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간 익힌 노하우 대공개
'대학교 방송국 활동하지 마라' 이런 이야기, 아나운서 지망생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상한 '조'가 생겨서 현직 면접관들이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건데요. 어느 정도 타당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조'가 생긴 후배들은 입사 후 교육을 시키더라도 '조'가 잘 없어지지 않아 고치는 데 애를 먹거든요. '조'는 일컬을 때도 [쪼]라고 된소리 발음하는데, 말투에 달라붙은 쫀득쫀득한 껌딱지 같은 느낌이 듭니다.
여담이지만 아나운서나 앵커들의 오디오에 가장 민감한 사람은 기술 감독들입니다. 오디오 감독이나 TD는 너나 할 것 없이 대부분 '조'를 굉장히 싫어합니다. 너무 작위적인 소리로 들린다거나, '노련한 척'하는 것 같아 싫다고 하더라고요.
더구나 '조'는 기사의 의미마저 퇴색시킵니다. 아나운서가 전달하는 기사 속 주요 정보가 강조되지 않고 '조'가 나타나는 지점만 도드라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선 기사 내용은 안 들리고 아나운서의 특이한 어투만 기억에 남습니다.
처방 내리기 전 '지피지기'
그렇다면 이 '조'는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요. 처방을 내리려면 진단부터 해야 합니다. 우선 '조'의 정체부터 알아볼까요? 아나운서들이 주로 참고하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조'를 검색해보면 이런 결과가 나옵니다.
「명사」
1) 품격을 높고 깨끗하게 가지려는 행동.
2) 『음악』음을 정리하고 질서 있게 하는 근본이 되는 조직. 조성(調性)이 구체적,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상태를 이르는 것으로 장조, 단조 따위가 있다.
예) 조가 틀리다 / 황은 대꾸 없이 고개를 젓고 조를 바꾸어 후반부로 연주해 들어갔다.≪박영한, 머나먼 송바강≫
「의존명사」
1) (주로 '-는 조로' 구성으로 쓰여) '말투'나 '태도' 따위의 뜻을 나타내는 말.
예) 비꼬는 조로 이야기하다 / 당숙이 모인 사람들을 향해 윽박지르는 조로 나왔다.≪전상국, 하늘 아래 그 자리≫ / 국군 병사는 오히려 인민군 병사에게 반문하는 조로 중얼거렸다.≪선우휘, 단독 강화≫
2) 시가나 노래의 음수(音數)에 의한 리듬을 나타내는 단위.
아나운싱에서 나타나는 '조'의 의미를 사전에서 골라보면 '명사-2'나 '의존명사-1'에 가깝습니다. 말하자면 '특이한 억양과 강세의 조합'이랄까요. 억양은 영어로 인토네이션(intonation), 강세는 액센트(accent)입니다.
뉴스를 전달하는 아나운싱을 노래에 비유해보죠. 노래의 '음정 변화'는 억양에, '셈여림'은 강세에 해당합니다. 억양과 강세가 표준어 스타일이 아닌 상태로 구사되면 '조'가 나타납니다. 조는 습관입니다. 어투입니다. 개인 특징입니다. 스타일입니다.
조가 두드러지는 지점
조는 말 할 때 다양한 지점에서 나타납니다. 논의를 편하게 하기 위해 화자를 아나운서 지망생으로 좁혀보죠. 이들에게 조는 보통 '조사'와 '어미'를 처리할 때 도드라집니다. 먼저 조사에 나타나는 조부터 살펴봅니다.
주격 체언(명사, 대명사, 수사)에 쓰이는 '-은, -는, -이, -가, -도, -라면' 같은 주격 조사나 '-을, -를' 따위의 목적어에 붙이는 목적격 조사가 대체로 조의 희생양이 됩니다. 조가 있는 사람은 이 조사들을 강하게 찍어 누르듯 발음하거나 억양을 위로 살짝 올려서 소리를 내곤 하는데요.
국내 연구진'이' 고분자'를' 이용해 다공성 무기질 소재'를' 정교하게 설계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화자가 끊어읽기를 막 시작한 수준이라면 주어와 목적어를 명확하게 전달하려는 심리 때문에 조사의 셈여림을 '강'으로 줘 조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위 예시 문장을 보면 작은 따옴표 친 조사마다 강하게 소리내면서 툭툭 끊어 읽는 식입니다.
또한 문장이 끊어지는 느낌을 주지 않으려다가 조사마다 억양을 끌어올리는 사람도 많은데요. 어린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줄 때 이런 리딩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문장 중간 중간 끊어읽을 때마다 말 끝음을 살짝 살짝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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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가 나타나는 지점에서의 억양을 화살표로 표시해봤는데요. 화살표 표시가 대각선으로 곧게 뻗은 것 밖에 없어서 저렇게 표기했지만 실제로는 완만한 타원형의 화살표 느낌으로 음이 올리가며 조가 나타납니다.
