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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곧 Apr 09. 2024

방관자들을 헤아려 본다.

섭섭하지만 잘들 지내고 있기를.

부조리한 일을 겪고 연구실을 옮기면서 사람들이 무심하게 던지는 말들이 아플 때도 있었다. 특히 직접 당사자는 아니되 문제의 주변에는 있었던 사람들에게서 듣는 이야기들이 마음에 걸릴 때가 많았다. 


일을 하며 만난 사람들끼리는 일만 같이 하고 친구가 되려 하지 말라는 조언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연구실마다 다르겠지만) 연구실 동료끼리는 대체로 친구가 되는 편인데, 나도 그랬다. 다른 지역이나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인 연구실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서로를 의지하고 도와주며 타지 생활을 했기에, 집을 구하는 것, 이사, 인터넷 가입, 은행 계좌 개설, 학회, 운동, 여행 등 우리는 많은 것을 함께 했다. 주변 몇몇 교수님들과도 친구 같이 지내기도 했다. 


연구는 원래 외로운 길인데, 그래서 더욱 관심 분야와 사고방식이 어느 정도라도 겹치는 동료들이 귀했다. 좋은 연구 아이디어가 생각났을 때, 실험 장치 버튼을 눌러줄 사람이 필요할 때, 다른 연구자의 논문을 흉보고 싶을 때, 데이터를 종일 들여다보다 질려 커피 한 잔 마시며 걷고 싶을 때, 중간 발표나 최종 발표 같이 중요한 산을 넘을 때, 내 연구의 논리에서 중대한 오류를 발견해서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을 때. 서로를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었던 것은 연구실 동료들이었다.  


상황이 괜찮았을 때는 서로가 연구를 함께하는 동료이자 친구인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좋았다. 내가 연구실을 옮기게 되었을 때에야 연구실 인간관계는 비로소 그 다양한 면을 드러내게 되었다. 어떤 친구들은 여전히 든든한 지원자였는데, 어떤 친구들은 때로 방관자 같았고, 때로는 거의 2차 가해를 한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많이 힘들었을 때는 그게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저 좀 쓸쓸한 일인 것 같다. 




연구실 동료들의 대처에는 꽤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었다. 온전히 나를 생각해 준 고마운 친구도 있었으나, 내가 요청하지도 않은 조언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사람도 있었고 내 결정에 대해 속으로 가혹한 판단을 내리는 것 같은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 남들에게서 다 내가 원하는 말만 듣겠는가마는, 유독 마음에 남은 것은 두 유형이었다. 


친구 A:
그 사람이 잘못한 부분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연구실을 옮길 만큼의 문젠가? 연구실에서 너를 몇 년이나 지원했는데 그렇게 나가버리면 연구실 입장에서 손해잖아. 
 
그리고 아무리 그 사람이 잘못했더라도, D가 그 사람에 대해 남들에게 나쁘게 이야기한 것은 공정하지 않아. 

이 친구는 가해자 입장에는 공감하고, 피해자는 어떤 잘못할 여지도 없이 깨끗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럼 내가 겪은 일은 공정했다는 말이냐? 가해자를 위해 내가 무조건 입을 다물어야 하나? 지원받은 게 있으니 참으라는 건 또 무슨 논리란 말인가. 내가 부조리한 일을 겪을 때는 방관자였으면서 나에게서만 공정을 찾다니. 


게다가 누가 일부러 나쁜 소문을 낸 것도 아니다. 연구실에 관심이 있었던 외부인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이 연구실과 '그 사람'에 대해 물어왔을 때, 내게 일어난 일을 자세히 알고 있었던 다른 동료 D가 부정적인 대답을 한 적이 있었다. 친구 A는 나에게 와선 그 일을 비판한 것이다. 


남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전하지 않는 것이 일반론적으로는 권장되는 일이지만, 나는 그 원칙을 어기더라도 서로를 돕는 쪽이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특히 권력관계가 비정상적으로 쏠려 있는 대학원 같은 곳은 더욱. 


누가 나에게 옆 랩 교수님과 연구실 환경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 아는 대로 이야기해 줄 것이다. 옆 랩 교수님이 대학원생에게 재떨이를 던진 전적이 있다면 (하하, 그냥 예시다!) 이야기해 주겠다는 말이다. 그게 그 교수님에 대해 불공정한 일인가? 그렇든 아니든 나는 말해주겠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서로에게 그런 최소한의 경고, 도망치라는 말쯤은 간접적으로라도 해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부정적인 이야기는 옮기면 안 되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말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받은 게 있으니 견디라는 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일반론을 나에게 들이민 태도도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친구를 생각하면 가끔 심통이 나긴 하는데, 뭐, 행복하길 빈다. 

(그런데 쓰다 보니 A도 나에게 D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옮긴 게 아닌가? 흥미롭군.)



