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고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읽고 있다.
연륜이 느껴지는 침착한 표현들. 마치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고이 접은 종이 위에 동그란 몽돌을 올려놓은 듯 마음을 지그시 누르는 것만 같다.
작가 나이 80세를 앞두고 쓴 글이지만 페이지를 넘길 적마다 함박웃음을 머금는 소녀가 읽힌다. 정원사 아저씨가 동네에서 본인 집 잔디를 가장 예쁘다고 칭찬을 해주면 경연대회라도 나갈 것처럼 성치 못한 무릎을 굽혀가며 풀을 고르는 소녀. 집에 온 손님이 창문 밖 풍경이 아름답다고 하면 잽싸게 다른 쪽 거실로 손님을 끌고 가서 이쪽도 멋지다고 자랑하는 소녀의 마음을 가진 사람.
스무 살에 겪은 6.25 전쟁 이야기가 나올 때면 잔뜩 겁을 먹은 소녀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 뚝, 흘리며 펜대를 놓지 않고 꾸욱 꾸욱 눌러가며 글을 쓰는 모습이 그려진다.
김훈 작가가 쓴 <남한산성>이라는 소설, 병자년 청나라에 나라를 잃은 민초들의 이야기를 읽고 작가는 한기에 둘러싸여 세 달이나 감기를 앓았다고 했다. 읽는 내내 추웠고 서러웠는데 실은 그 추위가 남한산성 소설 속 병자년의 추위가 아니라 경인년 1950년 (6.25가 나던 해)의 추위임을 작가는 고백한다.
중공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피난을 가는데 가장인 오빠가 총상을 맞은 이야기. 집안의 가장이던 오빠가 바퀴 없이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짐이 되고, 바퀴 달린 손수레를 구해 오빠를 끌어 나르던 피난길. 그러다 그것이 무악재 고개를 넘고 나서 바퀴가 빠져 내려앉았을 때. 차라리 잘 되었다며 혼자만이라도 재수 더럽게 없는 가족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는 이야기.
전쟁통에 겪은 무섭고 혹독한 추위, 그 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날짜별로도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게 간직하는 그녀의 몸과 마음. 그것이 작가 본인에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목>,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등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여럿 썼다.
마음과 몸을 강타하는 추위. 몸과 마음이 거절되는 기억들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누군가의 성장을 그 시점에 멈춰놓는다. 여전히 몸은 자라고 배워서 아는 것은 많아져도 추운 겨울, 나무의 나이테가 추위를 기억해서 그 틈이 좁아지듯 몸과 마음에 박힌 매서운 일들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요즘 자주 드는 생각이 있다. 나는 왜 불행을 쓰는지. 그런 불행한 시절을 딛고 일어서서 이 정도로 살게 됐으면 된 거 아니냐고. 굳이 그런 기억들을 꺼내는 것은 무슨 연유냐고. 미술관에 그림을 걸어놓듯 나의 고통을 걸어놓고 전시하는 것은 무슨 이유냐고. 내 자신에게 자주 물었다.
박완서 작가의 글 곳곳에 존재하는 불행 속에서 묘한 생명력을 본다. 불행 덕분에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까. 불행해서 볼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으니까. 불행 덕분에 비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답답함. 그 속에서 솟구치는 자기표현의 열망 같은 것들이 있으니까.
아파트 화단 앞에 엉거주춤 앉아 몇 분이고 개미들을 구경하는 아이들처럼 가만히 앉아 나의 불행을 쳐다본다.
어른들의 불행이 곧 나의 것이 되던 날들. 이유도 모른 채 부모를, 가족을,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어린 생명. 내 뜻과는 상관없이 어른들의 선택에 내맡긴 채 그 배에 올라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었던 시간. 재수 없는, 딱한, 불쌍한, 팔자가 사나운 것과 같은 수식어들이 붙었던 나의 시간들.
그렇지만 불행 덕분에 알게 된 것들. 불행 덕분에 보이는 것들. 불행했지만 불행하지만은 않았던 시간들이 있다. 그 시간들을 글로 쓰면서 당시의 모습을 그려내고 당시 묻어두었던 감정들을 꺼내어 그것들에 이름을 붙여주고 색을 입히고 냄새를 씌우면서 그때의 내가 되는 일. 나의 불행을 기억하고 쓰는 일.
더 지겨운 건 육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물 줄 모르고 도지는 내 안의 상처이다. 노구지만 그 안의 상처는 아직도 청춘이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p.20)
물론 그녀의 불행과 나의 것을 등가에 놓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전쟁을 겪으며 죽음을 목전에서 보고 들으며 죽음의 경험이 삶 전체를 지배하는 트라우마에 비하면 나의 시간은 보잘 것 없을 지도 모른다. 또한 박완서 작가가 겪은 전쟁을 어떤 문학 탄생의 이유나 창작의 도구로서만 보는 것도 아니다. 그녀가 고통을 쓰면서 느꼈던 해방감, 슬픔을 쓰며 본인의 슬픔을 녹이던 일들과 같은 것에 집중했을 뿐이다.
쓴다고 치유되는 것이 아닐지라도 불행을 껴안을 때 비로소 내 안에 불행이 숨 쉴 수 있음을 느낀다. 불행이 내뱉는 숨에 의지하여 써 내려갈 수 있는 시간과 글이 있다면 여전히 아프고 괴로울지라도 좋을 것이다. 불행은 숨이 되고 글이 되어 내쉬어지는 날들이 더 많이 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