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줄곧 Feb 20. 2024

힘세고 강한 조교 생활

연구는 별로 안 했다.

연구실을 옮겨야겠다고 결심한 후 학부 과목 조교 일을 알아보았다. 나는 원래는 연구실에서 연구비를 받아 등록금을 내고 생활비로도 쓰고 있었다. 이 연구비가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먹고 살 정도는 되었기에, 박사 과정 후반부에는 연구에 집중하고자 조교 일은 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연구실을 옮기면 연구비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새 지도교수님께서는 나를 받아 주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여러 부담을 지고 계신다고 생각했고, 연구비가 얼마가 되든 연구실을 이동하겠다는 결정은 어차피 확고했다. 그래서 얼마가 됐든 받아들일 결심을 했고 재정적 타격에 대비해 바로 조교 일을 신청했다. 다행히 학부 기초 프로그래밍 과목 조교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학부 기초 프로그래밍 실습 시간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조금씩 완화되기 시작하던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제한적으로 대면 수업이 열리기 시작했다. 내가 맡은 주요 업무는 학생들의 프로그래밍 실습을 도와주는 것이었는데, 정말 여러모로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 의외였던 것은 많은 학생들이 생각보다 컴퓨터와 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짐작건대 고등학생 기간에 코로나19 락다운으로 학업에 영향을 받은 것, 스마트폰 사용이 늘어 정작 컴퓨터를 사용할 기회는 적었던 것 등이 영향을 주었을 것 같다. 학생들 타자가 느린 것도 좀 의외였는데 이건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들은 것도 같다. 이 친구들은 게임하면서 정답게 부모님 안부를 묻지는 않은 모양이다.  




돌이켜보면 조교 일을 할 시간에 연구를 했더라면 대학원을 좀 더 일찍 탈출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되는데, 아마도 의미 없는 가정일 것이다. 그때는 정말 막막하고 무기력했기 때문이다. 조교 일을 안 했다고 해서 그 시간에 연구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적게나마 돈을 벌어서 좋았다. 우울한 상황이었지만, 돈도 없고 기분이 나쁜 것보다는 돈이 있고 기분이 나쁜 편이 훨씬 나았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오랜만에 유능한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앞서 쓴 적 있지만 연구에서는 보람을 자주 느끼기 어렵다.

수업에 가기 위해 집 밖으로 규칙적으로 나가게 된 것도 도움이 되었다. 심지어 수업 시간 사이에 운동도 했다. 

수업에 가면 그래도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 고립감이 완화되었다. 

학생들 질문을 받다 보니 재밌는 이야깃거리를 많이 획득했다.


일주일에 이틀, 오전과 오후에 두 번 수업에 들어갔다. 아침 수업이라서 억지로라도 일찍 일어나야 했다. 우울하다 보니 하루를 시작하기 어려웠기에 가는 길은 늘 좀 급했다. 게다가 오르막길이어서 제시간에 도착하려면 자전거를 매우 열심히 타야 했다. 잡생각 없이 페달을 열심히 밟았다. 다행히 딱히 표 나게 늦은 적은 없다. 아침 수업을 마치고 나면 2시간 정도 시간이 비었는데 이 시간에는 주로 학교 헬스장에서 근력 운동을 했다. 가장 부지런했을 때는 심지어 여기에 더해 수영을 30분 정도 한 후 샤워를 하고 오후 수업에 갔다. 그리고 조교 일을 하면서 바나나에 단백질 셰이크를 마셨다. 오후 수업을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돌아오면 보람차고 노곤했다. 건강한 체육인의 삶이었다. 연구는 별로 안 했다.  




이상한 이야기일지 모르겠는데, 글을 쓰다 보니까 아주 건강하고 씩씩하게 어려움을 이겨낸 이야기 같아서 좀 당황스럽다. 여전히 주화입마에 빠져 있어서 그런지, 나에게는 이 시기가 전체적으로 어둡게 기억되기 때문이다. 글에 쓰지 않은 많은 시간을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보냈던 것도 사실이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에 특히 그랬다. 학교에 갔을 때에도 이전 지도교수를 마주칠까 봐 자주 불안하고 무서웠다. 


그렇지만 이렇게 되짚어 보니 지난 시간이 늘 어두웠던 건 아니었다. 가끔씩,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충만하게 보낸 순간이 있었다. 짧은 반짝임 같은 것이었더라도. 


운동을 마치고 샤워하고 오후 수업에 가려면 시간이 좀 빠듯했는데, 발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오후 햇살이 참 좋다고 느낀 적이 많았다. 어쩌다 몇 분 여유가 생긴 날에는 밖에 앉아 햇볕을 쬐다 들어가기도 했다. 지금도 그 따스함과 밝은 빛을 거의 몸으로 느낄 듯이 떠올릴 수 있다. 


주화입마에 이 빛을 빼앗기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민들레가 가득 피었다 지곤 했다.


이전 04화 스스로를 산책시킬 책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