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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Love and. 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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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현 Dec 29. 2016

베를린 크리스마스 테러 현장

미움을 이겨내는 베를리너의 방법


그날은 흐렸다

크리스마스 휴가로 홀로 베를린을 찾았지만, 비가 올 것 같은 날이라 외출이 꺼려졌다.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여행자가 여행을 하지 않는 것은 업무 태만과도 같기에 길을 나섰다. 계획도 없이 온 베를린, 기대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번 베를린을 통해 베를리너가 추억하고 기억하는 그들만의 방법에 매료되었다. 즐겁자고 찾아왔지만, 어째 이번 여행은 조금은 슬펐지만 잔잔한 따뜻함을 느낀 여행이었다.


베를린 TV타워가 바라보인다


테러와 여행

베를린으로 떠난다는 말에, 친구가 말했다.

"넌 꼭 테러 일어난 곳만 가는 거 같아."

지난여름에 프랑스를 방문하기 전 테러가 있었고, 베를린 오기 딱 이틀 전(12월 19일)에도 테러가 있었다. 유럽은 지금 난민, 이민자, 종교 갈등, 테러 등으로 갈등을 겪고 있다.

"꼭 가야 되겠니?"라는 친구의 걱정에, "테러가 일어난 직후라 더 안전할지도 몰라."라고 무감각하게 대답했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테러, 그건 나에게 그렇게 와 닿는 단어가 아니었다. 위협적이지도 않았고, 슬픔이나 걱정거리도 아니었다. 테러라는 걸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어서 그럴까? 아님 만성적인 북한의 위협에서 살아온 한국인이라서 그럴까? 테러, 그건 먼 나라의 이야기로만 들렸다.




다시 흐렸던

그 날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 날은 그저 산책이나 하고 커피나 마시고 싶은 날이었다. 아침부터 뭘 하면 좋을지 고민을 했지만, 뭔가 떠오르지 않아 그냥 산책이나 가자고 해서 나선 참이었다. 그러다 2차 대전 때 폭격으로 인해 지붕이 부서진 교회(카이빌헬름)가 생각나, 그쪽으로 향해 걸었다. 멀리서 그 건물이 보였다. 생각보다 아름다웠다. 전쟁으로 파괴된 흔적을 보존하고 있는 그들만의 기억하는 방식에 매료되기에 충분했다.


2차 대전 당시 지붕이 무너진 카이빌헬름 교회



사실, 베를린 곳곳은 역사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베를린 장벽, 유대인 학살 사건에 대한 반성의 기록, 일반 시민들의 낙서인 듯 예술인듯한 그라피티로 가득 채운 벽들까지,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시 같았다. 그것이 베를린의 독특한 매력이기도 했다.


베를린 장벽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기억의 창>


그곳이

테러 현장인 줄 몰랐다

카이빌헬름 교회 건물을 바라보며 걸었다. 주변은 많은 상점들, 그리고 알록달록한 장식으로 꾸며진 크리스마스 마켓이 임시 건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길바닥에 누군가 수많은 양초와 꽃을 둔 곳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이곳이 트럭 테러가 있었던 곳임을 알았다. 지난 12월 19일 베를린 크리스마스 마켓을 덮친 트럭의 테러(ISIS의 소행으로 추정)로 12명이 아까운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크리스마스 마켓 테러의 현장(사진 출처: 뉴욕타임즈)


미움을 이겨내는 자세

순간, 뭔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내 여행에 슬픔의 기운이 물들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꽤 오래 머물렀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그들의 슬픔 속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한 동안 멍하게 그곳에 있었다, 낙서와 같은 메모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놀라운 점이 있었다. 적어도 이런 테러가 발생한 것에 대한 증오, 혹은 난민에 대한, 이슬람 세력에 대한 증오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런 말이 없었다. 증오보다는 평화, 단합, 위기를 이겨내자는 메시지가 많았다.



증오보다는
평화, 단합을 강조하는 베를리너


그들은 가슴 아픈 일을 당해도 미움 없이 추모할 줄 알았다. 경건하게, 조용히 흐느끼며 원망을 표출하기보다는 증오를 사랑과 평화로 이겨내자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베를리너가

테러에 대처하는 자세

늙은 노부부가 조용히 다가와 추모곡을 불렀다. 알 수 없는 언어로 잔잔한 곡을 부른 후 그들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 박수도 없었고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그저 간단하고 평화스러운 추모곡이었다.


누군가 다가와 이미 수없이 많아진 양초에 또 다른 양초와 꽃을 두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그저 현장을 머물다 사라졌다.


누군가 다가와 흐느끼며 울었다. 누구는 소리를 내고, 누구는 그저 흐르는 눈물을 조용히 닦아내고 있었다.


누군가 다가와 비와 바람에 꺼진 양초를 꼼꼼히 들어 불을 다시 붙이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한참을 공들여 꺼진 양초에 빛을 다시 살려내고 있었다.


누군가 다가왔다. 중동인으로 보였다. 그는 독일인에게 양팔을 벌려 자신은 이 테러를 안타깝게 여기며 당신이 우리를 포용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많은 독일인이 그를 포용하며 미움보다는 포용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누군가 다가왔다. 그리고 잠시 머물러 추모의 마음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렇게 그들은 미움을 이겨낸 추모로 테러의 현장을 지켜내고 있었다.  



미워하기보다는
추모하고 강해지기를 바라는 베를리너를
크리스마스 테러 현장에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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