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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즈플 Oct 26. 2023

밀이냐 쌀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망설이다'



오늘은 병원에 가는 날입니다. 화요일에는 류마티스 내과에 다녀왔고 오늘은 심장내과를 가서 초음파를 봅니다. 저는 원피스형 옷을 즐겨 입는데, 심장초음파를 볼 때는 상하의가 나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하의까지 모두 벗은 채로 초음파를 보는 불상사가 일어나기 때문이에요.


병원에 갈 때는 키보드를 챙깁니다. 피검사를 일찍 하고 나면 3시간 정도 여유가 생기는데 그동안이 글을 쓰기에 가장 알맞은 시간입니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오래된 원피스를 바느질하고 그 위를 코바늘로 뜨개질한 키보드 파우치는 가방에 넣을 때마다 뿌듯함과 함께 기분이 좋아짐을 느낍니다. (기실 어떤 모양이 가장 예쁜지 선택하지 못해서 온갖 꽃과 색을 집어넣은 잡탕이기는 하지만, 만든 당사자만 만족스럽다면 된 게 아닐까요?)


사실 키보드가 휴대용치고는 과하게 크기는 합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을 위한 풀 배열 키보드다 보니 이게 들어갈 수 있는 가방도 대학교 신입생 때 샀던 MT용 가방 하나가 전부입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앨리스배열(손목이 돌아가지 않도록 하는 인체공학방식)의 기계식 키보드를 새로 사기에는 정기적인 수입이 없는 백수가 너무 큰걸 바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은 또 키보드 꾸미기가 유행을 하고 있어 유튜브를 들락거리며 글 쓰는 사람들의 키보드 영상들을 보면서 기계식 키보드의 타닥거리는 소리를 부러워하고 있네요. 


피검사를 위해 전날 밤부터 계속된 공복 이후 처음으로 먹는 끼니입니다. 뭔가 맛난 걸 먹고 싶는데, 밀가루냐 쌀이냐 항상 결정을 제대로 내리지 못합니다. 간단하게 해치우고 글에 집중하고 싶을 때는 역시 카페에서 빵을 먹으면서 작업을 하는 편이 나을 테고, 그래도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싶을 때는 쌀이 좋을 거예요. 이렇게 먹는 걸 좋아해서 살은 어떻게 뺄지 모르겠습니다. 병원에 가는 중에도, 피를 뽑는 중에도 오로지 머릿속의 생각은 '점심 뭐 먹지?' 하나입니다.


고민하다, 고뇌하다, 결정을 내리지 못할 때 쓰는 단어는 참 많습니다. 저는 평소에 '고민하다'라는 단어를 많이 씁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고민하다라는 뜻을 찾아보니 '마음속으로 괴로워하고 애를 태우다.'라더군요. 이것 참 당황스럽네요. 괴로울 정도로 힘든 건 아닌데요. 식사쯤 어떻겠습니까. 설령 둘 다 못 먹고 샐러드로 밥을 대신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색다른 한 끼가 될 텐데요.


매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어영부영하는 일이 잦습니다. 자주 쓰게 되는 단어이니만큼, 정확한 단어를 찾고 싶었습니다. 대학생 때는 친구들 사이에서 '결정장애'라는 말이 유행으로 돌았습니다. 하지만 장애라는 단어를 비하하는 용어라는 걸 배운 이후, 그 단어를 제 입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더군요. 이후로는 '우유부단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아무래도 명사를 동사나 형용사처럼 자유롭게 치환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번 기회에 열심히 단어를 찾아보니 '망설이다'라는 단어가 좋을 것 같습니다. 

망설이다

이리저리 생각만 하고 태도를 결정하지 못하다.

어때요? 고민한다는 단어보다 더 적절한 단어 같지 않나요? 퍼즐의 빈 부분이 딱 알맞게 들어가는 느낌이 들 때, 그때만 느낄 수 있는 개운함이 분명 있습니다.



차 안에서도 계속 망설일 것 같습니다. 밀이냐, 쌀이냐. 오늘은 뭘 먹어야 만족스러운 하루가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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