤 데킬라샷을 몇 몇 사람들에게 돌렸다. 쭉쭉 샷을 들이키던 사람들의 동공이 점차 넓어졌지만 환호와 함께 생일을 축하하는 인사를 건네는 건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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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L은 새로운 관찰대상을 찾았다.

그러다가 한국인 P를 만났다.

여행객이라고 하니 혼자서 온 여자 여행자가 밤의 유흥을 즐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며 깜짝 놀랐다.

P는 중국에서 일하는 젊은 청년이었는데 말솜씨가 유려하고 이미 밤의 세계에서는 이름 깨나 날렸는지 다양한 국적의 여성들이 대화 도중에 ‘오빠’ 소리와 함께 눈웃음을 흘리며 지나갔다.

중국어를 공부하러 왔다가 태권도 사범에서 물건을 떼다 파는 장사, 음식점 경영을 거쳐 이제 무역 사무실 직원이 됐다는 P는 자유로운 중국 생활이 만족스럽다고 했다.

이제는 떠올리기만 해도 갑갑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끝을 흐리던 그는 오매불망 자신을 바라보는 팬들을 기다리게만 할 수는 없었는지 L에게 칭다오 한 병을 안기며 세련된 목소리와 말투로 여행 즐겁게 하고 조심히 돌아가라고 한 뒤 총총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L은 P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에 쥐어진 칭다오가 여섯 번째 병인지 일곱 번째 병인지를 헤아려보려 애썼지만 방금 블랙커피 속으로 쪼르르 흘러 들어가는 크림마냥 그 안을 빙글빙글 돌기만 할 뿐 명쾌한 대답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결론내리고 바를 빙글빙글 돌다가 익숙한 얼굴들 사이로 섞여들었다. 그리고 그 뒤 L의 기억은 더 이상 검정과 하양을 구분할 수 없는 밀크커피와 같이 뿌옇게 변하고 말았다. 그런 상태로 그녀가 바라본 바의 거의 마지막 상황은 이러했다.

수 년 전 이곳에 처음으로 와서 영어 학원 사업을 성공적으로 일궈낸 것으로 밝혀진 T가 자신의 문란했던 과거의 이유는 오직 공허함 때문이었다고 M에게 고백하는 동안 B는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고 덴마크 남자는 여전히 중국인 사업가와 열띤 대화 중이었다.

그의 앞에는 여러 병의 맥주가 제멋대로 솟아난 빌딩들처럼 서 있었다.

동유럽 남자는 M을 포기하고 다른 여성에게 열심히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려 했고 어디선가 나타난 인도 남자가 어떻게든 한 건 올리겠다는 표정으로 이 여자 저 여자를 배회했지만 모든 여자들은 짜증 난 얼굴로 그를 밀어내는 와중이었다.

바 안은 수많은 사람들이 뿜어낸 담배 연기와 그간 쌓여왔을 특유의 찌든 술집 냄새, 욕망 실현의 마지막 가능성에 대한 궁금증 등으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고 투명하고 차가운 공기로 채워진 바깥에서는 검었던 하늘이 조금씩 푸르게 변해가면서 밤을 훤히 밝히던 네온사인이 서서히 빛을 바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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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L은 미간을 찌푸린 채 오른쪽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투명한 접시가 산산이 부서져 그 모든 파편들이 그녀의 뇌의 여러 부위에 박혀선 빠지지 않는 것 같은 엄청난 통증이 멈추지 않았고 콧구멍부터 목구멍 아래 기도까지는 그녀가 잠든 사이 누군가 사막의 모래라도 불어넣은 것처럼 꺼끌꺼끌했다.

창밖 바다 풍경과 눈 사이에 물이 담긴 컵이 보였다.귀여운 판다가 달린 실리콘 뚜껑이 덮인 건 손님의 물에 방에 부유하는 먼지조차 허용할 수 없다는 안주인의 단호함이자 친절한 배려였다.

L은 호흡기에 낀 모래의 느낌을 씻어낼 수 있기를 바라며 한 방울도 남김없이 잔을 비웠다.

피부 점막이 물을 게걸스럽게 흡수했다. 뇌에 박혔던 몇 개의 파편도 사라진 듯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의 물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안주인은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 물이 가득한 병도 함께 준비해두었고 L의 손은 서둘러 뚜껑을 열고 입 속으로 물을 들이부었다. 모래가 씻겨나가고 뇌 속의 파편까지 씻겨나가는 기분이 들자 그녀의 생각은 최후의 기억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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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진 그날 밤의 마지막 칭다오 병을 바에 내려놓고 M과 택시를 탔다. 덴마크 남자가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바 앞을 종횡무진 왔다 갔다 하다가 안으로 들어가는 걸 창 너머로 봤다.

집에 와서 물을 마시며 M에게 B는 어디에 있냐고 물었고 조금 뒤에 그녀가 P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P는 L보다 더 놀라더니 황급히 B를 따라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L은 M에게 잘생긴 생일이라던 남자는 어쩌고 P와 온 거냐고 물었고 M은 조용히 웃으며 L을 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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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은 베개로 머리를 떨어뜨렸다가 물을 마셨다가 기절하듯 잠들었다가를 반복했다. 결국 다 씻겨나갔다고 믿었던 뇌 속의 파편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려오는 바람에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침대와 이불로부터 분리되고 싶지 않았지만 뭔가 조치가 필요했다.

아스피린이라도 먹어야 하나, 지금 몇 시지, 벌써 한 시도 넘었군, 누구 일어났나, 아참 월요일이니 다들 일하러 갔겠지, 아스피린은 포기해야겠군, 일단 나가서 커피를 마셔보자, 조금은 나아질지도 몰라.

거실에는 M과 B가 방금 지옥에서 돌아온 것 같은 얼굴로 L을 맞이했다.

각자 손에는 블랙커피를 한 잔씩 들었다.

다들 머릿속에 깨진 투명 접시의 파편 몇 조각이 들어있음이 분명했다.

포트 안에는 아직 뜨거운 물이 남아 있었다.

L이 마실 커피를 타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양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회색과 푸른색으로 구분되던 하늘과 바다는 이제 온통 회색으로 뒤덮여 누군가 발코니를 회색 벽으로 가로막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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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지독한 숙취에 시달리는 여행자에게 어마어마하게 짙은 농도의 미세먼지가 불러온 도시의 회색화는 여행을 자제하기 위한 완벽한 핑계를 제공했다.

B는 식중독에 걸려서 도저히 수업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칭다오에 와서 8개월 만에 처음으로 상사에게 알렸다 했고 M은 무사히 아침 수업 일정을 소화하고 돌아와 상사의 집에서 점심까지 먹고 왔지만 돌아와서 급격히 체력이 고갈됐단다.

과외 수업이 하나 있었지만 다른 날로 조정할 수 있었다고.

남은 하루를 함께할 수 있게 된 세 여자는 회색 벽에 가로막힌 거실에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며, L이 비상식량으로 준비해간 튀김우동 컵라면을 후루룩 먹어가며, 후식으로 달달한 한국식 인스턴트 다방커피를 마시며, 저마다의 이야기로 어젯밤의 퍼즐에서 빠진 조각들을 끼워 넣기 시작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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