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험산모의 이른 출산과 제왕절개 이야기
너무나도 오래간만에 들어온 브런치다.
타자를 오랜만에 칠뿐더러 이렇게 활자를 나열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오랜만이라 감개무량하다. 출산 후 요즘 말도 버벅대고 단어도 생각이 안 나며, 어휘력이 상당히 안 좋아졌지만.. 용기를 내어 글을 써본다.
그사이 나는 출산을 했고, 조리원도 2주간 지낸 후 퇴소를 했으며, 내 아기는 신생아 졸업까지 했다.(!)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고, 나는 그 변화 속에서 정신 못 차리게 바빴고, 잠이 부족했으며, 여러모로 휘몰아치는 경험들을 했고 여전히 하고 있다.
임신 34주 4일 차에 쓴 마지막 글에서 나는 긴 고위험산모 입원 생활을 마치고 퇴원을 하게 되어 상당히 기뻤던 것 같다. 퇴원 후에는 오랜만에 우리 집 고양이들도 만나고, 안방 침대 위에서 과자를 먹으며 넷플릭스도 보고, 남편과 한 침대에서 자며 굉장히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딱 2박 3일 동안.
입원 기간 내내 배 위에 붙이고 있던, 조금이라도 아기의 태동에 변화가 있으면 알려주던 수축 감지기에 의존을 많이 했던 탓일까. 어떤 기기 없이 나 스스로 오롯이 아이의 태동을 느끼고, 나의 컨디션과 아기의 안녕을 가늠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었던 것인지 퇴원 이틀 만에 다소 줄어든 것 같은 태동에 신경이 많이 예민해져 있었다.
일을 하느라 바쁜 남편에게 나는 "아기의 태동이 줄어든 것 같아 한번 병원에서 검사를 해야 할 것 같아"라고 이야기했고, 남편은 급히 일을 마치고 함께 병원을 가주었다. 오랫동안 입원해 있다 다시 찾아간 병원 분만실에서 나는 수축검사와 더불어 초음파를 했고, 진료를 봐주시던 선생님은 아기는 잘 놀고 있으나 나의 경부가 붙어있는 게 없고 당장 분만을 해야 할 수도 있다며 다시 입원을 하라고 하셨다.
네? 이렇게나 빨리요?
여하간 나는 퇴원을 하고 자유의 맛을 본 지 만 이틀 만에 다시 속옷 따위 입지 못하고 누워있는 고위험산모 생활을 하게 되었다. 냉장고에는 내가 "퇴원만 해봐라 잔뜩 먹어야지"하고 주문을 해놓은 망고와 참외들이 주인을 잃은 채 머물고 있었다.
임신 초기에 막연하게 자연분만을 하고 싶었던 것과 달리, 임신 기간 동안 들은 여러 무서운 이야기들과 나의 건강등을 고려하여 제왕절개 수술을 하기로 결정한 나는 재입원 다음날 바로 수술을 하게 되었다.
30만 원을 주고 좋은 날을 택일받아놓았으나 거의 한 달 뒤쯤이라 맞출 수 없을뿐더러, 내가 찬밥 더운밥 가리며 병원에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 요청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하며 여러 무서운 "그럴 수도 있습니다"의 케이스들을 들으며 덤덤히 사인을 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임신과 출산을 하며 피하고 싶었던 내진도 겪었다. (내진은 의료진이 직접 손가락을 질 안으로 넣어 휘저으며 자궁입구가 얼마나 열렸는지 확인하는 절차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제왕절개수술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얼마 안 되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계좌 및 재산을 접속할 수 있는 경로, 비밀번호를 정리하고 나름의 재산 정리 유서(?)를 써서 가족들 간 어떻게 배분을 할지 써서 남편에게 전달을 해놓았었다. 사람일은 정말 모르는 것이니까. 남편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면인데, 나는 일을 할 때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여러 케이스에 있어 추후 다른 사람들이 곤란하지 않게 준비를 잘해놓는 편이다. 약간 인수인계에 집착하는 스타일이라고 할까나... 뭐 제왕절개 수술하다가 내가 죽기야 하겠어라 생각을 하면서도, 죽을 수도 있지 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아하하.. 나 너무 돌아이 같네.. 물론 내 유서를 보고 남편은 나의 재산이 얼마 없다고 비웃었다. 역시 돌아이 같은 사람 둘이서 잘 만났다.
