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St. Patric's day Part1
한 시간 반을 날아왔을 뿐인데 류팅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모든 것이 낯설어졌다.
인천공항에서의 하늘은 미세먼지와 황사 때문에 잿빛이었는데 이곳의 하늘은 쾌청 그 자체였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들이 귀를 쏘아댔고 알 것 같으면서도 해독이 불가능한 문자들이 눈에 어른거렸다. 한국 사람이 그렇게 많다고 하더니만 비행기 타고 함께 온 사람들조차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순식간에 흩어지니 전혀 실감할 수 없는 풍문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공항 안내판에 적힌 자동차 모양과 TAXI라는 표지를 따라 정거장에 줄을 설 수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택시 잡는 일은 수월했다. 타자마자 운전수에게 중국어로 또박또박 적은 주소를 보여주었다.
흰색이 바래 회색이 된 꼬질꼬질한 느낌의 시트로 덮인 택시 안에는 퀴퀴한 냄새가 풍겼다.
담배를 피우는 것이 분명한 운전수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심각한 뉴스가 나오는 듯하더니 감미로운 여자 가수의 노래가 흘렀다. 창밖의 풍경은 경쟁적으로 높이 올라가는 빌딩들의 건설현장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남성적인 기운을 풍기는 라오산의 늠름한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수많은 공사 때문에 수려했을 경관이 무차별하게 망가지는 현장을 지나치며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다. 동시에 도대체 얼마의 돈이 이 지역으로 유입되고 있는가를 생각하며 아찔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바다가 보일 즈음 L은 곧 목적지에 도착할 것임을 예감하곤 드디어 택시를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만나자마자 M은 두 팔 벌려 L을 꼭 껴안고는 반갑다고, 내 집처럼 편하게 지내다 가라고 말했다. L은 즉시 그 말을 이행했다. 매우 짤막하고 통속적인 자기소개를 끝내고 M의 손에 이끌려 사흘 밤을 잠들게 될 방으로 인도받았는데 잠시 노곤함을 달랜다고 누웠으나 깊은 수면의 세계로 빠져들고 말았던 것이다.
L의 눈이 떠진 시각은 정확히 두 시 이십이 분이었다. 몸 위에는 부드럽고 폭신한 오리털 이불이 덮여 있었고 탁자 옆에는 물 한 컵과 특이한 십자 모양의 은빛 열쇠, 칭다오 부분을 표시해둔 론리플레닛 중국, 분홍색 직사각형 모양의 포스트잇 쪽지가 두 장 포개진 상태로 남겨져 있었다.
‘푹 잤니? 과외가 있어서 외출해. 3시 이후에는 시간이 있어. 혹시 혼자 둘러보고 싶으면 이 열쇠를 사용하면 돼. 배고프면 부엌에서 뭐든 찾아 먹어. 있다가 일곱 시에 만나기로 한 것 잊지 말고 Enjoy your Qingdao! :)
_M
p.s. B도 그즈음이면 돌아올 거니까 있다 다 같이 볼 수 있을 거야.’
밑에 있는 다른 한 장의 종이에는 무선 인터넷 비밀번호, 중국어로 된 이 집의 주소와 그녀의 전화번호가 있었다. 그녀의 파란색 글씨의 둥글함에서 여유로움과 재치가 느껴졌다. 바르고 시원한 필체로 미루어보아 손으로 글씨를 자주 쓰는 사람인 듯도 했다.
물 컵을 단숨에 비우고는 론리플레닛을 뒤적이며 침대 위를 데굴거리다가 작은 글씨가 어지럽다는 생각에 접고 밖으로 나왔다. 고요함 속에 끼이익 방 문 열리는 소리가 기괴스럽게 크게 들려 마음이 서늘해졌다.
아무도 없는데 괜히 살금살금 걸음을 옮기며 집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두 개의 화장실과 방 세 개, 거실 겸 식당, 분리된 부엌으로 이루어진 조금은 오래된 듯한 아파트였다. 하지만 그 낡은 느낌이 L에게는 오히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사실 이곳의 모든 단점을 가려줄 비장의 무기는 발코니 너머로 보이는 탁 트인 바다였다. 그녀가 묵는 방에서도 바다가 보이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크기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과감히 문을 열어젖히니 차가운 바다 바람이 쏴아 몰려들어왔다. 그래도 L은 따사로운 봄 햇살 아래에서 마시는 그 공기로 숨통이 확 트이고 머릿속까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세면도구가 든 가방을 화장실에 걸어두고 자주 사용하는 화장품들을 평소 사용하던 대로 세워두고 옷가지도 꺼내 걸어두었다. 아까부터 무시했던 뱃속의 신호를 더 이상 내버려둘 수 없어서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뒤적였다. 반은 가지런하게 세워진 초록색 칭다오 맥주병들로 채워져 있었고 나머지 칸에는 요거트나 과일 같은 것들로 듬성듬성 차 있었다.
옆 선반에 있던 뮤슬리와 빈 그릇과 숟가락을 챙겨 나와 서양식으로 첫 번째 끼니를 해결했다. 일단 위장의 시위대는 진정시켰으니 이제 두뇌의 감각을 깨워줄 커피가 필요했다. 포트에 물을 붓고 스위치를 누른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M이 돌아왔다. 그녀는 L에게 잠자리는 불편하지 않았는지 물은 뒤 자신도 한 잔 마셔야겠다며 인스턴트커피를 가져왔다. 물이 끓자 진하게, 약하게? L의 취향을 묻고는 가루를 뜨거운 물에 넣고 휘휘 저은 뒤 컵을 L 앞에 내려놓았다.
