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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곧 Mar 12. 2024

좋은 생각이 났다면 그냥 할 것

하지 않을 이유는 몇 개나 있고, 할 이유는 딱히 찾을 수 없더라도


주화입마에 빠져있다 보면 기운이 잘 모이지 않고 허망하게 흩어지기 일쑤다. 이따금씩 이런 걸 해 볼까 하는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들 때도 있지만 어째선지 시작하지 못한다. 시작하지 않고 있다 보면 하지 않을 이유가 금방 떠오른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안 해도 별 상관없잖아. (하지만 애초에 의미 있는 일이 뭔가?)

귀찮게 뭘 또 하나. 그럴 시간에 논문이나 쓰지. (하지만 결국엔 논문도 안 쓴다.)


인생이 수렁에 빠졌을 때 범하기 쉬운 실수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편에 출근을 안 하면서 악순환이 시작된다고 썼던 것과도 통하는 이야기다. 기분이 나빠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하니 기분은 더 나쁘다. 그러니까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무언가 떠올랐다면 따지지 말고 웬만하면 그냥 하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




#1

연구실을 옮긴 후에도 무기력한 기분은 계속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새 연구실에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도 그 원인 중 하나인 것 같다. 뭐라도 돌파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계속했는데 결국 아무것도 안 하면서 점점 상태는 더 나빠졌다.  


어느 날 의욕이 잠깐 돌아왔을 때 마침 교수님이 옆에 계시기에 수업을 하나 추천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박사 졸업을 위한 수업 이수 요건은 진작에 다 채워두었지만, 자진해서 추가로 수업을 듣기로 한 것이다.


기운이 반짝 났을 때 누군가에게 계획을 말해버리거나, 어딘가에 참가 신청을 해버리는 것 등이 도움이 된다. 반짝 생긴 기운을 이용해 여기까지는 할 수 있을 때가 많다. 당장 행동을 실행까지 할 여유는 없더라도 말이다.


결국 박사 말년차에 인체 해부 실습이 포함된 해부학 수업*을 들으러 갔다. 힘들다고 다른 종류의 힘든 일을 끼얹은 꼴이 되긴 했으나, 배운 것도 많고 일상을 유지하는 데에도 꽤 도움을 많이 받았다.


#2

해부학 수업을 들으면서 자유 주제로 발표를 할 일이 있었다. 내가 그래도 기계과니까 로봇과 사람의 움직임을 비교해야겠다. 주제를 정해놓고 나니까 또, 그럼 장난감 같은 로봇이라도 만들어서 보여줘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잠시동안 이 생각에 무척 신났는데, 금방 기운이 빠졌다. 괜히 오버하면 뭐 해. 이상해 보이기만 할걸. 그거 안 보여줘도 평가 점수를 받는 데는 전혀 지장 없잖아. 발표 자료 만들 시간도 부족한데 거기나 집중하자.  


하지만 좋은 생각이 났을 때는 하는 걸 원칙으로 하겠다고 정한 참이다. 미루고 미루다가 발표 전날에야 로봇을 만들 준비를 한다.


어라, 그런데 재료가 다 있는 줄 알았는데 회로에 연결할 전선이 아무리 찾아도 없다. 금방 스스로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그래, 뭘 또 하나. 하지 말자. 내일 발표인데 사실 이미 늦었지 뭐. 그러고 몇 시간쯤 또 앉아 있었다. 안 하려니까 마음이 불편했다. 좋은 생각이 났을 때는 하는 걸 원칙으로 하기로 했으니까.


검색해 보니 마트에 같은 규격의 전선을 파는 것 같았다. 한숨을 쉬고 일어난다. 안 할 이유가 많지만 그래도 최대한 해보기로 한다.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자전거를 꺼내서 올라타기까지 정말 어마어마하게 힘들었는데 타고 가기 시작하니 금세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20분 정도 타고 가서 전선을 사서 다시 자전거를 타고 돌아왔다. 사서 돌아오는데 문득 삶의 주도권을 되찾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느낌은 며칠 안 가서 없어졌다.)


나의 로봇(?) 재료

결국 (로봇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간단한 거였지만) 로봇 비슷한 걸 만들어서 발표를 하러 갔다. 다들 좋아했다. 나도 기뻤다. 내가 떠올린 좋은 생각을 내가 묻어버리지 않아서.  


#3

어느 날은 연구실에 혼자 앉아 논문을 쓰려다 보니 너무 외롭고 고립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커피를 마셔서 그런지 모임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써야 할 논문이나 보고서, 제안서 등을 자꾸 미루면서 못 쓰는 일이 연구자들에게는 꽤 흔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정해서 모여 앉는 것으로 서로에게 약간의 강제성을 부여하면 좋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생각만 한 채로 몇 달쯤 또 시간을 보냈다.


또다시 커피를 잘 마신 어느 날, 모임을 정말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친김에 모임시간을 정하고 웃기는 포스터까지 만들었다. 공용 공간에서 무슨 요일 아침 몇 시에 모여서 논문을 쓰자고. 원하는 시간에 와서 원하는 일을 하다 가라고. 포스터를 신나게 만들었는데 또 마음에 제동이 걸렸다. 이런 거 붙이면 나 좀 너무 이상한 사람 같나. 하지만 일단 붙여 보기로 했다.


결론적으로 포스터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무척 설레면서 모임에 갔는데 몇 주 내내 정말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럴 거면 뭘 그렇게 망설였나. 실망스럽기도 하고 괜히 민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임을 계획했으니 계획대로 혼자라도 공용 공간에 앉아서 일을 하기로 했다. 3주인가 하고 일이 생겨서 그만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라도 그 시간엔 논문을 썼으니 1차적인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무언가 해볼까? 하는 생각을, 마치 비바람 속에 겨우 고개를 내민 여린 싹처럼 잘 가꾸고 지켜야 한다. 이 싹은 지킬 가치가 있으며, 지키지 않으면 금방 꺾여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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