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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마담 Oct 30. 2022

상여자 특) 프로포즈 먼저 함 #최종

소곱창, 민물고기 매운탕과 함께 가장 좋아하는 최애 삼대장 음식으로 꼽는 ‘닭 한 마리’를 앞에 두고 나와 그는 마주 앉아있었다. 두께감 있는 도톰한 니트 집업에 비니를 눌러쓴 그의 발갛게 상기된 얼굴이 십이월 겨울 날씨를 증거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십이월이었다. 이십 대 중반이 넘어가면서부터 시간은 언제나 똑같이 흐른다는 그 분명한 진리를 믿기 어려워졌다. 일주일, 한 달, 별일 없이 지내다 보면 금세 일 년이 지났고, 서른이 넘으면서 그것은 가속도가 붙은 것처럼 점차 빨라져 최근 들어 나는 나이를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종종 내가 서른셋인지, 넷인지 곰곰 생각해보기도 했을 정도였던 터였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이 십일월이니 꼭 한 달이 흘러있었다. 고작 한 달. 그 시간을 채우는 수많은 대화와 꽉꽉 들어찬 에피소드들을 생각하면 그것은 아주아주 긴 시간 같았다. 참 이례적이고 신기한.      


“사장님, 이즈백 하나요.”     


술을 별로 좋아하진 않아서요. 그가 이미 여러 번 했던 말을 생각하면 소주를 주문하는 것이 내가 아닌 그라는 것은 또 얼마나 이례적이고 신기한 일인가. 왠지 모를 낯선 기분에 나는 조금 얼떨떨해져서 머릿속으로 무슨 말을 할지 골라보고 있었다.

     

고기는 지금 바로 먹어도 돼요, 이즈백 한 병과 함께 종업원이 무심하면서도 친절한 한 마디를 건넸다. 퍽살을 좋아한다는 그가 다리와 날개는 전부 연주 네가 다 먹으라면서 먼저 다리 한 점을 내 앞에 놓인 접시에 건져줬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아, 이 사람과 만나면 친구들이 이 점은 참 부러워하겠는데, 꼭 자랑해야지, 하는 우스운 생각에 갑자기 픽 웃음이 샜다. 그를 만나보기도 전부터 ‘예랑’이라는 호칭을 내 맘대로 정해놓고 부르곤 했으니 처음부터 그에게 지닌 호감을 부인할 순 없었어도 사실 얼마간은 장난기 많은 나의 짓궂은 장난이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홍천 여행 전후로? 아니, 사실 가평 캠핑장에서부터? 확실히 특정할 수 없었어도 언젠가부터 나는 그와 정식으로 교제하게 되는 것을 진지하게 상상해보곤 했다. 아마도 아주 여러 번.     


사귄다라.      


삼십 대 중반의 여성에게 남자와의 교제란 특별할 일이 아닌데도 새삼 쑥스러워졌다가 문득 이전 몇 사람과의 잔잔했던 만남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실상 한두 달 전 일에 불과했다. 그것을 가만가만 되짚어보면 지금 이렇게 스펙터클한 감정을 갖는다는 건 참 기적에 가까운 일일지 모른다. 삼십 대 중반이 되어가면서 그런 불타는, 열정적인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매사에 정열적으로 살아왔던 나조차도 회의적이었으니, 이제 이런 무딘 감정에 익숙해져야 하나, 적응해야 하나, 생각하던 참이었다.

      

사실 근래 만났던 남자들은 객관적으로 따져보아도 크게 흠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 나이가 있는 만큼 본인이 쌓아온 커리어에 자부심이 있었고, 건강하고 단단한 가치관이 있었다. 나 역시 그들이 과분하다고 생각될 만큼 존경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들 중 몇은 내게 호감을 보이기도 했으니, 나는 그만큼 괜찮은 사람이 내게 호감을 표현했다는 것이 진심으로 고맙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것이 ‘진짜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는데, 첫째로 사랑에 대한 열의가 이십 대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고, 두 번째론 종종 그들과 대화하면서 평가를 받는다든지, 낱낱이 해체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던 까닭이었다. 그러한 고민에 대해 주변인들에게 토로해도 다수의 경우, 알 것 다 아는 삼십 대 중후반의 사람들에겐 그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혹은 이십 대의 불도저 같은 감정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더 성숙하다, 라는 답변을 듣기도 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뭐, 그것이 삼십 대 중반의 사랑이라면, 하며 얼마간 그 분위기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로맨티시스트로서의 ‘뿌리’를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는 정말 오랜만에 내가 그런 느낌을 받지 않은, 기다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 아주 반가운 사람이었다. 한 길 사람 속 모르는 거라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는 바로는 그랬다. 영악한 부분을 찾을 수 없었고 솔직하고 우직한 성격을 지녔다. 물론 ‘신중함’을 이유로 나름 오랜 시간을 갖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이 그의 열정이 덜해서라거나, 혹은 계산적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것은 내 쪽도 마찬가지여서, 새삼스레 나는 한 달간 얼마나 맹목적이었는지, 얼마나 감정에 솔직하게 지내왔는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설레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분노하고, 후회하고. 각각의 감정들은 늘 최대치로 끌어올려진 상태였고, 이 모든 감정이 단 한 달간 휘몰아치듯 겪은 것들이었다.     


나를 그토록 맹목적으로 만들었던 사람이 앞에 앉아있다. 속으론 이런저런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음에도 그가 씩 웃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나는 흠칫했다. 저 미소 때문에 벌써 여러 번 이성이 마비됐었지, 만약에 내가 그와 만나게 된다면, 그래서 다툴 일이 생기게 된다면,      


그러면 저 미소는 그때도 날 무장해제시킬 수 있을까.      


