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다오에서 생긴 일 #1

_ Seoul to Qingdao

by Snoopyholic

L은 칭다오의 해변에 앉아 라오산 맥주를 마시며 은빛으로 반짝이는 바다가 바람의 결에 따라 흔들리는 것을 몽롱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여행에 어울리는 잭 존슨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화요일 아침 10시.

이 시간에 해변에 맨발로 다리를 쭉 뻗고 앉아 봄 햇살을 받으며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건 오직 휴가를 떠나온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 생각하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내일이면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잠시 잊기로 했다.

가방에서 준비해온 옥수수 소시지 안주를 꺼내 앙 베어 문 뒤 꼭꼭 씹었다.

이따금씩 씹히는 옥수수의 쫀득함과 고소함이 마음에 드는, 맥주를 산 편의점에서 뭐 안줏거리 없나 기웃거리다 우연히 발견한 주전부리였다.

바다에는 장난감보다 더 작은 배들이 유유히 떠다녔다.

멀리서 봤을 때는 작아 보이겠지만 실제로 다가가서 보면 거대한 무역선들일 것이다.

어떤 물건들이 어디를 출발해 어디로 향해가는 것일까. 항구는 컨테이너들과 저런 배들로 가득하겠구나. C의 배가 아직 침몰하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쯤 어느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을까 떠올리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 생각의 바다를 항해하던 함선은 일요일이라는 방향으로 천천히 키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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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이 휴가를 칭다오로 간다고 패이스북에 공표하자 미국에 있는 그녀의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주 좋은 친구 M이 그 도시에 살기에 자신도 가본 적이 있다며 간 김에 M을 만나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패이스북을 금지하는 중국이니 중국 사람들이 한국의 카카오톡처럼 쓴다는 위챗을 깔아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L은 어디선가 여행은 사람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문구를 읽은 기억이 난다며 고맙다고, 잘 부탁한다고 친구에게 답신을 보냈다.

사실 L에게 이번 휴가는 조금 특별한 것이었다. 3년 동안 다녔던 회사로부터 수개월 내로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써보지 못한 휴가를 모조리 쓴 뒤에 퇴사할 것을 결심했기 때문이다

물론 회사에는 그 원대한 계획을 누설하지 않았다.

유난히 휴가에 야박한 회사에서 혹시 소문이라도 퍼지면 좋을 일이 없을 테니 그럴 바에야 유급휴가를 누리고 사라지는 것이 남는 장사라는 결론.

3년 동안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휴가를 낼 수 있었다면 계속 열심히 월말이면 따박따박 입금되는 급여에 안주하고 살아갈 수도 있었으리라. 아니다. 그때만 해도 휴가를 마치고 돌아갔을 때 그녀의 책상이 없어졌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너무 컸다.

친했던 동료가 일주일 휴가 한번 썼다가 그 책상이 빠지고 화분이 그 자리를 재빨리 메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혹시 그녀도 퇴사를 작정하고 그런 휴가를 자행했을까? 사실 여부는 확인한 적이 없지만(이상하게도 회사 동료와는 누군가의 퇴사와 동시에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기게 된다) 어쨌든 L의 회사에서 부장급 이하로는 연차를 쓰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나흘이 넘는 휴가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의 앞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므로 그녀도 일주일 휴가를 한꺼번에 내는 만행은 저지르지 않았다. 대신 며칠씩 날짜를 나누어 야금야금 그러나 옹골지게 휴가 일수를 소진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 첫 번째 시도로서 일요일을 끼고 수요일 오전 반차까지 쓰면 오후에는 회사로 돌아올 수 있도록 칭다오 여행 일정을 잡아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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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를 칭다오로 정한 것은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더 나이 들기 전에 중국어를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막연히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가게 된다면 칭다오가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한국에서 너무 멀지 않으니까.

그 이유로 유난히 한국 사람이 많은 곳이라고들 하는데 이렇게 중국어 열풍이 거센 시대에 한국 사람들이 많은 건 어딜 가든 매한가지 아니겠는가. 하지만 L의 예감은 그야말로 막연함 그 자체였기에 그녀는 이번 휴가를 투자해서 과연 자신이 칭다오와 중국어에 대해 정확하게 예감했는지 아니었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만약 아니라면 다시 비슷하게 휴가를 내어 다른 것을 모색하면 될 일이었으니까. 솔직히 중국어는 핑계다.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하긴 했지만 백수가 됨과 동시에 쏟아지게 될 엄마의 잔소리, 아빠의 한층 심해질 것이 분명한 결혼에 대한 압박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녀에겐 어디로라도 좋으니 한국을 탈출할 수 있는 완벽한 이유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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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은 마음을 굳힌 즉시 휴가계를 제출하고 회사에서 짬짬이 스릴 넘치게 몰래하는 ‘폭풍 검색질’을 통해 가장 저렴한 비행기 표와 중국 비자대행 여행사를 찾아냈다. 퇴근 후의 밤들은 조금 넘치는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이미 그 도시를 여행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여정을 함께 더듬는 일로 채워졌다. 수첩 하나 꺼내놓고 먹고 싶은 음식의 이름, 가고 싶은 장소의 명칭 등 필요한 중국말들을 꼭꼭 눌러 적어 넣었다. 친구로부터 소개받은 새로운 현지 친구와도 위챗으로 안부를 묻고 만날 날짜를 공모하던 도중 숙소에 대해 이야기하다 그냥 집으로 와서 자라는 제안을 받았다. B라는 다른 친구도 살고 있는데 이미 허락을 받아둔 상태라고.

L은 살짝 고민했지만 현지에 사는 타인의 소파에서 잠든다는 카우치서핑 같은 것이 아무렇지 않게 트랜드로 자리잡아가는 세상임을 떠올리며 흔쾌히 고맙다고 답했다. 사실 기껏 떠난 휴가에서 답답한 호텔방에 밤만 되면 혼자 들어가야 하는 것도 심심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배낭여행자 숙소의 이층침대에 몸을 구겨 넣거나 공동욕실을 사용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 고민하던 차였다. 금요일 점심시간을 이용해 거래 은행으로 달려가 인터넷으로 환전해둔 돈까지 찾으니 하니 정말 가긴 가는구나, 싶어 실성한 사람처럼 종일 웃었다. 다만 토요일은 휴가 뒤 반드시 몰아칠 업무 후폭풍을 최소화하기 위해 늦은 시간까지 야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망의 일요일. 여덟 시 삼십 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는 늦어도 일곱 시에는 도착해야 했기에 집에서 다섯 시 반에 나왔다. 늦은 야근 덕분에 짐 싸느라 잠을 두 시간밖에 못 자서 걱정했지만 무사히 잠에서 깨어 공항 셔틀을 타고 인천공항으로 가서 수속을 마쳤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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