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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해서 부자 될 수 있나요?

by 김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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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기도도 물릴 수 있을까?


그렇다면 물리고 싶은 기도가 있다. 아직 교회 오빠이던 시절 청년부 예배의 대표기도자로 이런 기도를 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씀처럼 일한 것 이상을 바라지 않고 일한 만큼만 거두게 해주시옵고......”


제정신인가? 아니, 일한 것보다 많이 버는 게 얼마나 좋은 건데? 소득 중의 소득이 불로소득이다. 혹시 그때 그런 기도를 해서 그동안 내 벌이가 박했던 것은 아닐까? 부자가 되는 것을 죄악시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시간이 흘러 교회 안 다니는 아저씨가 된 지금은 그저 부자가 돼서 일하고 싶을 때만 일하면서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러나 번역가는 부자가 될 수 없는 직업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벌이에 한계가 있다. 왜 그럴까? 번역가는 대부분 매절로 계약한다. 원고의 분량을 기준으로 보수가 산정되는 방식이다. 번역 원고를 원고지 장수로 환산해 장당 얼마로 계산한다. 세상에 자기 소득을 불특정다수에게 공개하는 정신 나간 사람은 별로 없지만 정확한 예를 들기 위해 말하자면 현재 나는 번역료를 장당 5,000원으로 계약한다.


이제 내가 한 달에 몇 장을 번역하는지 알면 대략적인 벌이를 가늠할 수 있다. 내가 하루 8시간(점심시간 제외) 풀타임으로 일했을 때 생산할 수 있는 원고량은 최대 50장 정도다. 그러면 일 25만 원, 한 달에 20일을 일한다고 치면 월 500만 원이다. 여기서 기본적으로 3.3퍼센트는 세금으로 떼고 입금된다(16만 5,000원). 그리고 국민연금 납입액이 9퍼센트(45만 원)로, 회사가 절반을 부담하는 직장인과 달리 프리랜서는 전액 자부담이다. 그리고 건강보험 납입액은 재산을 함께 따지기 때문에 사람마다 다른데 여기서는 편의상 18만 5,000원이라고 하자. 그러면 세후 소득은 월 420만 원이 된다. 현재 내 나이가 만 43세로, 이 연령대의 평균 소득은 세전 기준으로 월 420만 원 정도다. 그렇다면 평균 이상을 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부자가 될 만한 돈은 아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매우 이상적인 상황을 가정한 수치다. 매일 50장을 생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료 조사나 문장에 대한 고민이 필요 없어서 술술 번역문이 나오는 책을 맡았을 때나 가능한 분량으로, 조금만 까다로운 책을 만나도 생산량이 대폭 줄어든다. 그리고 프리랜서라는 직종의 특성상 매월 20일씩 일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일감이 없어서 본의 아니게 쉬어야 하는 날이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장당 5,000원은 내가 알기로 업계 최상위권 번역료다. 이보다 많이 받는 번역가도 존재하겠지만 많은 출판사가 이 정도면 최고의 대우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세후 월 420만 원은 어찌 보면 이 업계에서 가능한 소득의 최대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은 그 이하로 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도 그 정도 돈을 벌어본 적은 없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느라 풀타임으로 일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경력이 쌓일수록 어려운 책, 곧 시간만 잡아먹고 돈은 안 되는(하지만 번역할 가치는 있는) 책이 많이 들어와서 풀타임으로 일한들 꾸준히 그런 소득을 올릴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특히 경력이 짧은 경우에는 계약 단가 자체가 낮다 보니 열심히 일해도 월 300만 원을 버는 것조차 버거울 수 있다. 게다가 번역료는 정말 안 오른다. 내가 일을 시작한 2008년에 선배 번역가들에게 “번역료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말은 17년이 지난 2025년에도 유효하다. 물가상승률 반영 같은 것은 없다.


단적인 예로 내가 2007년에 바른번역아카데미(현 글밥아카데미)에서 번역을 배울 때 현직 번역가였던 A선생님은 당시 최고 대우를 받는 번역가들의 몸값이 장당 6,000원 정도라며 본인은 장당 1만 원을 받는 번역가가 되는 게 목표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도 장당 6,000원은 전설 속의 번역료다. 그리고 구체적인 통계가 없어 정확히 말하긴 어렵지만 건너 건너 듣기로는 일반적인 번역료도 근 20년 전인 그때와 엇비슷한 수준으로 보인다.


