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다오에서 생긴 일 #6

_ morning laoshan beer

by Snoopyholic

아파트 발코니와 바다 사이를 가로막았던 회색의 벽은 어느새 거무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수다에 집중하느라 잊고 있었는데 허기라는 손님이 불쑥 머리를 디밀었다.

부엌 찬장과 냉장고를 뒤지며 세 여자가 머리를 맞댔지만 어젯밤에 깨진 접시의 파편들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결국 고민을 포기하고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바깥에는 미세먼지와 매서운 봄바람이 제아무리 거세도 사람들이 나와 저마다 그룹의 특색을 드러내는 음악을 틀고 거기에 맞춰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시내로 나가는 버스 정거장으로 가는 길에는 중국스러운 음악이 나왔고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길에는 탱고 음악과 우아한 미뉴에트의 선율이 이쪽저쪽에서 흘러나왔다.

누구도 차려입거나 하지 않았다. 모두 그냥 일상의 일부라는 듯 나와서 천천히 움직이며 타이치를 하거나 서로를 붙들고 빙글빙글 돌거나 했다.

멀리 보이는 자동차의 라이트나 가로등의 불빛은 마치 안개 속인 것처럼 흐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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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에 손을 꽂고 몸을 움츠린 채 세 여자는 ‘타이 미 업(Thai me up)’이라는 오묘한 이름을 가진 태국 음식점에 도착했다.

주문할 때는 웨이터가 음료에 대해 물으며 와인을 추천했다.

평소였다면 맥주라도 한 병 주문했겠지만 그들은 동시에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물이나 더 달라고 덧붙였다. 옆 테이블에서는 러시아어가 뒤 테이블에선 불어와 영어가 주방에선 중국어가 흘러나왔다.

B는 P와 문자 주고받기에 바빴고 M과 L은 동남아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주문했던 음식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기대했던 식사였지만 완벽한 태국의 맛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국의 맛도 아닌 국적불명의 맛이라 실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묵묵히 위장의 요구대로 음식을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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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음악도 춤추는 사람들도 아무 것도 없었다.

찬바람과 어둠과 기분 나쁜 미세먼지 속을 힘겹게 밝히려는 가로등의 노력만이 있었을 뿐.

집으로 돌아온 L, M, B는 서둘러 각자의 방으로, 침대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머릿속 파편도 다 사라지고 속도 편해져서 좋은 것과는 별개로 벌써 다음 날이 휴가의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에 울적해져 뒤척이던 L이 잠들기 전 닫힌 문을 통해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는 P가 누른 초인종 소리, B가 문을 열고 그를 맞이하는 소리, 둘이 방으로 들어가는 동안 두런거리는 소리, B의 방 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오 걸, 스윗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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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바다에서 항해를 마치고 칭다오의 해변으로 돌아온 L은 거짓말처럼 투명하고 맑아진 공기를 호흡하며 두 번째 라오산 맥주의 캔을 땄다. 딱, 소리가 그렇게 경쾌하고 리듬감 있게 느껴질 수 있다니 신기했다.

야근한 뒤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러서 마시는 캔맥주 따는 소리는 음울한 외침처럼 들렸는데.

역시 인간이라는 존재는 처한 상황에 따라 감각이 오락가락 하는 법이다.

그러니 사람에 대해서는 오죽하랴.

스스로도 계속 변하는 게 인간이고 그 변화의 순간순간마다 타인에 대한 감정 또한 끊임없이 수정된다.

그 어느 누구도 똑같기만 할 수는 없다.

거리를 둔 채로 봤을 땐 오직 포장지로만 말할 수 있지만 가까이 관계라는 확대경을 들이밀면 변화가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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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다오만 마시다가 처음으로 시도해본 라오산 맥주는 가볍고 상큼한 맛이 났다.

만약 일요일 밤에 이걸 마셨다면 무언가 살짝 부족하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겠지만 맑고 쾌청한 오전 10시의 해변에서 마시기에는 완벽했다.

귀에는 이제 제이미 컬룸의 걸쭉한 목소리가 재즈 선율에 실려 흘러들고 있었다.

새 캔을 땄으니 새 안주를 먹기로 하고 한국에서 볼 수 없어 편의점에서 집어온 오이 맛이 나는 감자칩 봉지를 뜯었다.

한 조각 집어 와삭와삭 씹으며 맛을 음미해봤더니 오, 의외로 맛있었다.

어깨가 절로 들썩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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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L에게는 과연 어떻게 해야 휴가의 마지막 날을 완벽에 가깝게 보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만 남았다.

산책하기 좋다는 팔대관도 가고 싶고 중산공원도 거닐고 싶고 칭다오 맥주 박물관도 안 가면 서운할 것 같고, 유럽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영빈관도 무척이나 궁금한데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직 하루였다.

세상에, 그 유명한 횃불 동상의 야경도 보지 못했고 싸고 피로 푸는 데는 최고라는 마사지는 가게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고 꼭 본토에서 먹어보겠다고 결심했던 양꼬치는 막대기 꽁지도 잡아보지 못했다.

어디 그뿐인가, 훠궈도 못 먹었고 중국에 왔는데 보이차는 냄새도 못 맡아봤다.

이렇게 잔뜩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갑자기 L의 마음이 바빠지면서 그녀는 황급히 캔을 기울여 맥주를 입 속으로, 목구멍을 넘어 식도로, 위장으로 흐르게 했다. 남은 감자칩을 가방에 쑤셔 넣고는 발에 묻은 모래를 탁탁 털어냈다.

그리고 쭈글쭈글했던 양말에 발을 집어넣은 뒤 신발을 신고 일어나 후다닥 버스 정류장으로 뛰기 시작했다.



***


그 시각, C의 배는 누군가의 저주에 아랑곳 않고 순조롭게 태평양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날씨엔 세상의 모든 신들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없다가도 새록새록 솟아났다.

팀원들의 호흡도 잘 맞고 엔진도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흡족했다.

깊고 신비한 파란색 위를 적어도 한동안은 이렇게 부드럽게 미끄러질 거라 생각하니 아찔한 기쁨이 돌았다. 엑스터시.

햇살을 받아 은색으로 반짝이는 수평선이 조금씩 멀어지는 L의 뒷모습을 배웅했고 C로부터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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