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St. Patric's day Part2
택시가 멈춘 곳은 한 호텔 안에 있는 아이리시펍이었다.
L은 언젠가 서울에서 열렸던 행사를 떠올리며 아이리시 음악과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을 기대했지만 그냥 매우 현대적으로 꾸며진 평범한 호텔의 바에 지나지 않는 모습이라 실망했다.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도 얼마 보이지 않았거니와 그녀의 귓가에 꽝꽝거리는 필리핀 밴드의 음악소리는 버스킹 음악에조차 인색한 그녀를 당황하게 했다.
앉을 테이블을 찾을 새도 없이 세 여자가 등장하자마자 초록색 바탕에 하얀색으로 세잎클로버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T가 나타났다. M과 B에게 요란한 키스세례를 퍼부으며 해피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라고 외친 뒤 L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M은 T에게 L을 소개하고 둘은 악수로서 첫 대면을 마쳤다. 특별한 날이니만큼 신경 써서 행동하겠다고 말하며 그는 세 여인들에게 약간의 영국식 악센트로 무엇을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곧 그들의 테이블로 진토닉, 칭다오 맥주 두 병이 배달되었다.
빨대로 진토닉을 마시던 M이 잔을 들어 누군가에게 인사했다. 바의 어둠을 밝히기라도 하겠다는 듯 환하게 웃었지만 미소 뒤에 붙은 코멘트는 ‘웃기는 놈’이었다. 처음에 친하게 지내자며 다가오더니 중국인 여자들 사이에 인기가 높아지자 무시하더라고. 자기 나라에서는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던 애들이 중국으로 와서 그저 하얀 피부를 가졌다는 이유로 이곳 여자들이 선망하게 되자 성격까지 변하는 걸 몇 개월 만에 많이 목격했다 말하는 M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씁쓸했다.
실제로 곧 세 명의 이곳 출신일 거라 여겨지는 동양 여자 셋이 등장해 그를 둘러쌌고 그제야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L의 칭다오가 바닥을 보일 즈음에는 어둠 속에서도 눈에 확 띄는 금발에 귀여운 외모와 스코틀랜드 악센트를 가진 덴마크 남자가 나타나 네 개의 술을 들고 미소와 함께 합석했다. 세 여자는 처음에는 곱상한 남자의 출현에 심드렁했지만 점차 수위가 높아져가는 그의 빛나는 유머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L의 귀에는 거슬리기만 하는 팝송의 압도적 소음에 맞서기라도 하겠다는 듯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면 그럴수록 L은 점차 덴마크 남자의 유머에 흥미를 잃었다.
하지만 M과 B는 아까보다 훨씬 더 맹렬하게 웃어댔다.
드넓었던 바에는 몇 개의 그룹이 형성되어 있었다. 저마다 이방인과 현지인, 외지에서 온 거주자의 비율이 달랐고 뭔가 흥미로운 사건이라도 일어나길 기다리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마음에 드는 남자를 포함해 가능한 더 많은 남자들의 주의를 끌려는 여자들과 그런 그녀들의 그물에 쉽게 걸려드는 남자들, 그리고 게임에 응해주겠다며 다른 여자들과 어울리며 시선은 놓치지 않고 팽팽하게 맞서는 남자들이 뱅글뱅글 서로의 주변을 맴돌며 탐색전이 치열했다. 특히 T는 귀신처럼 남자들에 둘러싸인 여자들을 찾아내 중심부로 잠입해 그들과의 친분을 과시하곤 했다. L의 머릿속에 찾아든 물음표 하나, ‘대체 저 중에서 몇 명이랑 자봤을까?’ 딱히 낯선 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낯선 남자와의 유희에 관심이 없었기에 그 모든 게임에서 자유로웠던 L은 이제부터 즐거운 마음으로 이 무슨 일이든 터져버릴 것 같은 야릇한 밤의 분위기가 어떻게 흘러가게 될 것인지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L이 누군지 기억도 안 나는 남자로부터 건네받은 세 번째 칭다오 병을 손에 들었을 즈음 C가 다가왔다. 