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다오에서 생긴 일 #5

_ 경계

by Snoopyholic

그러니까 B에게 즐거웠던 시간이 악몽으로 변하기 시작한 건 몇 번의 데킬라샷 이후 곱상했던 생일 청년이 B를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B는 그가 운전대를 잡으면 안 된다고 설득하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남의 목숨이야 그렇다 쳐도 내 목숨이라도 건져야겠다 싶어 그를 피해 다니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러다가 열성을 지나 스토킹의 수위를 넘나들게 된 열혈 팬을 피해 숨을 곳을 찾는 P를 만나게 됐고 둘은 스릴이라는 감정을 매개로 밤의 유희를 조금 더 연장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들의 모험은 매우 혁신적이고 성공적이었다.

B는 P가 이건 하룻밤의 유희일 거라는 처음 예상과 달리 너무나도 간절하게 네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고 점심시간에 위챗으로 고백했으며 있다가 밤에 돌아오기로 했다고 밝혔다.

또한 B는 위챗과 구글 번역기를 통해 잘생겼던 남자가 결국 운전대를 잡았고 끝내 중앙 분리대를 들이받는 사고를 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한눈에 봐도 술에 절어 운전대를 잡았음이 분명한데도 경찰이 다음부터 조심하라고 경고 조치만 하고 보내줬다는 걸로 보아 아버지가 고위 관리 정도 되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는 이 지루한 시간이 빨리 가고 그저 무사히 호주로 가고 싶다고 적어두었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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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은 연달아 그녀 주위를 맴돌던 남자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T와 긴 대화 끝에 키스했음을 털어놓았다. 내일 오후에 만나 차를 마시며 다시 이야기해보자는 연락을 아침에 받았다고 덧붙였지만 분명 엄청나게 취했으니 의미 없는 키스였을 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L은 C가 충격적 발언 이후 T에게 했던 행동들을 설명했다. 여자들은 경악했다. 다음 화제는 덴마크 남자. B가 그런 저급한 주장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올 줄 몰랐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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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고개를 젓던 M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황급히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의 소리를 키웠다.

화면에는 C의 모습이 포착됐다. 배 위에서 석양을 배경으로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모습, 선원들과 힘을 합쳐 거친 바다를 헤쳐 나가는 모습 같은 것을 보여주며 뒤로는 내레이션으로 차분한 중국어가 깔려 나왔다.

얼굴이 그을리고 머리는 산발이 되고 수염이 덥수룩한 다른 사람들의 모습도 비쳤는데 지난 밤 C의 말대로라면 런던을 출발해서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는 세계일주 요트 레이스에서 그가 명령하는 대로 따라야만 하는 선원들일 것이다.

그 뒤로 C의 인터뷰가 이어졌는데 다행히 중국어 더빙이 아니라 자막이 나와 세 여자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예상 외로 빠른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뭔가요?

저의 카리스마죠.

역시 화려한 수상경력을 가진 뱃사람의 대답답군요?

하하, 농담입니다. 당연히 팀의 화합이죠. 저는 저의 선원들을 믿고 존중합니다. 그들은 저의 결정을 신뢰하고 따르지요. 오차나 실수가 의심되면 우리는 반드시 회의를 거쳐 어떤 방향으로 갈지 결정합니다.

어려운 일은 없었나요?

이 경주 자체가 옆에서 경쟁하는 보트를 볼 수 없기에 정신이 헤이해지기 쉽습니다. 정해진 마감 시간에 따라 가산점이 주어지고 그 점수를 합산해서 우승자를 가리기 때문에 팀원들의 정신을 무장시키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더군다나 호주에서 싱가포르를 거쳐 칭다오까지 오는 길이 의외로 거칠어서 팀원들의 사기가 많이 저하되어 있어요. 속도에는 문제가 없으니 이제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동안은 사기를 올리는 데 집중해야죠.

우승할 수 있을 것 같나요?

그건 오직 포세이돈이 답할 수 있는 문제인 것 같군요(윙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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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중국어 내레이션이 깔리고 다른 팀의 모습이 보였다.

다들 한번쯤은 칭다오를 거쳐 가는 모양이었다.

텔레비전을 바라보던 세 여자는 뭔가 홀린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지난 밤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며 담배 한 개비에 정색을 했다던 사람과는 너무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자기 일 우습게 아는 주정뱅이 선장이라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는데 화면 속의 그는 열정이 넘치고 오직 항해만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들이 밤사이 만난 남자들은 모두 첫인상과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거리낌 없이 여러 여자나 집적거리는 줄 알았던 T는 위트 넘치고 매너 있는 남자로, 귀여운 외모에 익살스러워 괜찮은 사람이라 여겼던 덴마크 남자는 편협한 생각의 고집불통으로, 호감형이던 중국 남자는 외모와 통제 불능의 응석받이로, 성실하고 멋진 인생을 사는 것으로 보였던 C는 조잔함의 극을 달리는 남자가 됐다.

역시 인간이란 그냥 잠시 보고는 알 수 없는 존재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물론 현재 형성된 의견마저도 시간을 가지고 더 지켜보면 언제든 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과의 앞으로의 관계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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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타인에 대해 수용이 가능한 지점과 불가능한 지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남자들 모두 친구라는 경계 안쪽으로 들이기엔 모두 여전히 미심쩍다는 것이 세 여자의 결론이었다.

어쨌든 M에게 T와의 키스는 앞으로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눈여겨볼 만했고 L로서는 종교에 대한 신념이 다르고 고집스럽다고 해서 굳이 막강한 유머 감각을 가진 덴마크 남자를 친구 목록에서 지울 필요는 없었다.

B의 경우 비록 L의 제보가 있기는 했으나 자기에게 자꾸만 로맨틱한 제스처를 취하는 P와의 관계가 핑크빛으로 발전되길 바라며 양 손의 검지와 중지를 교차시켰다.

그런 면에서 ‘친구’라는 경계는 남녀관계에 있어 참 편리한 존재였다.

잘되면 다른 관계로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고 이상이 감지되면 즉시 경계 밖으로 밀어내 바로 ‘남’으로 분류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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