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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로 돈X랄을 해봤습니다

by 김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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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는 매일 번역가의 손이 가장 많이 닿는 장비다.


종일 발이 닿는 신발을 잘 선택해야 몸 전체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번역가는 키보드를 잘 선택해야 한다. 좋은 키보드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텐데 내 경우에는 효율, 타건감(치는 맛), 디자인이다. 이 기준에 따라 최근 10년간 사용한 키보드를 평가해보자면 이렇다.


1. 애플 매직키보드 (효율 하, 타건감 중, 디자인 상)

가장 오래 쓴 키보드다. 나는 2011년부터 맥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애플 키보드가 편했다. 단정한 만듦새와 고급스럽고 미니멀한 디자인이 좋았다. 하지만 본체가 워낙 얇다 보니 키가 눌리는 깊이가 매우 얕았다. 처음에는 톡톡 거리는 느낌이 좋았지만 몇 년을 쓰다 보니 그 반발감이 다소 불쾌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멀티페어링을 지원하지 않아 다른 기기에 연결하려면 매번 수동으로 기존 기기와 연결을 해제해야 하는 것도 번거로웠다.


2. 로지텍 MX Keys Mini for Mac (효율 중, 타건감 중, 디자인 상)

디자인과 타건감은 매직키보드와 대동소이하지만 멀티페어링을 지원하고 블루투스 외에 USB 동글로 무선연결이 가능하다는 차별점이 있었다.


3. 레노버 씽크패드 무선 트랙포인트 키보드(효율 상, 타건감 중, 디자인 하)

오래 전에 썼던 경험을 잊지 못해서 다시 구입한 제품으로, 다른 키보드와 달리 정중앙에 콩알 모양의 빨간 트랙포인트(일명 빨콩)이 달려 있어서 마우스 포인터를 조종할 수 있다. 그리고 하­단에 마우스 좌/우 버튼과 휠에 대응하는 버튼이 있어서 미세한 조종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웬만해서는 마우스를 쓰지 않고 마우스 작업을 처리할 수 있다. 내가 다시 구입한 이유도 바로 이 마우스 대체 기능 때문이었다.


번역가는 종일 사전이나 자료를 찾는다. 이때 앱이나 탭을 전환하고 링크를 클릭하기 위해 번번이 마우스로 손을 옮기는 것은, 내가 느끼기에는 무척 번거로운 일이다. 마우스를 안 쓰고 키보드로 대부분을 처리하면 훨씬 효율적이다. 그래서 나는 트랙포인트 키보드의 효율성을 상으로 평가했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나는 앱을 전환할 때도 단축키를 이용해 효율을 높인다. 예를 들면 이렇다(참고로 OPT는 윈도우의 ALT에 해당하는 키다).


OPT + C: 브라우저
OPT + V: 문서편집기
OPT + <: 영어사전
OPT + >: 국어사전
OPT + ?: 유의어사전
OPT + J: 영영사전


이렇게 단축키를 지정해 놓으면 앱을 전환하기 위해 마우스 포인터를 움직이거나 CMD + TAB(윈도우의 ALT + TAB에 해당)으로 앱 목록을 뒤질 필요가 없다. 맥에서는 키보드 마에스트로(Keyboard Maestro) 같은 앱을 이용해 이런 식으로 단축키를 만들 수 있다.


다시 레노버 키보드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 제품에는 두 가지 단점이 있었다. 하나는 공식적으로 맥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일반적인 맥용 키보드와 배열이 다르고 맥에서 흔히 쓰는 기능키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적응의 문제이므로 사소한 부분이었다. 정말 큰 문제는 다자인이었다. 내 눈에는 그냥 못생겼다. 전체적으로 넙데데하고 어수선하다. 타건감도 앞의 두 키보드와 비슷해 치는 맛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트랙포인트가 선사하는 효율 때문에 감히 바꿀 생각을 못 했다. 해피해킹의 신제품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4. HHKB 스튜디오

해피해킹키보드, 약자로 HHKB는 개발자를 위시해 IT 직군에서 유명한 키보드다. 각종 기능키, 화살표키 같은 것을 다 빼버린 간소한 배열이 특징이다. HHKB가 발표한 신제품은 스튜디오라는 이름으로, 정가운데에 검은색 트랙포인트가 박힌 제품이었다! HHKB 특유의 미니멀한 디자인을 유지하면서 레노버 키보드의 기능을 그대로 이식한 것이었다. 딱 내가 찾던 키보드였다.


하지만 가격이 문제였다. 관부가세까­지 합치면 약 50만 원! 위에서 언급한 제품도 모두 10만원대로 키보드치고는 비싸지만 욕심을 좀 낸다면 살 만한 가격이었다. 그렇지만 50만 원은 저렴한 노트북 한 대 가격이잖아?!


이럴 때 하는 말이 있다. 고민은 배송만 늦출 뿐. 과연 그랬다. 못생김을 참고 레노버 키보드를 쓰며 몇 달간 고민을 거듭한 끝에 아마존에서 HHKB 스튜디오를 주문했다. 어디까지나 일할 때 쓰는 거지만 아내에게 키보드에 50만 원을 쓰겠다는 말은 차마 꺼낼 용기가 없어서 용돈으로 샀다. 한 달에 30만 원을 받으니까 거의 두 달 치 용돈을 쓴 것이다.


그 정도 돈을 쓸 만한 가치가 있었다. HHKB 스튜디오의 점수는 효율 상, 타건감 상, 디자인 상. 100점 만점이다.


기능키와 화살표키가 없어서 FN키와 다른 키를 조합해서 써야 하는 것은 금방 적응해서 문제가 안 됐다. 트랙포인트는 원조인 레노버 것보다 부드럽게 움직였다. 검은색 본체에 검은색 키가 최소한으로 배치돼 있고 글씨마저 검은색으로 각인된 미니멀한 디자인은 내 취향에 완벽히 부합했다. 타건감? 적당히 깊이가 있는 키보드라 너무 반발력이 심하지 않고 도각도각 뭉툭하지만 심심하진 않은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사용한 지 1년이 지난 현재의 소감을 말하자면 50만 원을 쓴 것이 전혀 아깝지 않다. 안 그래도 얼마 전부터 가끔 눌러도 반응이 없던 C키가 결국엔 완전히 고장 나버렸을 때 혹시 수리가 불가능하면 새로 사느라 또 두 달 치 용돈을 날리게 생겼다고 혀를 찼을 뿐, 다른 기기로 갈아탈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다행히 C키는 키캡 아래의 스위치를 뽑고 마침 집에 있던 다른 키보드의 스위치를 대신 꽂는 간단한 작업으로 정상화됐다.


내 기준에서 효율, 타건감, 디자인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HHKB 스튜디오는 고장 나면 새 것을 사서라도 앞으로 10년은 더 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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