얇은 금테 안경을 끼고 호리호리하지만 단단한 몸매에 검게 그을린 피부를 가진 남자였다. 자기가 세계를 항해하는 레이스에 참가하는 배의 선장이라 소개한 뒤 이 호텔에서 하루 머문 뒤 아침 일찍 다음 목적지로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남자가 구사하는 악센트로 호주에서 왔다는 걸 알아챈 L은 그 나라 어디 출신이냐고 물었고 조금 놀란 표정의 C는 분다버그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곳은 거북이 산란으로 유명한 호주의 동부에 위치한 도시였다. L은 대학 시절 교환학생으로 멜번의 V 대학에서 1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고 방학 때 캐언즈에서 출발해서 동부해안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는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워낙 그때의 추억이 강렬해서 최대한 많은 기억하기 위해 다양한 지식을 흡수하려 애썼고 많은 기록을 남겨두었기에 그쪽에 대해서는 꽤 잘 알고 있었다. C는 그녀가 가진 자신의 고향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놀라며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바의 홀 전체로 분산됐던 그녀의 주의는 배를 타고 지구를 한 바퀴 도는 항해 중이라는 호주 출신의 선장에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로에게 집중됐던 대화가 잠시 중단되고 주위를 둘러보니 뭔가 썰렁한 느낌이었다. L의 심기를 건드리던 밴드의 음악이 끝난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호텔의 바에는 순식간에 파장 분위기가 조성됐다. 사람들은 하나둘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뭔가 끝나지 않은 흥분의 파도가 홀로 밀려들었고 M과 B, 덴마크 남자, L과 C는 택시를 나눠 타고 조류를 따라 장소를 옮기기로 했다.
LPG라는 흥미로운 이름을 가진 바에는 호텔의 바에 흩어져 있었던 얼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바텐더는 목을 쭉 빼 밀고 시끄러운 음악에 섞여 날아드는 손님들의 다양한 주문을 받으며 손으로는 이미 머릿속으로 인식된 주문들을 실행에 옮기고 계산을 해내느라 분주했다. 어렵게 테이블을 찾아 앉았는데 머리가 짧은 중국인 중년남자가 다짜고짜 합석해서 앉더니 맥주를 한 병씩 돌렸다. 그의 짧은 영어 문장들은 금세 테이블 사람들을 지루하게 만들었고 하나둘 슬금슬금 다른 흥미를 찾아 떠났다.
그나마 B가 마지막까지 중국어로 대화를 이어가려고 애썼으나 맥주병이 비워지자 새로운 맥주를 핑계로 테이블을 떠났다. 이제 그 남자와 남겨진 건 L과 C. 그는 다짜고짜 자기가 이십오 년 전에 미국의 미네소타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고, 이제 중국을 정리하고 다시 미국으로 갈 생각이라고 말하더니 C에게 미국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다. 목소리는 해파리마냥 흐느적거렸고 동공이 풀린 눈은 흐리멍덩했다. C는 자신은 호주 사람이라고 밝히며 미네소타에는 가본 적 없지만 뉴욕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남자는 뉴욕 사는 게 얼마나 힘드냐고, 비싸지 않느냐고 하더니만 집세가 얼마냐고 물었다. C는 자신은 호주 사람이며 뉴욕의 집세는 모르고 지금은 항해중이라고 했다. 남자는 다시 그래서 얼마냐고 말했다. 그러자 C는 L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지금 신혼여행 중이라고 말하더니 부인이 친구들을 찾고 있으니 저쪽으로 가겠다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와 함께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빠져나왔다. 중국 남자는 질문하듯 허니문을 세 번 외치더니만 슬금슬금 뒷걸음치는 ‘짝퉁’ 신혼부부에게 축하한다고 연신 소리 질렀다. 그리고 미국에 가면 뉴욕에 갈 테니 꼭 만나자는 말도 덧붙였다.
