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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즈플 Aug 30. 2023

갑자기 내가 루푸스래요.

늑대물린여자 01




루푸스입니다.


내게 전하는 의사의 말이 퍽 조심스럽다. 

검사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심각한 상황일 리 없다며 코웃음 치던 의사는 저번과 다른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벽에 걸린 작은 원형시계의 초침소리까지 모두 들릴 정도로 사방이 고요해 침을 삼키기 어려웠다.


실감이 나지 않았고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보통 불치병 선고를 받으면 ‘오 이럴 수가! 나한테 어떻게 이런 일이!’라면서 눈물을 훌쩍거린다거나, ‘너 이 자식! 돌팔이구나!’ 하면서 의사의 멱살을 휘어잡아야 하지 않나?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는 그렇게 하던데.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게 정답이었을까?


흰 진료실 안, 작은 원형 의자에 앉은 내 기분이 어땠더라. 사실 그 당시의 기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려거든 붓을 휘휘 저어 빤 물감통 안을 바라보는 것처럼 속이 흐리기만 하다.      


나는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다가 멍청하게 "그런가요." 소리를 했다. 



내 담담한 태도에 안심한  의사는 그제야 이름도 생소한 그 병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식명칭 '전신성 홍반성 루푸스(SLE)'는 11가지 진단기준을 갖는데 그중 적어도 4가지를 충족해야 진단을 내릴 수 있단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항핵항체반응 검사가 아주 중요한데 이 검사를 통해 루푸스인지 여부를 확신할 수 있다고 했다.


어려운 용어 투성이었다.

그 짧은 문장 안에서 일상에서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단어가 몇 개인지 모르겠다. 어려운 전문가의 말은 한 귀로 들어와 다른 쪽 귀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 그래, 기억나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의사가 중요하다며 강조하던 단어는 ‘보체’였다. 면역작용을 하는 세포 종류 중 하나라고 했다. 그는 나의 혈액검사 결과에서 C3보체가 일반인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일반인은 보통 90-180 정도의 수치를 가지고 있는 데에 반해 나는 20밖에 되지 않는단다. 의사는 내가 그 수치를 가진 채 일을 하고, 제 발로 걸어서 병원으로 들어온 게 기적인 수준이라고 이야기했다.     


"위즈플씨는 신을 믿나요?"     

"그건 왜요?"   

"이 정도로 낮은 수치인데 저를 응급실이 아니라 외래 진료실에서 만나신 거면 운이 정말 좋으신 거예요. 저희는 모르는 무언가가 위즈플씨 몸 안에서 작용했다고 생각해야 해요."


'오, 신이시여. 제가 입원할 정도로 아픈데도 입원을 안 하게 해 주심에 감사드려요.'


의사의 책상에 있는 작은 십자가를 보면서 신께 감사하고 기도를 올리지 못한 까닭은 내가 단순히 무신론자여서일까, 아니면 속이 좁은 인간이라서일까.

그의 말이 내게는 큰 위로가 되지는 않았기에, 의사의 진지한 말에도 나는 속으로 농담 섞인 비아냥을 했다. 의사는 이어 당연하다는 듯이 당장 입원해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했다.



안 돼! 무슨 소리야!     

내 입에서는 반사적으로 안 된다는 말부터 튀어나왔다.     


"제가 지금 수련 중이라서요. 반년만, 반년만 더 하면 되는데……."     


병원에 가본 직장인들은 다들 한 번쯤 해본 말들이 아닐까?     


‘지금 맡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지금 하고 있는 작업물이 있는데,’     

‘저희 회사는 연차를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데…….’      


건강은 돈과 직장과는 비교하지 못하는 대상이다. 사람의 인생에서 내 몸과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물론 머리로는 잘 알고 있는 사실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젠 체하며 잘도 떠들어대던 조언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 사실이 내 현실이 되고, 몸을 우선하면 놓아야 할 것들이 질질 끌려 나오자 쉽게 그러겠노라 답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 내가 불치병에 걸린 사실을 알았는데 단 5분 만에 삶의 방향까지 바꾸라니, 말도 안 된다.