시간이 되어 이동을 할 시간이 되었을 때 고위험산모 집중치료실에서 정이 들은 간호사 선생님이 나를 응원을 해주었고, 남편은 나에게 가벼운 입맞춤을 해주었다. 나는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수술대기실로 이동했고, 나란히 누워있는 환자들 사이에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 그러고 약속된 시간이 조금 지나 나는 나의 수술실로 이동을 했다. 스쳐지나가는 의료진과 수술실 모습들을 보며 나는 내가 <슬기로운 의사생활> 드라마의 출연진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수술실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불빛은 굉장히 환했다. 의료진들은 내 이름을 몇 번이나 확인했고, 나는 수술침대로 옮겨졌다. 소변줄은 꼭 하반신 마취 후에 꽂아달라는 나의 요청사항에 맞춰, 새우등을 하고 웅크린 채 척추에 하반신 마취 주사를 맞은 후 뜨겁고 묵직한 느낌이 올라온 후 하반신이 얼얼해졌을 때 소변줄을 꽂았다. 그리고 옷을 다 벗고 상당히 굴욕적인 자세로 누워있어야 했다. 수술보다는 이 마취와 준비 시간이 오래 걸린 것 같다. 내가 누워있는 자세를 보며 웃긴 감정이 무서운 감정을 이기는 순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담당 교수님이 들어와서 나에게 눈을 맞추고 "태나라씨 저 왔어요.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하셨다.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굉장히 큰 안도감을 주었고 수술은 순식간에 시작을 했다. 시작을 하고 십여분 정도 지났을까, 의료진분들이 내 배를 몇 번 누른 후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수술실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소아과 전문의 분이 아기를 확인하고 나에게 아기를 보여주러 오셨다. 오후 4시 11분에 태어난 나의 아기는 너무나도 작았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작아서 보고 너무 충격적이었고, 그 순간 두 눈에는 알 수 없는 눈물이 안도감과 행복감과 함께 차올랐다. 그때 감정은 정말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아기는 신생아실로 옮겨지기 위해 이동을 했고, 개복한 내 배를 꿰매는 남은 시간 동안 내가 조금 잘 수 있도록 수면제를 투여해 주었으나 나의 저혈압 때문 정량을 주사하지 못해 나는 잠에 들지 못하고 내 배가 꿰매지는 모든 소리를 라이브로 들어야 했다.
35주 2일 차에 2.84kg로 나온 나의 딸은, 주수와 몸무게를 생각했을 때 반반의 확률이던 NICU (신생아 집중치료실)로 결국 이동을 했다. (보통 이 주수에는 자가호흡이 가능한 아이들이 있고, 2.5kg 이상이면 안전한 몸무게로 본다)
수술실에서 병실로 돌아온 나를 보고 남편은 또다시 가볍게 이마에 입맞춤을 해주었으며, 나는 비몽사몽 한 상태에서 서서히 깨어나 개복을 한 고통을 오롯이 느끼며 하루를 꼬박 머리를 움직이지 않고 (머리를 들면 마취제 때문에 두통이 생길 수도 있다) 금수를 포함한 금식을 유지한 채 지냈다. 전에 없던 고통이었고, 단 1분도 잘 수 없었다. 밤새 내가 수술을 해서 잔뜩 긴장을 했던 남편이 긴장이 풀려 정신 못 차리고 코를 고는 모습을 보며 그저 웃플 뿐이었다.
2023년 5월,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