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딛고 선 시간들

아이의 가방을 정리하며

by 한시영

네모 모양의 짙은 회색빛 아이 가방을 열어보니 종이가 한 뭉치나 들어있다. 하나하나 꺼내보니 어린이집에서 정성스럽게 만든 것들이다. 차곡차곡 너다섯장은 되보인다. 엄지와 검지, 중지에 꼬옥 힘을 준 채 썼을 진한 연필자국들이 가득하다. 그럴 때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내 엄지를 중지의 손톱 옆부분으로 가져가서 연필을 잡느라 새겨진 굳은 살을 만져본다.

A4 용지에 작은 구름 하나 그리고, 그 밑에 양갈래 머리를 한 여자아이 그림이 그러져있다. 여자아이의 머리 부분에 지우개 자국과 다시 고쳐 그린 자국, 지우긴 했어도 연하게 남아있는 연필자국을 보니, 머리 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아 여러 번 고쳤나보다. 아이의 마음과 시간, 연필 잡은 손의 귀여운 악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종이를 버리기 아까워 귀퉁이에 간단한 느낌을 적었다.

“너의 사랑스러운 그림을 보면서 이 그림 속에 담긴 너의 예쁜 마음과 만났어. 예쁜 너의 마음이 너무 반가워서 한참을 이야기 나눴지 뭐야. 엄마에게도 너처럼 예쁜 마음이 있으면 좋겠어.” 엄마가.

내게 있는 따뜻함을 전부 담아 아이의 시간을 바라본다. 동시에 나 역시 나의 어린 시절을 따뜻하게 바라봐 준 누군가가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 따스한 시선에 볕을 쬔 시간들. 그 볕에 마음을 녹이고 손을 녹이고 몸을 녹였겠지. 어린 시절의 시간들이 모두 다 불행했던 건 아니었을텐데 돌아보면 왜이리 상처입고 아팠던 기억만 나는지. 나는 왜 이렇게 아픈 어린시절을 가진건지 억울할 때도 있고, 안타까울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내게 상처뿐만이 아닌 사랑과 따스함을 준 부모에게 미안한 감정이 든다. 그런데 이렇게 아이를 향한 내 따뜻한 시선을 마주할 때면 그제서야 떠오른다. 나 역시 그 시간들을 딛고 자란 사람이라는 걸. 아이를 바라보는 내 시선으로, 나의 어린시절을 바라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서 어린 나보다 키가 한참이나 컸을, 따뜻하게 나를 바라봤을 누군가를 떠올린다.

하나둘 딛고 비로소 자라 서른 둘의 어른은 그냥 된 것이 아니라는 걸 기억하며.

keyword
이전 18화시간과 몸에 새겨진 그녀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