그러면 혹시 몸을 갈아 넣어서 작업 시간을 늘리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아주 젊은 나이라면 모르겠지만 지속성에 한계가 있다. 번역은 의외로 체력이 중요한 일이다. 종일 똑같은 자세로 앉아서 머리를 쓰는 것은 종일 몸을 움직이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몸에 무리가 간다. 점점 자세가 무너지고 몸이 굳는다. 눈이 뻑뻑해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나이가 들수록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기가 힘들어진다. 그래서 무작정 작업 시간을 늘리는 것은 장기적 해법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인세 계약을 하는 것은 어떨까? 판매량을 기준으로 보수를 받는 방식이다. 작가의 경우에는 보통 10퍼센트 인세 계약을 맺는다. 책이 한 권 팔릴 때마다 정가의 10퍼센트를 보수로 받는 것이다. 보통은 계약 시점에 계약금조로 100만 원을 미리 받고(선인세) 분기나 연 단위로 정산한다. 작가와 달리 번역가는 인세 계약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애초에 출판사에서 제안을 안 하거니와 번역가 입장에서도 선뜻 수락하기 어렵다. 책이 안 팔리면 매절 계약보다 훨씬 손해기 때문이다. 인세 10퍼센트로 계약한 책이 정가 2만 원이라고 가정했을 때 1,000권이 팔리면 200만 원을 받는다. 보통 책 한 권을 번역하는 데 짧아도 두 달은 걸리니까 한 달에 100만 원을 버는 셈이 된다. 매출 1,000권이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실제로는 그만큼도 못 파는 책이 수두룩하다. 오죽하면 애초에 500부만 인쇄하는 경우도 있다.


번역가가 인세를 받는 경우는 대개 기획을 했을 때다. 좋은 외서를 발굴해 출판사에 출간을 제안하고 이를 출판사가 수락하면 일반적으로 매절 번역료 외에 기획 인세 1퍼센트를 추가로 받는다. 일종의 보너스인데 짐작하다시피 책이 어지간히 많이 팔리지 않는 한 유의미한 수익원은 안 된다.


혹은 고전을 번역할 때 10퍼센트 인세 계약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저작권이 만료돼 저자에게 인세를 지급할 필요가 없으니 그 돈을 번역가에게 주는 것이다. 그러나 고전은 같은 책이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오고 이미 출간된 책이 많기 때문에 역시 큰 매출, 따라서 큰 수입을 기대하긴 어렵다(단, 그렇게 인세로 번역한 책이 여러 권이라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긴 하다).


경력 초기에는 수입이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수입을 논하기 전에 당장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출판계에 어지간한 연줄이 있지 않은 한 무명 번역가에게 일감을 주는 편집자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런 번역가의 존재조차 모른다. 번역만 아니라 어떤 업종이든 프리랜서라면 겪게 되는 과정이다.


하지만 업계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고 번역료가 제법 오르면 마침내 ‘현타’가 온다. 나의 소득 잠재력이 여기서 끝이라고, 앞으로 은퇴할 때까지 이 이상은 벌기 어렵다고 생각하면 일할 맛이 뚝 떨어진다. 세전 500만 원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말했다시피 정말 이상적인 경우의 최대치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체력이 떨어지면 생산량이 줄어드는 만큼 현재의 소득조차 유지하기가 어렵다. 말했다시피 번역료는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인상되지도 않는다. 내가 노력하고 실력이 향상돼도 더 이상 소득이 늘어나지 않는다는 전망은 슬럼프를 부르기도 한다.


더욱이 프리랜서인 번역가는 직장인과 달리 고용보험에 가입되지 않고 퇴직연금도 없기 때문에 실직(일감이 장기간 끊겼을 때)이나 은퇴 시 안전망이 매우 부실하다. 비슷한 금액을 버는 직장인과 비교했을 때 실질적으로 소득이 훨씬 적다고 봐야 한다.


이런 면을 종합하자면 번역은 돈을 보고 할 일은 아니다. 역시 바른번역아카데미 시절에 현직 번역가 B선생님이 말했다. “고명 씨, 아직 젊으니까 웬만하면 다른 일 알아봐. 이거 돈도 명예도 안 따르는 일이야.” 그것을 나는 지금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어느 번역가든 공감할 것이다. 그렇다고 번역가가 된 것을 후회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일이고 또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번역가는 부유해지는 것을 포기해야 할까? 오로지 번역으로만 돈을 벌 생각이라면 그렇다. 번역으로 안정적인 생활은 가능할까? 딸린 식구가 없다면 가능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안정적으로 살고 싶거나 부유하게 살고 싶다면 번역 + 알파가 있어야 한다. 그 알파란? 나도 여전히 찾는 중이다.


다시 기도한다면 이렇게 간청하고 싶다. “일단 일은 할게요. 할 건데 돈 좀 팍팍 벌게 해주세요. 빨리 은퇴해서 그냥 취미로 일하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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