커피를 마시며 두 여자는 서로에 대해 조금 더 많은 정보를 가지게 됐다. 특히 국적과 인종은 다르지만 소스라치게 닮은꼴인 전남친과의 이별 이야기는 순식간에 둘을 분노와 연민으로 연대시켰다. 커피를 다 마시자 M은 L이 열심히 조사해서 빼곡히 적어온 수첩을 들여다보더니 기꺼이 가이드를 자청하고선 그녀를 밖으로 이끌었다.
그들의 첫 목적지는 잔교.
맥주 애호가인 L이 기대를 걸었던 곳으로 칭다오 맥주의 로고 속 건물이 있는 곳이라 반드시 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태풍으로 유실되어 몇 개월째 공사 중이었다.
하는 수 없이 멀리서 복원 중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M도 이쪽엔 오랜만에 와보는 거라 몰랐다고, 다음에 또 오라고 했다.
L은 실망을 감출 수 없었으나 잔교 뒤로 보이는 청도의 스카이라인이 마음에 들어 밤에 다시 한 번 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음 코스는 유명한 꼬치집. 수많은 사람들과 소스가 떨어져 옷에 떨어지지 않도록 엉덩이를 쭉 빼고 어정쩡하게 선 포즈로 짭조름하고 매콤하면서도 강한 향신료 맛이 느껴지는 통오징어 꼬치를 먹고 있자니 말로만 들었던 B가 나타났다.
금발에 푸른 눈 빨간 립스틱이 인상적인 B는 나타나자마자 무작정 깔깔 웃어대더니 L과 M의 사진을 찍어서 둘에게 보여줬다. 사진 속의 두 여자는 입 주위에 붉은 소스를 잔뜩 묻히고 한 손에는 기다란 꼬치를 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B의 웃음소리에 두 개의 다른 웃음소리가 더해졌다. 그 웃음은 전염성이 강해서 근처에서 꼬치를 먹던 다른 사람들, 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 지나가던 행인들까지 키득거리게 만들었다.
근처의 유명하다는 춘허루에서 L은 이번 휴가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중국 음식을 만날 수 있었다. 이국적인 음식과 향신료가 입에 짝짝 달라붙었다. 한국 사람들이 사랑하는 탕수리지와 M의 추천메뉴인 탱탱한 새우가 씹히는 만두, B가 좋아하는 가지 튀김에 곁들인 칭다오 맥주 세 병은 차갑게 나왔다.
로고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아까 잔교를 볼 수 없었던 아쉬움을 달랬다. 밥을 다 먹고 나오니 벌써 하늘이 어둑해지려 했다. 벽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어린 독일인들이 지었다는 성당을 지나 택시를 타고 소어산 공원으로 갔다.
택시 안에서 운전사와 오가는 B의 능숙한 중국어가 인상적이었다. L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던 둘의 대화를 들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저걸 알아들을 수 있도록 중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열망을 다시 한 번 확고히 했다.
L이 블로그로 다른 사람들의 이곳 여행에 심취했을 무렵 칭다오에 갈 것이라면 소어산부터 다녀올 것을 추천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저녁 산책이 되어버린 그곳에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운이 좋아서 야간에 잠시 무료로 개방하는 시간에 올라갈 수 있었다. 20분 정도만 걸어 올라가면 그야말로 청도의 파노라마가 발밑에 펼쳐지는 장관을 만나게 된다. 아직은 낯의 기운이 푸르스름하게 남아 있는 하늘과 짙은 쪽빛의 바다, 도시에 하나둘씩 켜지는 형형색색의 반짝이는 불빛들…… 기온이 떨어져 제법 쌀쌀하고 바람이 꽤 거셌지만 여자 셋은 분주히 사진을 찍고 요란하게 수다를 떨며 몸의 온기를 유지했다.
다음 코스는 아이리시펍이었다.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를 축하하는 파티가 열릴 예정이었다.
원래 아일랜드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성인 패트릭스를 기념하는 날이었는데 어찌 보면 이제는 퍼레이드와 맥주로 가득한 파티로 더 유명해진 축일이다.
중요한 것은 몸에 무언가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초록색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잠시 여자들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M은 초록색 매니큐어를 바르고 초록색 머리띠를 하더니 마무리로 초록색 스카프를 둘렀다. 소소한 메이크업을 더했을 뿐인데 이목구비가 훨씬 뚜렷해졌다. 분주히 정신없는 그녀를 시큰둥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B는 화려한 복장과 진한 메이크업으로 변신했지만 어디에도 초록색은 보이지 않았다.
의문의 눈초리를 보내는 M에게 누가 물으면 초록색 속옷을 입었다고 답해주겠단다.
비록 여행자였지만 L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싶어서 가져온 옷들을 뒤지다가 청록색 스웨터를 찾아냈고 혹시 몰라 가져왔던 털모자에 초록색 실이 들어갔음에 안도했다.
이윽고 세 여자는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다는 기대로 한껏 부풀어서 택시에 몸을 실었다.
走吧[zǒuba](중국어로 가자는 뜻).
Let the party begin!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