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씩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울과 무기력의 악순환이 심했을 때 스마트폰에 의존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별 감동도 없는 웹소설과 짧은 영상을 종일 보곤 했는데 볼수록 기분이 나빴고 기분이 나빠서 더 봤다. 하루 10시간씩 폰을 붙들고 있었으니 하루 절반을, 잠자는 시간을 빼면 거의 대부분을 폰을 보며 보냈던 것이다.
내 경우엔 불편한 감정을 피해 생각을 마비시키는 방식이 스마트폰이었던 것 같다. 내가 피하려던 불편한 감정은 다양했다. 내가 겪은 일에 대한 억울함, 분노, 자책 같은 것일 때도 있었고, 새로 시작한 연구가 막막해서일 때도 있었고, 인간관계의 괴로움이나 외로움일 때도 있었다. 불편한 감정 중에 내가 특히 취약했던 것은 압도되는 느낌(overwhelmed)이었던 것 같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때, 이미 적절한 때를 지나쳤기에 처리하기 복잡해진 일들이 쌓여갈 때, 삶이 나에게 무어라 말하는 것만 같은데 도저히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서 외면하고 있을 때.
스마트폰 사용은 쉽게 습관이 되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괴로운 기분이 몰려왔기에 폰을 들여다보았다. 배가 너무 고프거나 화장실을 가야 하거나 할 때가 되어서야 겨우 침대에서 벗어났지만 폰을 들고 다녔다. 일을 하겠다며 자리에 앉으면서도 습관적으로 폰부터 손에 들었고 몇 시간씩이 금방 흘러갔다. 한참 걸려서 노트북을 켜놓고는 켜지는 동안 폰을 보기 시작해서 계속 봤다. 겨우 거기서 빠져나와서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하면 또 불편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자마자 또 폰을 손에 들었다. 일을 하겠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보내는 날들도 많았다. 나중에는 폰을 집어 들고 동영상이나 소설 앱을 켜는 동작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무언가 문제가 있었다.
지금은 폰 사용 시간이 꽤 정상적인 범위로 돌아와서, 필요한 연락, 메모나 지도 앱 등을 제외하면 사용 시간이 20분 안팎 정도 된다. 가끔 다시 의존의 늪에 빠져들어가는 느낌이 들 때도 있는데 그래도 이제는 2-3일 안에 빠져나오게 된 것 같다.
다음은 내가 느끼기에 유용했던 방법들이다. 내 경우엔 뭐든 살짝씩 하는 게 유효했는데, 습관과 중독, 의존 같은 것은 굳은 결심만으로 싸울 수 있는 것들은 아니어서 전략이 필요하다.
1.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살짝 자각하기
행동을 바꿀 필요는 없고 일단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는 데서 시작한다. 요즘 전자기기에는 화면 사용 시간을 추적하는 기능이 기본으로 탑재되어 있는 듯한데, 나는 기기 사용 시간을 스마트폰 홈 배경화면에 표시되게 해 두었다. 막연하게 요즘 폰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는 것과, 10시간 21분이라고 측정된 것을 보는 것은 다르다.
이 시간을 보면 불편해져서 마음이 더 괴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함정인데, 그렇다고 추적 기능을 끄거나 숨겨 버리면 곤란하다. 안 본다고 없던 일이 되는가? 내 기기 사용 시간을 볼 때 마음이 불편하다면 사용 시간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측정과 모니터링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사용 시간이 얼마이건 평온하고 만족스럽다면 별 행동을 취하지 않아도 좋다.)
기기 사용 시간을 며칠간 들여다보다 보면 마음이 점점 더 불편해지는데, 이 불편함이 한도를 넘어설 때쯤 무언가 하면 된다.
2. 살짝 기분이 덜 나쁜 딴짓으로 바꾸기
바뀌겠다는 의지가 있다고 해서 습관이 딱 끊어지지는 않는데, 습관의 방향을 살짝 돌리는 것은 추천할 만하다. 비슷한 종류의, 그러나 하고 나서 기분이 조금이라도 덜 나쁜 쪽으로 습관을 전환해 보는 것이다. 이 편이 완전히 멈추는 것보다 쉬웠다.