또다시 나는 진지한 상상에 빠져들었고, 그는 내 접시에 또다시 다리 한 점을 올려주었다.      




“근처에 맥줏집이라도 갈까?”

    

그의 제안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오 분 정도 걸어가면 프랜차이즈 맥줏집 하나 있어요. 가게에서 나오기 전, 그는 자신의 겉옷을 자연스레 내게 건넸는데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 가게 문을 열었다. 훅 끼쳐오는 십이월의 바람은 찼지만 청량했고 그것은 뭐랄까, 가평 캠핑장을 떠올리게 하는 기분 좋은 설렘의 찬 공기였다.      


닭 한 마리를 모조리 다 먹었으니 배가 부를 법도 한데, 이 차로 간 맥줏집에서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그는 맥주 오백 시시 한 잔과 이즈 백 한 병, 그리고 안주 두 개를 더 시켰다. 딱 한 병만 먹자. 식당에서보다 테이블의 폭은 좀 더 좁아 그와 나의 사이는 그만큼 더 가까워졌으므로,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음에도 그의 말소리는 가깝게 들렸다.

      

조리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주문한 지 오 분도 채 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어느새 짜파구리와 감자튀김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방금 식사를 막 마친 걸 잊은 건지, 이토록 먹음직스러운 짜파구리를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어 내 젓가락질도 다시 정신없이 활발해지고 있었다. 그것을 멈추게 한 건 그가 그때 군자에서, 라며 입을 뗐을 때였다.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는 예열의 시간을 갖지 않는, 또 빙빙 둘러말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내가 그토록 퍼부어댔던 ‘군자역 사건’을 그가 먼저 언급하였기 때문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아직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술도 얼마 마시지 않은 덕에 나는 너무나도 맨 정신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날을 생각하면 여전히 속이 상하면서도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 숨고 싶었다. 조금 더 성숙하게 대처했을 수도 있을 텐데 그때의 나는 마치 첫사랑을 겪는 어수룩한 이십 대 초반인 것처럼 말 그대로 통제 불능의 상태였으니 내게는 ‘물 마시고 갈래’와 더불어 잊고 싶은 기억이 된 탓에 그와 어영부영 다시 연락을 이어가게 되었어도 왠지 그날의 일을 언급하는 것만큼은 부끄러워 영 피하고 싶었다.

      

다행일까. 결코 우스운 일은 아니라는 듯 그는 충분히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진심으로 내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뭔가 결단을 내린 것 같이 굴었는데 어쩐지 이 상황이 민망해 다른 이야기로 돌려보려고 해도, 오늘은 내 뜻대로 해줄 용의가 좀처럼 없어 보였다.      


그날의 단호하지만 미성숙했던, 내가 그에게 쏘았던 말들과 당황했던 그의 표정이 떠올라 어떤 답도 하지 못한 채 멋쩍게 웃는 나를 두고 갑작스레 그는,     


본능적으로,     


라고 말했는데, 정말 예상치 못하게 던져진 말이어서 나는 예? 하며 놀랐다. 가게의 음악 소리만 아니었다면 소리가 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심장 세차게 뛰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오래 보고 싶은 마음에 그랬어.          



예상했지만 예상치 못했던 순간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아까부터 그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만큼이나 그 역시 생각이 많았던 것처럼 보였다. 단단하고 고집스러운 눈빛과 말투가 그것을 알리고 있었다. 어쨌거나 연이은 그의 말에 나는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차피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있던 내 손을 가만히 잡더니, 그는 다시 한번 그의 뜻을 전했다.           


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은 늘 헷갈리지 않았다고.           


오늘 그를 보면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견인된 차가 보관되어있는 장소에 가던 택시 안, 정말 당황하기만 했었는지, 가평에서 나를 데려다줄 땐 어떤 심정이었는지, 내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을 때 후회하진 않았는지, <우리도 사랑일까>로 건네진 내 사랑의 가치관에 대한 당신의 답은 무엇인지.     


오늘이 오기까지 몇 번이나 곱씹어보던 그 질문들은,           


만나.          


라는 그의 단호한 말에 조각조각 흩어지다 사라져 버린 듯 어떤 낱말 하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를 알게 된 이후의 여러 순간이 주마등처럼 내 앞을 지나고 있었다. 어떻게든 그를 만나보고자 만들어낸 가짜 취향, 기막힌 작전, 견인, 캠핑장과 술에 취해 한 기억나지 않는 고백, 엑스에 대한 질투, 그리고 밤새 나눈 수많은 대화들.

     

그가 잡은 손을 빼지 않은 채로, 나는 새초롬하게 답했다.           



생각해볼게요.           



웃으 그는 말했다. 고마워, 마음 받아줘서.

    

그리고 나는 무장해제되었다.


한 달간, 나를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갇히게 했던 그 사람이 내 앞에 앉아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를 만난 후로 수십 번은 더 상상해봤을 바로 그 상황이 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나보다 십 년은 어려 보이는 사람들이 와글와글 떠들고 있었고, 나와 그의 사이엔 여전히 짜파구리와 감자튀김 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그는 전혀 모르겠지만, 그때 나는 픽 웃었다. 첫 만남의 칼국숫집과 카페를 생각하면 역시 ‘그’답다고 생각하면서.


               

2021년 12월 어느 날. 그날은 그와 나, 우리의 결혼을 361일 앞둔 날이었다.




1부 끝.


홍마담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MVI-WRQYPQFToxaq4Nn04A

홍마담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hong_ma_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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