한편 가장 내 마음을 복잡하게 한건 친구 B였다. 

친구 B:
그 사람도 많이 반성하고 있고 너랑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하는 것 같더라. 아직도 너랑 같이 했던 연구를 정말 자랑스레 이야기하는걸. 

그 사람 원래 모난 구석이 있는 건 다들 알고 있었잖아. 그래도 연구자로서 능력은 훌륭한걸? 난 그 정도면 맞춰 가면서 같이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선한 의도의 중재라고 봐야 할까, 가해자의 편을 들어 내 판단을 흐리려고 한 걸로 봐야 할까? 정작 가해자 본인은 나에게 미래의 진로 어쩌고, 앞으로의 연구를 방해할 가능성이 어쩌고, 심란한 소리를 하며 최대한 제 몫을 지키려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나에게 생긴 일로 인해 모두가 가해자를 미워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가해자의 편을 들며 나를 설득할 필요는 없는 게 아닌가? 왜 내가, 반성도 사과도 들은 셈 치고 그 사람의 선한 의도를 미루어 짐작(혹은 망상)하여 용서해야 하나? 


그런데 나름대로 이 친구의 맥락을 헤아려보면 어렴풋이 이해가 갈 듯도 하다. B에게는 나와는 달리 배우자와 아이들이 있고, 커리어 궤적을 볼 때도 이 연구실이 친구에게는 '맞는 선택이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연구실이 마음에 안 든다고 쉽게 옮기거나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럴 때 사람이 스스로를 설득하게 되는 것은, 씁쓸하지만 자연스럽기도 하다. '그 사람이 모난 데는 있지만 연구는 잘하잖아. 그 사람 행동이 인간적으로 실망스럽지만 사실 진심은 아닐걸. 그러니까 그 사람은 맞춰줄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라는 말은 사실 내가 아니라 B 스스로를 설득하는 말이었을 지도. 


그렇더라도 그 설득을 나에게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것은 악함이 아니라 연약함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위한 설득을 남에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으나,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유형의 실수이긴 하지. 


(그런데 이 정도면 난 '미루어 짐작하여 용서하기'를 잘하는 편인 것 같은데. 아닌가?)




반대로 어려운 일이 생기고 나서야 누군가의 따뜻하고 강한 마음을 새삼 발견하기도 했다.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한 친구도 있었다. 


"연구실에 남을 우리 입장이나 연구실에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말고 너에게 필요한, 너를 위한 조치를 취해."




공교로운 일이 있다. 나에게 피해를 준 그 사람이 지금은 연구실에 또 다른 거대 재난을 몰고 와서 두어 명이 심각한 피해를 입게 생겼는데, 친구 B도 그중 하나다. B는 이제는 그 사람을 비호하는 말을 나에게 하지 않는다. 분노와 실망을 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자신의 상황을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대화 상대라서 좋다고 한다. 


나는 친구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안타깝게 여기지만, 솔직히 마음 깊이 한 구석에서는 '직접 당사자가 아닐 때는 다르게 생각하라며 나를 설득하려 들더니, 자기 문제가 되고서야 그를 가해자로 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친구가 그런 자신의 태도 변화를 인식하고 있기는 한지, 나에게 미안한지는 모르겠다. 나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으니 용서를 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내 나름대로 그들의 입장을 헤아려보았다는 것 정도이다. 헤아려 보았고, 언뜻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나는 이 경험을, 어려운 일을 계기로 주변 사람이 '걸러진 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사람을 너무 납작하게 보는 거지. A나 B와는 (꼭 이 사건 때문만이 아니라 졸업과 여러 사정이 겹쳐서) 예전만큼 자주 연락하진 않지만 그들이 평안하길 바란다. 


다소 씁쓸할 수 있는 생각이지만 우리가 맺고 사는 대부분의 인간관계에 이런 면이 있는 것 같다. 어떻게 모든 관계를 다 시험하며 살겠는가? 상황이 괜찮을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좋은 마음으로 만날 수 있지만, 상황이 나빠지면 각자의 사정과 입장에 따라 서로를 실망시키거나 상처 입힐 수도 있는 것이다. 같은 거리에 꾸역꾸역 버티고 서서 상처를 계속 받을 필요는 없지만 지나치게 미워할 필요도 없다. 나도 운이 좋아서 연구실에서 별 탈 없이 졸업했더라면 사람들에게서 이런저런 면을 볼 필요도, 심란해질 필요도 없었겠지. 


사람들과 좋은 마음으로 만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감사하게 여기고, 바뀐 상황 탓에 서로에게 실망하게 되는 때가 오더라도 너무 원망하지는 않으려 한다. 상황이 달라지면 언젠가 우리는 또 좋은 마음으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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