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줄곧 Feb 27. 2024

매일 랩에 가겠다

가서 아무것도 안 하더라도


졸업을 결정한 후 가장 중요했던 결심은 평일엔 매일 랩에 가겠다는 거였다.


랩에 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많았다. 재택근무를 해도 되는 환경이었고, 날씨가 매우 나쁜 날도 있었고, 랩에 가도 어차피 혼자인 날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타당해 보이는 이유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는 그래도 랩에 가는 편이 나았다. 랩에 가지 않는 것이 악순환의 시작일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악순환에 빠진 방식은 이런 식이었다. 일단 무기력할 때는 하루를 시작하기 어려웠다.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늦게 잠에 든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겨우 스스로를 일으키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만으로 금방 오전 시간이 지나갔다. 이렇게 된 거 점심 먹고 나가야지. 그렇게 미적거리다 보면 또 오후 시간도 훌쩍 가있곤 했다. 늦은 오후쯤 되면 생각했다. 이젠 학교에 가도 얼마 안 있으면 와야 할 텐데, 왕복하는 시간도 아낄 겸 오늘은 그냥 집에서 해야겠다. (혹은 앞에 이야기한 여러 이유를 든다. 날씨가 나쁘다거나, 어차피 랩에 아무도 없다거나.) 하지만 ‘이렇게 된 거 집에서 열심히 하겠다’는 결심과는 달리 일을 시작도 못 하는 날이 많았고, 시작한다 해도 별로 생산적이지 않았다. 밤이 되면 이런 식으로 하루를 낭비했다는 게 괴로웠는데 괴로운 마음을 회피하려고 여러 딴짓을 하기도 했다. 괴로워서 늦게까지 잠을 못 자고, 기분은 점점 더 나빠졌다.


나는 이 사슬을 끊기 위해 일단 무조건 랩에 가겠다고 결심했다. 다만 가서 일을 얼마나 하겠다는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일단 가는 것 자체가 목표였다. 출근을 하려면 일단 밖에 나가게 되니 기분이 환기되고, 자전거를 타면서 적당한 운동도 되었다. 자전거 타기 좋은 강변을 따라 출퇴근할 수 있었으니 기분 전환에 특히 좋았다. ‘출퇴근 시간도 아낄 겸 집에서 연구해야지’ 하면서 내가 ‘아낀’ 출퇴근 시간은 사실 정신 건강에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나는 적어도 이걸 생략하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랩에 일단 도착했다면 뭐라도 하고 집에 올 확률이 높았다. 집에 그냥 있는 것보다 확률이 더 높았을 수도 있다. 게다가 연구실 컴퓨터가 집에 있는 노트북보다 성능도 좋았고 모니터도 커다래서 일하기에도 훨씬 나았다. 그러니까 일단 랩에 간다. 그게 중요했다.


사슴 곁에 앉아 일을 한 날도 있었다.


랩에 도착하면 컴퓨터 시계를 스크린샷으로 찍어 저장했다. 일한 시간을 기록해 주는 타이머를 켜고 일을 시작했다. 퇴근할 때는 타이머에 기록된 시간과 시계를 함께 찍어 기록했다. 나중에는 스프레드 시트를 만들어 날마다 일한 시간을 채워 넣었다. 매일 써넣다 보니 하루 빼먹어서 빈칸이 생기면 무척 찝찝할 것 같았다. 찝찝함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계획을 지켜야 했다. 계획을 지키게 만드는 요소가 많아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더 나중에는 스프레드 시트에 기록한 일한 시간시간을 합산해서 한 시간당 1달러의 보상을 스스로에게 챙겨 주었다. 이 돈으로 무엇을 샀는지는 나중에 또 써볼 계획이다.


매일 일한 시간을 기록한 스프레드 시트. 매주 합산했다.


내가 사용한 타이머 프로그램은 창작 일을 하는 친구가 알려준 것인데, 내가 지정한 프로그램 3가지를 능동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시간만을 기록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지정하지 않은 프로그램을 사용하거나, 지정된 프로그램을 켰을 때도 10초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얄짤 없이 멈춰버린다. 정말로 일한 시간만을 기록해 주는 것이다.


나는 주로 문서 작성 프로그램, 데이터 분석 프로그램,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을 등록해 두었다. 인터넷 브라우저를 등록하면 딴짓을 할 확률이 높았기에 등록하지 않았다. 고민하는 시간, 노트에 무언가 쓰는 시간, 인터넷에서 참고 자료를 찾는 시간 등은 타이머에 합산되지 않았으니 실제 일한 시간은 타이머에 기록된 시간보다 꽤 길었을 것이다. 주변 친구들과 내가 써본 결과, 연구자가 이 타이머 기준 하루 2-3시간을 꾸준히 할 수 있다면 훌륭한 것이다. 내 기록은 졸업 직전 3달 정도 동안 평균 3.3시간 정도이다. 꾸준히 그만큼씩 아니고 편차가 컸다.

 

심사 논문 제출한 날 10시간 넘게 했다.


논문 제출 후 퇴근하던 밤.


타이머에 기록된 가장 긴 시간은 10시간 47분 46초. 심사용 논문 제출 직전이었다. 밤늦게서야 논문을 보내고 자전거를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텅 빈 도로 위에서 혼자 자전거를 달리니 외롭고도 충만했다.


그때 퇴근길에 찍은 사진이 남아 있는데 새까만 밤과 자전거 불빛이 강하게 대조된다. 밤 12시 58분이었다. 여름밤이어서 적당히 선선했다. 떠올리면 지금도 그때의 공기를 느낄 수 있는 기분이다.










그리고 가장 짧게 기록된 날의 기록은 37초. 그러니까 랩에 가는 것 자체가 목표이지 일할 시간은 목표로 두지 않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던 것이다. 이날은 기분이 너무 바닥이었기 때문에 저녁 늦게서야 간신히 랩에 갈 수 있었다. 보통은 일단 랩에 가서 컴퓨터까지 켰다면 조금이라도 뭔가 하고 올 수 있었는데, 이때는 컴퓨터를 켜고 앉았는데도 너무 힘들었다. 일하려고 프로그램을 켰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결국 그냥 집에 왔다.



지금 돌아보면 공백으로 남지 않은 이 37초가 참 소중하다.




어느 날씨 좋던 날의 자전거 퇴근길


이전 05화 힘세고 강한 조교 생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