의사는 내가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상황 자체를 답답해했다. 미간을 찌푸린 의사는 철없는 아이를 혼내듯 아까보다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얼마나 운 좋은 케이스인데요. 루푸스는 응급실로 실려 들어오셔서 알게 되는 케이스가 많아요. 이렇게 진료실로 걸어 들어오신 게 기적이시라니까요? 당장 검사 결과도 지금 걸어 다닐 수 없는 수치라고요. 루푸스로 한 번 입원하시면 적어도 2주는 입원하셔야 해요."






여러분은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나? 맞다. 모두의 예상대로 나는 입원을 거절했다.     


"죄송해요. 제가 정말 중요한 시기라서요. 좀 더 생각해 볼게요."     


의사가 말한 검사 결과와는 다르게 나는 멀쩡히 걸어 다닐 수 있었다. 어제까지도 일을 했다. 당장 집에 돌아가면 해야 할 과제도 산더미였다.


언제 내 몸이 시한폭탄처럼 터져서 고꾸라질지 모른다고 하지만 사실 그건 누구나 그렇지 않나?


지금 내가 이 병원을 나서다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을 수도 있고, 오늘 밤 머리 위로 벼락이 내리쳐서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입원하고 수련을 포기하라느니, 내 꿈과 진로를 포기하란다. 내 직업은 스트레스가 많을 수밖에 없는 감정노동 직업이니 유지하지 말란다.


웃겨 정말.



나는 누군가 나의 인생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살아온 인생이기도 했다.

그런 내게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의사가 앞으로 자신을 평생 볼 거라고, 잘 부탁한다며 내 인생에 간섭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회성을 발휘해 나는 웃으며 인사를 했다. 내가 아픈 사람이라지만 타인의 기분을 살피는 습관은 이미 뼛속까지 몸에 배어있었다.


“다음에 뵐게요.”






이 이야기는 루푸스라는 질병에 걸린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루푸스는 한국에 약 2~3만여 명의 환자가 있다고 하나 아직 자신이 루푸스임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10년이 넘도록 정신병원에서 나아지지 않은 정신질환을 치료받았는데 알고 보니 루푸스였다는 일도 있더라.



어느 날 가만히 카페에 앉아 있다가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양한 표정의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하고, 웃고, 소통하는 모습을 보며 아픈 사람과 아프지 않은 사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 글에 루푸스로 바뀌게 되는 인생과, 주변 사람들과의 일화들을 천천히 담아보려 한다. 비단 루푸스뿐 아니라 주변에 아픈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일지, 내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사람들이 이 글을 통해 함께 공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모두 어느 한구석이 아프다. 행복하기만 한 삶은 없다. 그래서 사람 인이 서로를 지탱하고 있는 한자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서로를 버티어주는 관계이다. 이 글이 당신이 혼자 버티기 힘든 날, 이런 사람도 함께 살아가고 있구나라며 하루를 버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루푸스(전신성 홍반성 루푸스) [systamic lupus erythematosus]
; 면역계의 이상으로 온몸에 염증이 생기는 만성 자가면역질환으로 젊은 나이의 여성에게 주로 발생하는 질병으로 알려져 있다.


루푸스 진단 기준 ; 11가지 중 4가지 이상이 나타나야 한다고 해요.
  1) 안면홍반 (뺨의 나비모양의 안면홍조입니다.)
  2) 원판상 발진 (원반 모양의 도드라진 형상을 띄어요.)
  3) 광과민성 (자외선 노출 시 노출 부위의 피부에 발진)
  4) 구강 궤양 (대개 초기에는 통증이 없이 가운데가 푹 패이는 느낌의 궤양이에요.)
  5) 관절염 (두 개 이상의 관절에 빨갛게 붓거나, 열감이 있거나 통증이 있는 경우)
  6) 장막염 (늑막염, 심낭염)
  7) 신질환 (일 0.5g 이상의 단백뇨 혹은 소변의 세포 원주)
  8) 신경학적 질환 (다른 이유가 없는 경련 발작, 우울, 불안, 정신병, 집중력 저하 등)
  9) 혈액학적 질환 (일반 혈액 검사에서 용혈성 빈혈, 백혈구/림프구/혈소판 감소증)
  10) 면역학적 질환 (자가항체검사 양성)
  11) 항핵항체 검사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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