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즈플 Aug 30. 2023

나도 이제 막 환자가 된 거라

늑대물린여자 02



첫 진료를 마치고 난 후, 한참 동안 길을 잃은 사람처럼 병원 로비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서성거렸다.성인이 되고 나서 모든 일을 혼자서 하던 나는 이런 일을 가족에게 이야기를 하는 게 맞는지조차 몰랐다. 핸드폰 검색창에 ‘병 걸린 거 가족에게 말하기’를 쳐보기도 했다. ‘자신이나 가족에게 불치병이면 90% 이상 안락사 찬성’따위의 기사 내용만 나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같이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망설이다가 병원 복도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두 달 동안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니다가 큰 병원까지 찾아간 딸이다. 엄마도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시지 않았을까.


타지에서 일하고 계신 엄마에게 걱정을 끼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루푸스에 대해 설명했다. 병원에서 일하다 보니 보호자에게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는 방식은 익숙했다. 타자의 병을 말하는 모양새로, 덤덤하게 표현했다.

  

"그게 무슨 병이라니?"

"그냥……. 자가 면역 질환의 종류라던데. 내 면역세포가 내 몸을 공격하는 거래. 약 먹으면 된다더라."

  

진료실에서 이야기를 들을 땐 괜찮았는데 내 입으로 몸 상태를 말하려니 병에 걸린 사람이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싫었다. 목이 턱 막히고 눈물이 먼저 비져나왔다.



어디에선가 눈물이란 현실을 바라보고 싶지 않을 때 눈앞을 가림으로써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방어기제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목이 턱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도 같은 이치일까. 당장의 말을 막았을 때 나에게 좋은 결과가 돌아오지 않을걸 알면서도 눈물이 났다. 진료실 안에서는 의연하기만 했는데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시야가 흐려지고 숨이 가빠왔다.

   

눈물을 참느라 말이 끊기자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안 들린다며 답답해하던 엄마는 다음에 통화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아마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딸의 목소리에 그래도 괜찮은가 보다 하고 안심하셨던 것 같다.


전화를 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병원 복도는 환한 조명들이 빛나고 있었고, 사람들은 바쁘게 복도를 지나치고 있었다.

나는 혼자였다. 내가 불치병 환자라고 하는데 아무도 내 곁에 없었다. 뒤늦게 두려움이 몰려왔으나 그 어느 곳에도 이야기할 데가 없었다.


당장 단톡방을 켜서 친구들에게 “빅뉴스! 나 오늘부터 환자래!”라고 할 수도 없었고, 직장에 가서 “선생님들. 제가 오늘부터 불치병 환자라고 합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게 이렇게 호들갑 떨 일인 건가 확신을 가질 수도 없었다.

 

막막함이 밀려들어와 한숨만 연거푸 내쉬다가 복도 한가운데에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자 천장에 달린 거대한 샹들리에가 가려지며 어둠이 찾아왔다.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답 없는 한숨은 훌쩍임이 되었고, 그 소리는 조금씩 커졌다. 목놓아 울기 시작하자 내 울음소리에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작게 멀어졌다. 주위 사람들이 흘긋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릎 아래, 상아색의 큼직한 대리석 타일이 마치 하나의 섬 같았다. 하얀 줄눈의 경계로 넘어서면 바닥이 없는 깊은 바다로 떨어질 것 같았다.


병원에서 쪼그려 앉아 우는 사람. 이유를 짐작하기에는 쉽지 않을까.

사람들은 고맙게도 나를 멀리 돌아 비켜갔다. 그때 나는 누군가 어깨에 손을 올리고 괜찮냐고 물어봐 주기를 바랐을까. 무관심하게 지나쳐 나를 창피하지 않게 만들어주기를 바랐을까.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그 당시에는 뻔뻔하게 길 한복판에 주저앉아 있으면서도 누군가에게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도저히 자리를 비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서럽기만 했다.

 

한참을 울다가 눈물을 닦고 일어난 나는 코가 빨개진 채로 혈액검사실 앞의 프레즐 집에서 평소 좋아하는 크림치즈 프레즐을 샀다. 엉엉 울어놓고도 고소하고 달달한 프레즐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눈물 젖은 음식이 원래 더 맛있다던데, 그래서 그렇게 달았을는지.

병원 구석에서 마스크를 내리고, 막대 프레즐을 입안에 욱여넣으면서 창 밖을 내려다보았다. 유리창 너머의 사람들은 어디를 그렇게 바쁘게 다니는지 아까 전의 나처럼 멈춰있는 사람들은 한 명도 없었다.


‘인생은 저렇게 앞을 보고 바쁘게 살아가야 하는 건데 나는 바보처럼 뭐 하는 거야.’


바쁜 사람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고개를 크게 젓고 다짐하듯 눈을 부릅떴던 것도 같다.


'그래, 뭐 별거 있어? 내가 변한 것도 아니잖아. 그냥 약 잘 먹고 운동 열심히 하고 뭐 그럼 되는 거 아냐? 나이도 젊으니까. 감기 걸렸다고 생각하고 꼬박꼬박 약 챙겨 먹자.'


프레즐이 달았다. 진료실에서 너무 서러웠노라고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못했던 나에게 주는 작은 위로였다. 손가락 같은 빵을 씹어먹고 일어난 나는 약국으로 향했다. 루푸스라고는 하는데 역시 현실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 울었던 사실이 뒤늦게 창피했다.


내 나이 29이었다. 용기를 내어 새로운 진로를 걷기 위해 이제 막 수련을 시작하고 있었고, 새로운 공부에 허덕이면서도 즐거움에 눈을 반짝이고 있는 나이였다. 하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다. 

어느 날, 두 팔과 다리에 갑자기 루푸스라는 족쇄가 묶여버렸다고 하지만 하나도 실감은 나지 않았다.

이전 01화 갑자기 내가 루푸스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