다른 테이블로 넘어온 C는 B에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남자를 떠넘긴 거냐고 나무랐고 B는 어떻게 중국 남자를 혼자 남겨두고 올 수 있냐고, 무례하다 맞서더니 그 남자가 있는 테이블로 돌아가 버렸다. L은 C에게 부인의 맥주병이 비었으니 냉큼 시원한 맥주가 가득한 병을 대령하라고 요구했고 M은 같은 고향에서 왔다는 참 순하게 생긴 남자와 뭔가 열띤 대화를 나누었고 둘의 뒤에는 아까부터 M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주위를 맴도는 동유럽권 출신의 남자가 하나 있었다. 금발의 덴마크 남자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봉을 잡고 기다란 팔다리를 흐느적거려봤지만 그의 작전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머쓱해진 그는 M의 소규모 동향회를 방해하기로 결정하고 둘의 대화로 끼어들었다.
L이 자신의 요구대로 차가운 맥주를 가져다준 것에 대해 ‘짝퉁’ 남편을 칭송하자 C는 공손히 바에 있는 초록색 티셔츠를 입은 남자를 가리키며 저 친구가 내는 거라 했다. 아까 여자 셋에게 첫 번째 술을 제공했던 T였다. 다시 모든 멤버들이 이쪽 테이블로 모여 그룹을 형성하고 대화가 시작됐다.
처음 화제의 중심은 세계를 항해 중인 C였다. 저마다 앞 다투어 ‘쿨’을 연발했고 다양한 질문들이 등장했다. C는 이런 주목이 당연하다는 듯 능숙하게 대답들을 쏟아냈다. 누가 봐도 그가 하는 일은 위험천만하면서도 근사했다.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봤을 법한 모험으로 가득한 인생을 실제로 사는 인물이었던 셈이다. 누군가 그에게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면 능청스레 아마 텔레비전에서였을 거라 답하는 그였다. 그런 그의 태도가 돌변한 건 M이 던진 질문 하나였다.
아침 일찍 새벽부터 항해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렇게 늦게까지 술을 잔뜩 마셔도 되는 것이냐고 묻자 C는 갑자기 격양된 어조로, “일? 난 일하지 않아! 지시할 뿐이지. 선원들이 내 명령에 따라 좇 빠지게 일하는 거라고. 씨발, 누가 감히 나보고 일하래”라고 했다.
그 이후 아무도 그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 후 C의 위풍당당 ‘쿨’선船은 조금씩 침몰하는 것 같았다. 그나마 그의 배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기 직전에 말을 걸어준 것은 T였다. 담배 한 개비 있느냐 했더니 C는 있지만 줄 수 없다고 매몰차게 했다. 너 같은 사람이 자꾸만 와서 나한테서 담배를 한 개비씩 가져가면 자신의 담뱃갑이 금세 텅텅 비게 될 거라는 말도 속사포로 퍼부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L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T는 호의로 맥주까지 사준 사람이었는데 새 담뱃갑에서 한 개비 꺼내어 건네는 일을 세상의 종말인 양 표현한 C를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뒤 그는 호텔에 돌아가야 하는데 혹시 택시비 같이 내지 않겠느냐고 사람들을 귀찮게 하기 시작했다. C가 떠난다는 말에 무리 중에 있던 한 여성이 여정을 업데이트하는 패이스북 페이지 같은 것이 있느냐고 묻자 “내 전여친이 패이스북에서 당신의 이름을 발견하면 좋아할 것 같지 않다”는 말을 쏘더니 문 밖으로 사라졌다.
L은 그 여성이 저쪽의 친구들에게 돌아가 미친 주정뱅이 선장의 배 따위는 바다 한가운데서 침몰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걸 듣고는 속으로 동감이라고 외치며 킬킬거렸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