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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곧 Apr 16. 2024

가해자를 헤아려 본다.

오, 이거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이군

박사과정 고년차에 연구실을 옮기는 것은 일종의 재앙이었다. 정확히 말해 연구실을 옮긴 것 자체가 재앙이라기보다는 연구실을 옮겨야 할 만큼의 이상한 일을 겪은 것이 재앙의 핵심이지만, 아무튼 연구실 이동의 원인과 과정, 결과 모두가 나에겐 큰 타격이었다. 공부와 졸업, 진로에 영향이 간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관계 맺어온 방식에 대해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내 나름대로 여러 진실된 노력을 하고도 일이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무력감과 실망, 혼란이 더 심했다.  


지난 편에는 사건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에 관해 썼는데, 실은 원인을 제공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그동안 몇 번이나 썼다 지웠다. 주화입마가 덜 나았기 때문에 그 사람 생각을 하면 아직도 가끔은 단전이 꼬이는 느낌이 든다. 부질없는 걸 생각하고 곱씹어서 무얼 하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전에는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였다면 지금은 ‘으 싫어’ 정도로 바뀌었기 때문에 파편 같은 생각들이라도 한번 써보려고 한다.




사람에겐 다 여러 면이 있는 것이니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 하는 식으로 쉽게 분류할 수는 없지만, 많이 생략해서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사건의 가해자에 관한 이야기다. 연구실을 옮기면서 그 사람에게 여러 이상한 소리를 많이 들었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식의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야기를 듣던 당시에도 나는 ‘오, 이거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인데?’라고 생각했다. 상대가 나보다 지위와 권력이 높은 입장이었고, 문제의 원인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더더욱 못된 이야기들이다.  


너 이런 식으로 연구실 옮기면 나중에 면접 볼 때 이상해 보여. 이 뜬금없고 이유도 없는 이상한 행동을 남들한테 어떻게 설명할래? 네가 갑자기 연구실이 마음에 안 들어서 옮겼다고 할 거야?
(누구나 납득할 정도로 심각한 사유를 본인이 제공해 놓고, 연구실 이동을 나의 이유 없는 변덕이라고 하였다.)
네가 지금 얼마나 최악의 선택을 하고 있는 줄 알아? 이건 나에게도, 너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아. 하지만 내가 바로잡을 방법을 알려 줄게. + 말도 안 되는 타협안.
(관대하게도 바보 같은 선택을 한 나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나한테는 이게 도움이 된다’고 했으나 아니라고 한다. 나에게 도움이 된다고 내가 말하는데 부정하다니 흥미롭다.)
너 말고도 나랑 별로 사이 안 좋았던 사람들 많았어. 다들 그럭저럭 참고 졸업했고 지금은 나쁘지 않은 사이라고. 너도 그렇게 될 수 있는데 네가 망치고 있어.
(남들은 자신의 결점을 참아주었다는 것을 나도 참아야 할 근거로 대다니 놀랍다. 그들에게는 나만큼 명확한 사유와 증거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함께 연구할 수 있는 신뢰가 무너졌다고 했더니: 아니, 연구를 같이 하는 동료 사이에 신뢰는 필요 없어.
(그래서 ‘아니, 나는 같이 일하려면 신뢰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물론 말이 통하지 않았다.)
내 타협안을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너의 졸업과 학업을 방해하지 않겠다.
(마치 타협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방해하기라도 할 것처럼?)


나의 판단과 결정을 부정하며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상황을 몰아가려 하므로 아주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패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생각을 조종하려는 성향(manipulative)도 관찰된다.  




이 사람에게는 자신의 에고(ego)가 너무나 중요하고, 그게 연구와 아주 밀접하게 얽혀 있어서 동료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끼치든 상관없었던 게 아닐까 짐작해 본다. 내가 이런 연구를 했고, 내가 이런 논문을 냈고, 내가 이런 평가를 받고, 내가 이런 영향력이 있고, 내가 이런 평판을 가지고, 내가, 내가, 내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논문이나 발표에서 공동 연구에 대해 말할 때 문장의 주어는 우리(we)인 것을.




이해해보려고 하면 맥락을 상상해 볼 수는 있다. 개인의 역사를 생각할 때 이 사람에게는 과학자로서의 자신 밖에는 심적으로 붙잡고 있을 것이 별로 없었겠지. 지금껏 누구도 인간관계에 대해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지 않았겠지. 즉 이 사람의 행동도 악함이라기보다는 연약함인 면이 있겠지. 그러나 내 생각에 연약함은 – 특히 권력자의 연약함은 – 무책임이고 때로 악함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런데 마음이 아픈 은, 한때 이 사람을 연구자로, 선배 과학자로, 멘토로, 친구로 존경하고 신뢰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에 상응하는 존중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서로의 입장이 달라지고 이해관계가 부딪힐 때에야 비로소 그 존중의 전제 조건을 보게 된 것 같다. 자신의 에고(ego)가 승리한다고 느낄 때, 자신이 손해 보는 게 없을 때는 남에게 잘 대하기 쉽다.  


이 간극은 오랜 시간에 걸쳐 나에게 여러 감정으로 되돌아왔다.


부끄러움. 어째서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을 그렇게나 오래 믿고 의지했나.

후회. 왜 더 일찍 알아차리고 적당한 거리를 두지 못했나.

배신감. 내 신뢰와 진실된 노력을 이렇게 돌려주다니.

무력감.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구나.  

 



내가 이런 생각에 괴로워하고 있었을 때 학교 지원센터 직원이 나에게 해준 이야기가 있다.

원래 사람들 마음에 크게 타격을 주는 사람은 한때 가까웠던 사람들이야. 예를 들어 모르는 사람에게 폭행당한 사람보다 가정폭력 피해자가 받는 마음의 상처가 더 크지. 그런데 처음부터 때리는 사람과 가정을 이룰 사람이 어디 있겠어? 원래는 잘해주고 사랑하던 시간도 있었기 때문에 함께였던 거고, 그러니까 폭력의 심리적 아픔이 큰 거지. 네가 누군가를 좋은 마음으로 대했던 것이 잘못일 수는 없어.  


생각하면 여전히 괴로울 때도 있지만 이제는 괴로움의 진폭도, 지속 시간도 꽤 줄어들었다고 느낀다.


내가 겪은 고생을 생각하면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지만, 분명 나를 치고 지나갔던 감정의 이름을 하나 더 불러본다.


상실감. 한때 신뢰와 존중을 주고받는다고 믿었던 관계를, 그래서 마음이 충만하기도 했던 날들을 내가 잃어버렸음을 이제는 안다. 이것은 상대가 나에게 올바른 신뢰와 존중을 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어찌할 도리 없는 상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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