또한 조사의 음을 올리지 않되 '길게 끄는 조'도 문제입니다. 조사마다 소리를 길게 빼면 문장이 끊어지는 느낌이 덜 들면서도 다음 글자를 미리 볼 수 있는 시간을 벌충할 수 있습니다. '길게 끄는 조'가 나타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이는 별 의미 없는 품사인 조사를 불필요하게 강조하는 꼴입니다. 지양 포인트죠. 조사도 그렇고 모든 아나운싱에서 말이 '늘어진다'는 건 '퇴보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조는 어미에도 나타나요
조가 어미에 나타는 경우는 주로 '-습니다'를 발음할 때입니다. 어미 중에서도 유독 글자 '다'를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나는데요. '다'의 셈여림을 강하게 주거나 '다-' 이렇게 소리를 길게 빼며 어미를 끝맺음하는 식입니다. 이렇게 발음하면 왠지 노련해보인다거나 '현직 아나운서 발음 같다'고 착각하는 지망생이 부지기수입니다. 어디까지나 초심자의 착각입니다. 주로 대학교 방송국 출신들에게서 이 '어미 조'가 두드러지는데요.
오히려 담백하고 군더더기 없는 발음이야말로 프로에게 필요한 정직하고 노련한 발음이라는 점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실제 뉴스를 처리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정보가 담긴 체언(명사, 대명사, 수사)이나 용언(동사)의 어간을 강조하느라 조사·어미는 신경조차 쓰지 않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숙련된 앵커나 아나운서가 됐을 경우 조사를 활용해 부분적으로 맥락을 살리기도 하죠. 하지만 아나운서 지망생 단계의 수험자가 조사나 어미를 길게 빼고 강조하는 '조'를 드러내면 기사를 접하는 면접관, 나아가 시·청취자를 거슬리게 만들 뿐입니다.
조가 문장 전체에서 나오면 '사투리'
사투리 교정을 위해 스피치 레슨을 받거나 학원을 찾는 일반인도 적지 않은데요. 앞서 설명드린 '조'의 원리가 문장 전반에 다 나타나면 사투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뭐라켔샀노!"에서 느껴지는 경상도의 억양과 강세, "아유, 왜 자꾸 그러는지 증말 나 환장하겄어~"처럼 어미에서 도드라지는 충청도 특유의 말투를 떠올리시면 이해가 편합니다.
조와 사투리가 나타나는 원리를 살펴봤는데요. 이 친구들을 떼어내고 다듬어 '교양 있는 서울 말씨'를 구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은 있습니다.
평탄화 작업을 합니다
군더더기가 생겨버린 말투를 싹 뜯어 고쳐보죠.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은 '평탄화 작업'입니다. 문장을 한 음으로 균일하게 쭉쭉 펴바르듯 읽습니다. 마치 로봇처럼요. 컴퓨터에 글자를 입력하면 음성이 나오는 프로그램처럼 무미건조하게 문장을 읽습니다. 반복은 필수입니다. 예문을 하나 드릴게요.
무경은 좌절의 절망을 두 번 경험했다. 일곱 살 때 어떤 사내아이를 좋아했다. 이 일에 대해선 아직까지 아무에게도 얘기한 적이 없다.
-오학영, <심연의 다리> 中 일부 내용 개작-
'무경은~'부터 '~없다'까지 문장을 무미건조하게 읽습니다. 음정의 높낮이는 변하지 않습니다. 문장을 쭉 읽고 중간에 쉬지 않습니다. 즉, 한 문장을 끊지 않고 쭉 낭독하는 건데요. 다음 예문과 같은 느낌으로 읽습니다.
무경은좌절의절망을두번경험했다. / 일곱살때어떤사내아이를좋아했다. / 이일에대해선아직까지아무에게도얘기한적이없다.
-오학영, <심연의 다리> 中 일부 내용 개작-
다음 모듈은 의미 단위로 끊어 읽기입니다.
무경은 / 좌절의절망을 / 두번경험했다. / 일곱살때 / 어떤사내아이를 / 좋아했다. / 이일에대해선 / 아직까지아무에게도 / 얘기한적이없다.
-오학영, <심연의 다리> 中 일부 내용 개작-
이번엔 글자 하나하나를 다 떼어 읽습니다. 그동안 구사해온 나만의 어투를 완전히 분해한다고 생각하며 읽어볼까요?
무 / 경 / 은 / 좌 / 절 / 의 / 절 / 망 / 을 / 두 / 번 / 경 / 험 / 했 / 다. / 일 / 곱 / 살 / 때 / 어 / 떤 / 사 / 내 / 아 / 이 / 를 / 좋 / 아 / 했 / 다. / 이 / 일 / 에 / 대 / 해 / 선 / 아 / 직 / 까 / 지 / 아 / 무 / 에 / 게 / 도 / 얘 / 기 / 한 / 적 / 이 / 없 / 다.