살짝 바꾸기
- 바보 같은 웹소설보다는 잘 쓴 웹소설 읽기, 그보다는 비문학 전자책 읽기:
웹소설 자체가 문제는 아님을 우선 밝힌다. 그저 내 경우엔 특정 종류의 소설은 마음속으론 싫어하면서도 시간을 죽이려고 읽었고, 그게 기분을 더 나쁘게 했기에 하는 말이다. 그럴 바엔 이왕이면 잘 쓴 웹소설을 읽자. 그리고 에너지가 좀 더 모인다면, 웹소설보다는 고전이나 비문학 전자책을 보는 것도 좋겠다. 그 편이 웹소설보다 나중에 마음이 더 편하다면 말이다. (즐겁게 읽는 웹소설은 문제없음!)
- 끝없는 숏 폼보다는 주제가 있는 영상 보기:
이것도 마찬가지. 내 경우엔 짧은 영상을 끝도 없이 스크롤하며 보다가 기분이 수렁에 빠지곤 했기에 다른 영상으로 습관을 돌렸다. 취미에 대한 영상이나 심리학 강의, 특히 팟캐스트 듣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3. 덜 하고 싶은 행동은 살짝 어렵게, 더 하고 싶은 행동은 살짝 쉽게
하고 나면 결과적으로 기분이 나아지는 행동과 나빠지는 행동이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기분이 나아지는 행동은 더 많이 하고, 기분이 나빠지는 행동은 줄이면 기분이 나아진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 오래 하기는 기분이 나빠지는 행동, 산책은 기분이 나아지는 행동이다.
더 하고 싶은 행동은 조금이라도 쉽게, 덜 하고 싶은 행동은 조금이라도 어렵게 만들면 도움이 된다.
어렵게 만들기
- 폰에서 영상과 소설 앱 삭제하기:
브라우저 앱으로 접속해서 볼지언정 앱보다 한 단계 더 거치는 번거로움을 추가한다.
- 시간 관리 앱 설치해서 폰 잠가버리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오후 일과시간, 잠자러 가기 전 몇 시간 동안 폰을 잠가둔다. 미리 지정해 둔 필수 앱 외에는 작동이 안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회하는 꼼수를 몇 가지 발견해서 쓸 때도 있었는데, 번거롭게 만드는 것 자체가 핵심이라 꽤 도움이 됐다.
- 폰은 최대한 손과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두기:
폰이 시야에 닿는 곳에만 있어도 집중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랩에서는 외투 주머니에 폰을 넣고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이 원칙은 특히 잘 때 중요하다. 폰을 아예 침실에 가지고 들어가지 않는 편이 좋다.
- 스마트폰 대신 노트북으로:
스마트폰에 이것저것 제약을 걸었더니 노트북을 이용해서 딴짓을 했는데, 화면이 비교적 크고 멀리 있으니 적어도 눈과 몸에 덜 나쁘고, 화장실이나 이곳저곳에 들고 다니기에도 번거로워서 좋았다.
쉽게 만들기
- 수첩은 손이 닿는 곳에 두기:
괴로움이 마구 올라올 때 스마트폰 보다 수첩이 가까이 있으면 좋다. 내 감정, 일기, 감사한 일, 마음이 다친 일, 작은 성취들, 낙서 등 뭐라도 좋다. 그래서 수첩은 손이 닿는 곳에 여러 권 두고 있다.
- 자전거 관리해 두기:
내 경우엔 자전거를 타면 기분 전환이 많이 되므로, 미리미리 기름칠도 해두고 타이어에 바람도 넣어두고 펑크가 나면 그때그때 고쳐 두려고 노력했다. 사실 나에게 자전거 관리는 그 자체로도 기분에 도움이 되는 활동이다.
