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는 내 자신이 묵과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책을 읽다가 글감이 불현듯 떠올라 읽고 있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 그나마 여백이 있는 곳에 빼곡히 적었다. 두 아이가 잠들고 나면 조용히 거실로 나와 노트북을 켜고 메모장에 옮겨 적는다. 휘갈겨 쓴 글씨를 아무리 봐도 알아볼 수가 없어 고개를 글자 앞에 들이밀고 한참을 보았다. 그렇게 다 옮겨적고 나면 ‘그래서 이 글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질문이 나와 단둘이 남겨진다. 모든 것을 다 쓰고 나면 허무감이 드는 것이다. 특히 글의 끝맺음을 할 때면 난감하다. ‘그래서 이럽시다. 혹은 저럽시다.’라는 류의 교훈이나 통찰 또는 색다른 시각을 읽는 이에게 한 줄이라도 선사해줘야 할 것 같은데 도무지 그렇게 연결이 되지 않는다.
갑자기 떠오른 과거의 한 장면으로부터 비롯된 어떤 이야기. 십 년, 이십 년이 넘도록 아이의 몸을 거쳐 어른의 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이야기. 그러다 어떤 계기로(단순히 물을 먹거나 문장을 읽거나 대화하거나 하는 등) 그것이 꿈틀거려 나오길 원할 때 손에 펜을 쥐고 움직여 성실하게 남겼는데 거기에 결말을 내리고 의미까지 부여하자니 가능한 일인가 싶다. 결말을 맺기 위해 태어난 문장들이 아닌 걸까. 태생이 그렇지 못한 이야기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마무리를 하지 못하는 능력의 문제인지 헷갈린다.
그렇게 써놓고 어딘가에 올리지 못한 일기 같은 글이 대여섯 개쯤 쌓였을 때 아니 에르노의 책을 펼쳤다. 내 글의 존재 이유를 누군가에게 기대서라도 찾고 싶은 것이다.
“내면적인 것은 여전히, 그리고 항상 사회적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순수한 자아에 타인들, 법,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아니 에르노
지극히 개인적인 일을 쓰는 나의 글 속에서 내가 묘사하는 나의 자아에 많은 것들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었다. 사회적인 부분, 그 시대의 생각과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흔적이 내 안에 남아있고 내가 쓴 글이 그것들을 포함한다는 것. 아니 에르노의 책을 펼친 것은 내가 글쓰기를 계속해야 할 이유를 찾으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녀의 글 속에서 묘사한 본인, 어머니, 아버지는 그 시대, 특정 계층으로 확장되고 다시 개인에게 어떤 특정한 의미로 다시 좁혀지는 과정이 담긴 문장들을 찾았다. 그 역시 본인의 글쓰기에 대한 의미를 찾으려는 흔적이 보였다. 그런 시도가 보이는 문장을 만날 때면, 문장과 그 문장이 조금이라도 포함된 문단 전체를 옮겨 적었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글을 계속 써나가겠다.”
- 아니 에르노, <한 여자, p17>
“또 내가 붙들고 싶은 여자는 나와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존재했던 여자, 노르망디의 소도시 촌구석에서 태어나 파리 외곽 지역 병원에서 운영하는 노인병 전문 의료센터에서 죽음을 맞이한 실제의 그 여자이기도 하다. 보다 정확히는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은 가족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접점에, 신화와 역사의 접점에 위치하리라.”
- 아니 에르노, <한 여자, p19>
나는 어머니의 폭력, 애정 과잉, 꾸지람을 성격의 개인적 특색으로 보지 않고 어머니의 개인사, 사회적 신분과 연결해 보려고 한다. 그러한 글쓰기 방식은 내 보기에 진실을 향해 다가서는 것이며, 보다 일반적인 의미의 발견을 통해 개인적 기억의 고독과 어둠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돕는 것이다.
- 아니 에르노, <한 여자, p52>
나의 글이 어릴 적 트라우마나 상처로만 해석되어 딱하다거나 불쌍한 아이라고 해석되는 것을 거부하고 싶고(이것은 사실 독자의 영역인데도 불구하고) 그래서 나의 글이 나를 향한 위로만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모두가 잠든 밤 나를 일으켜 세워 쓰게 한다.
엄마를 갈구하는 나의 모습. 늘 불안한 눈빛으로 본인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던 엄마의 모습. 사회가 묘사하고 말하는 모습과는 달랐던 내가 속한 가족의 모습. 그 속에 실제로 존재했던 두려움, 당혹감, 우울감, 억울함들이 내 내면을 벗어나 다른 이의 것으로 확장될 수 있을지 생각한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도 여전히 결말을 내리는 글쓰기의 역량이 부족한 것인지 사고의 깊이를 늘리는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 혹은 내가 쓰는 이 글을 온전히 신뢰하고 묵묵히 쓸 수 있는 만큼 써 내려가는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 헷갈린다. 실은 모두 다 내게 필요한 것들이기도 하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내게 있어 차고 넘치는 것 같으나 동시에 언제나 모자라고 빈약하다. 하지만 “내 안에는 세상이 묵과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라는 클로델의 문장 속 ‘세상’이라는 단어를 ‘나’로 고쳐 이야기해본다.
그렇다. 나는 믿는다. 내가 아무 이유 없이 세상에 온 것은 아니라는 걸.
그리고 내 안에는 내 자신이 묵과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