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hms Jul 12. 2021

한번 호구는 만인의 만인을 위한 영원한 호구가 된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데 나라고 참을 이유는 없다.

팀장, 사수는 나 몰라라... 안 할 수도 없고, 난 책임감 때문에 우선 한다. 그렇게 나는 어느덧 100 중에 150을 하고 있다. 인정은 커녕 이것도 보고서냐며 이 정도 밖에 못하냐며 핀잔을 듣는다.

얄미운 시키는 50도 안하는데... 나만 갈굼 당함. 그는 심지어 조금만 나서 칭찬 받는다.

일하는 놈 따로, 인정 받는 놈 따로다. 난 만인의 만인을 위한 호구였다.




나는 레알 호구였다. 본래 상대방의 눈치를 잘 보고, 거절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번개나 회식이 잡히면 디폴트 멤버였고, 남들 쉽게 내고, 쉽게 가는 연차 휴가 하나도 나에게는 쉽지 않았다. 회사나 부서 분위기 자체가 애초에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나의 사수는 얄밉게 회식도 쏙쏙 빠져 나갔고, 나는 늦게까지 야근을 하는 날도 개인적인 일 때문에 먼저 들어가는 경우도 많았다. 나라고 회식이 좋아서, 야근이 좋아서 했을 리가 있겠나. 더 큰 문제는 이런 패턴이 장기간 반복되면서 나의 의견은 묵살되기에 이르렀다.


“차장님, 혹시 저 오늘 저녁은 정말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그런데 한번만 빠지면 안 되겠습니까?”

“야, 니가 가긴 어딜가? 옴스, 빠져 가지고, 안 그러더니 요새 왜 그래?”

“차장님, 저 설계팀에서 접수한 계약서 검토 내용 정리 다 했는데 먼저 들어가봐도 괜찮을까요?”

“야, 다 일하는 거 안 보여? 너만 다 끝났으면 먼저 들어가는 거야?”


이리저리 회식에 끌려 다니면서 호구 잡혔으니 나에게 이득이 되는 게 있었냐? 없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나는 그저 항상 군 말 없이 부르면 참석해서 술자리를 즐겁게 해줄 도구였을 뿐이었다. 거기에 윽박지르기라도 당하면 항상 움츠러들고, 군말 없이 뒷걸음질 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나를 다루기 쉽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이용할 수 있는 존재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애초에 나를 아끼는 리더이고 상사였다면 그렇게 나를 대우했을 리가 없다.


설상가상 포인트는 이제 시작이다. 마초적으로 나를 하수인 부리 듯하는 그들이지만 성격이 더럽거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직원들을 건드리거나 그들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는 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퇴근하고 싶은 시간에 퇴근하고, 회식에서 참여하고 싶을 때 참여하며 술자리에서 원샷을 하지 않아도 압박을 당하지 않는다. 알고 보면 직장인들 대부분은 강자에게 한 없이 약하고, 약자에게만 한 없이 강한 전형적인 쫄보들이다. 직급이 깡패라고, 항상 자신의 눈치를 보고, 업무지시에 순응하는 나 같은 약자에게만 강한 모습을 보일 뿐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연말 성과평가였다. 1년 내내 술자리에 불려 다니고, 일도 없지만 팀장, 차장, 모든 팀원들의 업무마감을 함께 기다렸다가 12시에 퇴근을 했으니 기대가 있었다. 헛된 기대였다. 항상 이른 퇴근을 일삼고, 회식에 빠지기 일쑤, 술은 먹고 싶은 만큼 마시는 팀원이 진급을 앞두고 있으니 평가를 몰아주자는 게 골자였다. 나는 강하게 불만을 제기했지만 이해하라고 했다. 이미 내 의견은 안중에도 없고, 결정이 되어 있는 사안이었다.


나는 수풀 하나 없는 드넓은 아프리카 초원 한 가운데 덩그러니 혼자 서 있는 초식동물일 뿐이었다. 누구의 배려를 바랄 수도 없고, 누구든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인 군침 도는 사냥감이었을 뿐이다. 항상 고분고분 말을 잘 들으니, 업무 배분을 할 때에도, 부득이 안 좋은 성과를 줄 때에도 말로 타이르면 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옴스가 이해하자”, 다음에도 반복된다. “이번 일은 옴스가 좀 하자”, 내년에도 반복된다. “작년엔 그랬는데 올 해는 상황이 달라졌네. 한번 더 이해하자”


출처: MBC수목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 6화 중

(최반석 부장이 자신의 아이디어 뺏어간 한팀장에게 악다구니라도 써보라고 조언하는 상황)

어선임: 그런 걸 어떻게 해요.

최부장: 아, 그런 깡다구도 없이 뭐 어떻게 직장생활합니까. 응? 본인 밥그릇은 본인이 챙기는 거지. 이렇게 운다고 누가 챙겨주나. 울지말고, 힘내고.




한두번은 호구 잡힐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길어지면 영원한 호구가 될 수 있다. 헛된 희망을 갖고 기다려 보아도 누구 하나 내 밥그릇 챙겨주는 것에 관심 없다. 모든 직장인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내 밥그릇은 내가 챙겨야 된다.



옴스



http://blog.naver.com/darddong


이전 05화 내 일도 아닌 일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