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 '철들다.'
빈대. 요즘 사회가 빈대로 극성입니다.
저는 집 안의 왕빈대입니다. 3개월 차 왕빈대죠. 챱 달라붙어서 집 밖으로도 잘 나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빈대생활을 한다고 정말 빈대처럼 해충짓을 하면 어머니가 궁둥이를 걷어차 내쫓지 않겠어요? 저도 나름 나이가 꽉 찬 30입니다. 생일도 지나버려서, 만으로 따져도 더는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철이 덜 들었어도 20살 때처럼 굴 수만은 없습니다. 몸이 아프다고 생떼 피우고 대자로 누워 뒹굴거리기에는 염치라는 단어를 알고 있습니다.
잠깐, 제가 염치라는 단어를 제대로 알고 있나요? 이렇게 맥락만으로 대충 파악하는 단어가 얼마나 많을지 감도 오지 않습니다. 급하게 인터넷 창을 켜봅니다.
염치라는 단의 뜻은 이렇습니다.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아무래도 비슷한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늘 하시는 말입니다. "어이구, 철 좀 들어!"
철들다는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하는 힘이 생기다.
라는 뜻입니다. 사리를 분별하는 힘이나 체면을 차릴 줄 아는 마음 모두 나이가 든다고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만치 먹었음에도 철도 없고 염치도 없다면 아무래도 혀를 끌끌 차게 되고는 하지요.
역시 백수가 된 딸이 어머니 밑에 얹혀살며 뭐라도 해보려는 이유는 철이 들어서라기보다는 염치를 좀 챙겨보려는 마음이 맞겠어요.
집에서라도 열심히 살아보려는 백수에게 어떻게 알았는지 글쎄 10월 초부터 문자가 날아옵니다.
'재택알바'문자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한 번호만 쓰고 온지라 스팸 문자가 적은 편이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제 폰 번호가 보이스피싱에 뚫렸을까요? 엄청난 재택알바 문자들이 쏟아집니다. 이삼일에 한 번쯤은 들어오는 문자들의 내용은 비슷합니다.
업무 종류는 쇼핑몰 등에 물품작성알바. 구매 대행 등입니다. 부업으로 진행한다고 하며 하루 2~3시간으로 한 달에 200만 원 정도는 벌 수 있다고 합니다. 정신건강전문요원 4호봉으로 한 달에 20시간 야근비까지 합해서 200 초반의 월급을 받았는데, 하루 2~3시간 재택알바로 200~300만 원을 벌어갈 수 있다고요?
당연히 보이스 피싱이겠거니 라며 넘겨야 하는데, 백수인 저는 참으로 혹하게 되는 문구들이었습니다. 이삼일에 한 번씩 오는 문자들은 마치 제가 백수임을 아는 것처럼 돈 벌 기회 필요하시죠?라고 속살거리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제게 문자를 보내면서도 바빠서 연락이 잘 안 된다며 시간을 정해놓고 이 시간대에 직접 연락을 달라고 말하였습니다.
왠지 제가 을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홈쇼핑 회사로 들어가니 실제로 회사명도 있고 운영도 성실하게 잘하고 있더랍니다. 지금은 퇴직 전에 쌓아둔 돈을 쓰고 있지만 그 돈이 동나기 전에 새로운 파이프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저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때, 친구에게 뭐 하냐는 문자가 왔습니다.
[뭐 해?]
[나 아르바이트하려고.]
[몸 안 좋아서 퇴직해 놓고 무슨 알바를 해?]
[무슨 재택알바 공고가 계속 문자로 오더라고. 한 달에 많게는 500만 원도 준대서. 밑져야 본전이니까!]
신이 나 답을 하는 제게 친구가 다급하게 답을 했습니다.
[이것아! 그거 사기야!]
알구보니 쇼핑몰 후기 알바는 요즘 들어 극성인 보이스피싱 수법 중 하나더군요. 인터넷에 검색 한 번만 해도 너무나 뚜렷하게 나오는 사기 수법이었습니다.
1. 쇼핑몰에 물건 사용 후기를 남기기 위해 물건에 준하는 현금을 직원에게 입금
2. 후기작성을 확인하면 직원이 소정의 수고비 (보통 물건의 5~10%)를 더해 환급.
3. 초기에는 아르바이트비 지급으로 안심시킨 후 더 큰 수익을 위해 큰 금액을 충전하게 함.
4. 수익금 지급 미룸, 사이트 폐쇄 후 잠적.
(@ 증여세, 사이트 오류 등의 명목으로 추가 입금 요구)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저 지금 사기꾼한테 사기당하고 싶다고 스스로 카톡을 보낸 상황입니다.
급하게 사기꾼에게 보낸 카톡방을 나갔습니다. 그럼에도 가슴이 진정되지 않다가 갑자기 스스로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마침 연락을 준 친구는 정말 고마웠지만 그 어디에 가서도 이런 사실을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너무 쪽팔리잖아요. 나이 30을 먹고 엄마에게 손벌릴 수 없다며 푼돈이라도 벌겠다고 재택알바를 찾다가 갖고 있는 돈을 다 날릴 뻔했다는 게. 체면 차리려다가 얼마 있지 않은 그 체면을 돈과 함께 모두 날려버릴 뻔했습니다.
아직도 가족들에게 말 한마디 못한 사기당할뻔한 쇼핑몰 부업 문자. 여러분에게도 찾아오나요? 혹하게 만드는 문자들이지만, 속는 건 저 하나로 충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 제가 좀 더 철이 들어서 여유롭게 가족들에게 이 일을 털어놓으며 웃을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