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병진 Oct 28. 2020

아나운서와 연쇄살인마

아나운서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계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

아나운서를 꿈꾼 계기가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을 곧잘 받는다. 그럼 나는 ‘살인 택시기사 온보현’을 언급한다.


온보현은 1994년 6명의 여성을 납치해 2명을 살해한 광란의 살인마다. 그는 택시를 훔쳐 타고 다니며 범행을 저질렀고 자신을 잡지 못하는 경찰을 조롱하며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쯤되면 아나운서를 꿈꿨다면서 왜 이런 끔찍한 괴수를 언급하냐고 묻기 마련이다. 온보현이 자수를 했는데, 그 경위가 공교롭게도 아나운서와 관련 깊기 때문이다.


살인이고 나발이고 모든 게 헛헛해졌던 걸까.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의 ‘한국의 연쇄살인’이라는 책을 보면 온보현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자살하기 위해 올림픽대로를 달리던 중이었다. 그런데 무심하게 틀어져 있던 라디오 정시 뉴스에서 자신의 수배를 알리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듣는다. 온은 그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 심경에 변화를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자살이 아닌 자수를 결심한다.


운전대를 돌려 램프로 빠진 온은 당시 지존파를 검거한 서초경찰서를 찾아갔다. ‘지존파와 동급의 대접을 받기 위해서’였다나 뭐라나.


여튼 내 눈에 꽂힌 건 그 정시 라디오 뉴스였고, 그 뉴스를 진행한 아나운서였다. 아나운서 목소리가 어땠기에 연쇄살인범의 마음까지 동요시킨 걸까. 이 호기심이 아나운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실제 아나운서가 되고 난 뒤에도 '연쇄살인범의 마음을 흔든 아나운서의 음성'은 줄곧 내 화두였다.


라디오 뉴스는 텔레비전 뉴스와 다르다. 호흡과 발성에 차이가 난다. 텔레비전이 ‘쭉쭉 질러주는 발성’이라면 라디오는 잠수함처럼 ‘주욱주욱 밀어주는 발성’이다. 호흡을 더 머금되 힘은 쭉 빼고, 명료하고 또렷한 발음으로 뉴스를 처리해야 한다. 청취자가 오롯이 목소리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아나운서는 이런 테크닉에 영혼을 불어넣어야 한다. 기사 내용에 따라 아나운서도 희로애락을 아나운싱에 담아내기 마련이다. 기사의 주제에 맞게, 사안의 중함을 따져, 국민의 정서를 파고드는 뉘앙스를 찾아내야 한다. 사람을 잘 알아야 하고, 그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기사 속 주제와 소재에 관한 디테일한 공부는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이를 바탕으로 강조할 부분과 이완할 문장을 나눠 어떻게 하면 듣는 사람이 기사의 핵심을 잘 접수할 수 있을지 연구하는 게 아나운서의 직무다.


연쇄살인범의 마음을 움직인  아나운서는 누구였을까. 당시 정시 라디오뉴스라 하면 KBS 내지 MBC 라디오였을텐데. 부러 추적해본 적은 없지만 언제   ‘발동 걸리면   찾아보고 싶다.


목소리 만으로도 차가운 세상의 온도를 살짝 올려줄 수 있다는 점을 알려준 분이니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