- 냉장고 채워두기:
재료가 있어야 밥을 해 먹고, 밥을 먹어야 기분이 나아진다. 적어도 달걀, 두부, 양파, 쌀 정도는 늘 갖추고 있으려고 노력했다.
- 악기 등 손으로 조작할 것을 가까이 두기:
막막하고 불편한 기분이 들 때, 어차피 일을 안 한다면 스마트폰보다는 악기 연주를 하는 게 낫다. 하다 못해 쪼물락거릴 슬라임이라도 좋다. 손을 움직이다 보면 기분이 좀 풀린다. 나는 랩에 우쿨렐레를 가져다 뒀는데 잘 못 쳐도 밝고 귀여운 소리가 나는 악기라 특히 좋았다.
4. 기분이 살짝 나빠질 때를 잡아채서 추진력으로 삼기
조그만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사실 피곤한 일이다. 목과 어깨도 결리고 눈도 아프다. 그리고 마음 깊이 좋아하지는 않는 것에 시간을 쓰고 있는 것에도 가끔씩 짜증이 올라올 때가 있다. 왜 이딴 걸 찍었지 싶은 영상을 보면서 기분이 살짝 나빠질 때, 소설의 유치한 전개에 화딱지가 날 때, 이걸 몇 시간이나 들여다보고 있는 스스로가 좀 싫을 때.
이 불편함을 회피하려고 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이 악순환의 고리인데, 불편함을 예민하게 감지해서 추진력으로 삼는 연습을 해보자. 괜히 자책하지 말고 경쾌하게 가는 것이 중요하다.
불편함을 추진력으로, 예시
- 쓸데없는 영상 시청에 7시간이나 낭비해 버렸잖아! 아이고. 이제 꺼야지. 하나 둘 셋. 휴, 8시간이 아니라서 다행이지 뭐야.
- 이 소설 별로 마음에도 안 드는데 종일 읽다가 새벽 3시네. 에휴, 오늘도 시간을 낭비하고 말았군. 좋아, 신속하게 잔다. 4시에 자는 것보단 낫지. 잘 멈췄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지금이라도 멈추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삶이 언제나 그렇듯, 불편함을 감지한 시점에서도 시간은 미래로만 흐르지 않나.
5. 내 탓은 살짝만 하기
스마트폰에 빠진 스스로를 매우 치다 보면 마음이 불편해져서 더욱 중독에 빠지기 쉽다. 내 탓은 살짝만 하자. 내 생각엔 (그리고 여러 전문가들 의견엔) 스마트폰 의존은 그 자체가 근원적인 문제라기보다는 다른 문제의 증상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내 경우엔 상황이 어려웠기 때문에 불편한 마음을 피하려고 스마트폰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스마트폰에서 소비하는 콘텐츠 자체가 사람의 집중력을 빼앗게 되어 있다. 번쩍거리고 알록달록하고 신나는데 눈길을 빼앗기는 게 당연하다. 요즘 도파민 중독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개인적으론 대기업이 우리 시간을 빼앗아 돈을 버는 구조라고 생각하는데, 거기에 대한 면역이 없는 사람이 말려들어간 것을 너무 부끄럽게 여길 필요는 없다.
그러니 지나간 시간에 대해 내 탓은 적당히만 하고 씩씩하게 앞으로 걸어가면 된다.
아직 주화입마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서, 스마트폰 중독이 많이 개선된 것뿐이지 사실 하루하루가 막 알차지는 않다. 나는 또 새로운 유형의 수렁에 빠져 있다. 하지만 스마트폰 문제라도 이만큼 고친 게 어딘가? 조금씩 나아지는 방향이면 된다. (그나저나 며칠째 미루고 있는 이메일이 있는데 오늘 쓰고 자야겠다.)
어떻게 생각하면, 스마트폰에라도 의지해서 그 시간을 빠져나왔으면 된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운명론을 끌어와 변명해 본다. 어쩌면 나는 살아있으려면 그렇게 할 수 밖에는 없었던 게 아닐까? 그때는 그랬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