-오학영, <심연의 다리> 中 일부 내용 개작-
각각의 모듈을 20회씩 반복합니다. 특히 한 문장 쭉 읽기와 한 글자씩 낭독하기는 30회 이상 반복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일주일 동안 하루에 1시간 투자하면 어지간한 조와 사투리 물이 빠집니다.
일주일 정도 '물 빼기' 작업을 마쳤다면 그 다음에는 같은 단위로 붙여 읽습니다. 위에서 알려드린 방법을 역으로 적용하면 됩니다.
한 음으로 쭉 읽기
잘라 읽기(문장 단위 → 의미 단위 → 글자 단위)
붙여 읽기(글자 단위 → 의미 단위 → 문장 단위)
평탄화 작업을 할 때 뉴스 원고를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데요. 사투리까지 교정하고자 하는 분들은 문학 작품이나 책 <103개의 모노로그> 같은 희곡 모음집을 사서 연극 대사로 연습하시면 훨씬 효과가 좋습니다.
덧붙여 중요한 건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해 들으셔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야 들립니다. 기초적 뉴스 리딩에 어울리지 않는 나만의 조를 스스로 느껴야 고칠 수 있습니다. 본인이 구사하는 조가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들리지 않으면 조를 고치기도 어렵습니다.
평조를 덧입히다
평탄화 작업을 2주에 걸쳐 탄탄하게 완료하셨다면 '평조'를 익혀 자연스러운 어투를 새로 만듭니다. 평조는 말 그대로 '평이한 조', '억양이 평탄한 조' 정도로 이해하시면 좋습니다. 평조는 '균일한 억양'과 '조사·어미 처리 시 자연스러운 하강 억양'이 특징입니다.
국내 연구진이↘ 고분자를 이용해 다공성 무기질 소재를 정교하게 설계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이 정도 문장은 주어부인 '연구진이'에서 반호흡 끊어준 후 '개발했습니다'까지 한 호흡으로 가야 합니다. 화살표로 표시한 부분에서만 자연스럽고 완만한 곡선이 그려지듯 억양을 내려줍니다. 중간에 끊기에 애매한 문장입니다.
띄어읽기를 문장 중간에 하더라도 그 구간에서 조가 나타나선 안 되겠습니다. '고분자를 이용해'에서 반의 반 호흡 정도로 살짝 끊었다가 '다공성~' 구간으로 넘어가는 아나운싱도 가능은 한데요. '고분자를 이용해'를 끝맺을 때 강조점이 찍히거나 억양 변화가 생기면 안 됩니다.
그냥 '~이 / 용 / 해 / (반의 반 호흡) / 다 / 공 / 성~' 이런 식으로 처리하고, 각 글자들을 오밀조밀하게 붙여 말한다고 생각하면 틀리지 않습니다. 하강조든 상승조든 불필요한 구간에 나타나선 안 되겠습니다.
조사보다 체언, 어미보단 어간
체언에 주요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명사나 대명사, 수사가 핵심이고 조사는 '보조' 역할입니다. 용언에서는 어미보다는 어간에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이 점을 명심한다면 굳이 보조적 역할에 지나지 않는 조사와 어미를 강조할 일이 없어집니다. 참고로 용언(동사, 형용사)의 변하지 않는 앞 부분이 '어간'이고 뒤에 변하는 부분은 '어미'입니다.
국내 연구진이↘ 고분자를 이용해 다공성 무기질 소재를 정교하게 설계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이 문장에서 조사와 어미를 제거해도 의미는 전달됩니다. 체언과 어간에 뉴스가 담겼기 때문입니다.
국내 연구진 고분자 이용 다공성 무기질 소재 정교 설계 기술 개발
매끄럽게 읽히진 않지만 의미를 전달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습니다. 역으로 조사나 어미만 남아 있다면 과연 의미가 조금이나마 전달될까요? 여러분이 체언과 어간을 다 지우고 조사와 어미만 따로 써 보세요. 뭔 말인가 싶을 겁니다.
"영희는 예쁘다"라는 문장에서 용언은 형용사인 '예쁘다'입니다. '예쁘-'가 어간입니다. '다'는 어미입니다. 이 문장도 극단적으로 활용해볼까요? '영희' 그리고 '예쁘'만 발음해도 뜻은 전달됩니다. 하지만 '는'과 '다'만 말하면 이게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용언의 어간에 집중해 멘트해야 정보 전달이 잘 되고, 어미에 이상한 조도 만들지 않습니다. 조사보다는 체언에 집중해야 뉴스를 제대로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습니다.
아나운서 실기가 어렵다 어렵다 하는 게 바로 이런 세세한 어투까지 교정해야 하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기본기'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으면 현업에서 뉴스를 하더라도 아나운싱이 엉망이 되고 맙니다. "말투가 왜 저래?" 이런 핀잔 만큼 아나운서에게 치욕적인 피드백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말투를 해체하고 담백한 어조를 익히는 작업은 프로페셔널한 아나운싱을 연마하는 첩경이자 정도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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