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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즈플 Nov 02. 2023

정리 중에 앨범을 발견하면 안 됩니다

'바래다', '바라다'



막냇동생이 휴가를 나왔습니다. 내년 5월이 제대인데 이제 상병을 달았다고 걸어 다니는 폼에 각이 살아 있습니다. 매일 구부정한 등으로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아 엉덩이를 두드려 깨워야만 일어나던 동생인데, 알아서 5시 반에 일어나 집으로 오다니, 제가 나이들 때보다 막내가 나이를 먹을 때 더 놀라고는 합니다.


막내가 이번에 휴가를 낸 건 저희 집이 이사를 가기 때문입니다. 이주동안 계속 이삿짐을 쌌지요. 이제 내일이면 부동산 계약을 하고, 토요일에는 이사를 갑니다. 십 년 동안 우리를 품어주었던 정든 집과 이별하게 됩니다.


저나 둘째는 청소년기 일 년에 한 번씩, 가끔은 반년에 한 번씩도 이사를 다녔습니다. 이 집에 정착한 때는 수능이 끝난 이후라 머리가 굵어졌을 때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랴, 학교를 다니랴, 집안일을 하랴 정신없이 사느라 집이라는 공간이 제게 안식처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던 것 같네요.


하지만 막내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이곳에서 살면서 모든 생활반경이 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친구들도, 알고 있는 놀이 공간도, 맛집도, 모두 다요. 그래서 이사를 가는 게 무섭다고 합니다. 친구들과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누나, 나는 계속 월세를 살아도 좋으니까 이 집에서 살고 싶어."


처음으로 갖게 된 저희 집에 어머니는 뛸 듯이 기뻐하고 계십니다. (물론 현관만 저희 거고 나머지는 은행거지만.) 그런 어머니에게 차마 말하지 못하고, 두 달 전 막내는 자신의 속마음을 큰누나에게만 넌지시 표현했습니다. 그런 막내에게 누가 철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동생과 다락방에 쌓인 물건을 정리했습니다. 요즘은 왼쪽 손목이 굳어 움직이지 않습니다. 글을 쓸 때도 왼손 엄지는 사용하지 않으려 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이주 전부터 열심히 짐을 쌌지만 다락만은 엄두를 내지 못하겠더라고요. 막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답니다.


키가 큰 막냇동생은 사다리를 타고 성큼성큼 올라가 커다란 상자들을 가볍게 내렸습니다. "아들 키운 보람 있네!" 우스갯소리에 헤실 웃어버리는 얼굴이 제법 귀엽습니다. 


그렇게 꺼낸 다락방의 물건들 속에 추억의 상자가 보였습니다. 앨범상자입니다. 우리의 어릴 적 모습이 담긴 앨범을 꺼내자 뽀얗게 쌓인 먼지가 일어나 둘 다 콜록콜록 잔기침을 했습니다.


"우와, 누나 왜 이렇게 나 어릴 때랑 닮았어?"

"무슨 소리야! 너 아기 때가 나랑 닮은 거지!"


앨범은 왜 이렇게 재밌는 걸까요? 청소 중에 절대 앨범을 꺼내서는 안 됐는데 말입니다. 올록볼록 소시지 같은 짧둥한 팔, 둥근 얼굴, 작은 발, 생경한 얼굴에 저도 모르게 함박웃음이 지어집니다. 엄마는 멋쟁이였고 우리들을 예쁘게도 입혀놨습니다.


막냇동생의 사진에 어린 날 누나들이 설명을 붙여놓았다.


이렇게 신기하고 재밌는 사진들이라니. 정신없이 사진들을 구경하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분명 햇빛 한번 쐬지 않았는데도 왜 옛날 사진들은 이렇게 색이 노랗게 변하는 건지. 색이 바랜 사진들이 아까워 후후 불어봐도 다시 돌아오지는 않더군요.


바래다의 뜻은 이렇습니다.

1. 볕이나 습기를 받아 색이 변하다. / 색이 바래다. 
2. 볕에 쬐거나 약물을 써서 빛깔을 희게 하다.        

바라다의 뜻은 이렇군요.

본인이 생각한 대로 어떤 일이나 희망 등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저는 꽤 오랜 시간 '바래다'와 '바라다'의 차이를 몰랐습니다. 노사연의 '바램'이라는 노래를 좋아했는데 그 노래 때문에 '바래다'와 '바라다'가 같은 뜻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이제는 그 차이를 알게 되었으니, 그래도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해상도가 조금은 촘촘해졌을까요?


사진 속의 우리는 모두 행복해 보입니다. 이때 분명 안 좋은 상황들이었음에도 사진 속에서만큼은 어찌나 행복해 보이는지. 우리의 기억들도 이렇게 변해서 안 좋은 기억은 지워지고 좋은 기억들만 남는 걸까요? 어쩌면 그것이 축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을 명확하게 기억하는 건 슬프고 괴로운 일들도 또렷하게 기억한다는 뜻이잖아요. 색이 바랜 사진들은 아쉽지만, 가끔 멈춰 서서 바랜 추억을 회상하는 데에 그치고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야겠지요. 선명한 현실을 살다 보면 이 현실도 모두 색 바랜 추억이 될 겁니다. 그 추억도 딱 지금 이 과거만큼 어여쁠 겁니다.



그래도 먼지는 좀 닦아야겠어요. 아주 먼지소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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