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고통받는 건 오로지 자기자신이다. 조직은 합리적이지 않다. 각기 다른 생각과 주관을 가진 수십, 수백, 수천명의 사람들이 모여 자기 잘 났다고 떠드는 곳이 조직이다. 개개인은 조직을 지배하는 규칙과 시스템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행동하고, 정해진 기준과 절차에 따라 행동에 따른 보상을 받게 된다. 조직의 기본적인 구조와 원리, 개개인의 행동유인과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불만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창피하고 답답하기만 했던 엄빠의 절약정신과 잔소리를 나이가 먹어가면서 차츰 차츰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조직구조와 Hierarchy 이해하기
망고보드에서 직접 만든 이미지 (저작권 by 옴스)
각자의 업무는 달라도 모든 임직원들 업무의 목표는 한 곳을 향한다. 각자의 위치와 역할이 다를 뿐이다. 일반적으로 조직구조는 피라미드 형태를 띄고, 위로 갈수록 관리적 성격이 강해지고, 아래로 갈수록 실무적 성격이 커진다.
관리적 성격은 주요 의사결정을 통해 조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고, 리소스(Resources)의 투자와 배분을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파트장, 팀장, 본부장, 그룹장, 총괄 등 그 역할과 범위가 넓어질수록 의사결정의 중요도와 난이도는 높아지고, 결정에 따른 책임 또한 크게 진다. 실무는 조직 상부에서 결정된 전략의사결정에 따라 각 본부/기능 별로 세분화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주어진 일을 최대한 정확하고, 빠르고, 효율적으로 수행해내는 게 실무역량이다. '까라면 까'를 시전하는 working level의 최하단이다.
사회초년생들의 불만제기 뒤에 숨겨진 허점
사회초년생들의 가장 큰 불만 중 하나는 “대체 이 일을 왜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초년생들이 놓치는 잘못된 전제 2가지가 있다.
첫째 ‘회사는 틀리고, 내 생각이 맞다’는 전제가 깔린다. 물론, 내 생각이 실제로 맞을 수도 있고실무를 하는 입장에서 불만을 표출하는 것은 권리 중 하나다. 하지만, 내가 정말 맞는지 틀렸는지는 결과를 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내 입장에서야 내 의견이 중요하지만 내 의견만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렇게 치면 내 의견이 중요한 만큼 전사 임직원들의 의견도 소중하다. 역지사지로 자신이 1,000명의 직원을 이끄는 본부장이라고 생각해보자. 1,000명 직원을 이끄는 조직장이 되었을 때에도 실무자들의 의견을 일일이 들을 자신이 있는가?모든 임직원들의 개인적 불만과 평가를 들어가면서 의사결정을 하다가는 어떤 일도 제때 할 수 없다. 우리는 과도한 주관적 감정에 기반해 내가 아니면 틀렸다는 아집을 주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둘째, “옴사원, 그럼 옴사원 의견대로 우리 이번 마케팅 프로모션은 Facebook에 몰빵하는 걸로 하고, 그에 대한 결과는 옴사원이 책임질 수 있는 거지?” 라고 물었을 때 “그렇다”라고 답변할 수 있는 초년생은 없다. 내 말은 듣고, 책임은 너가 지세요. 라는 의미와 다름없다. 앞서 설명했지만 관리자는 의사결정을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진다. “MZ세대와의 대통합을 위해 호봉제를 폐지하고, 연봉제로 바꾸는 게 맞죠!!”라고 얘기하는 것은 쉽겠지만 이러한 계획을 발표하는 순간 터져 나오는 전직원의 불만과 노조의 반대를 뚫어낼 자신이 있는가? 삼분오열하는 조직 분위기를 수습하고, 임직원들의 화를 진정시키고, 설득해낼 자신은 있는가? 만약 리더가 이런 의사결정을 내렸고, 조직의 반발에 부딪혀 임직원들의 심기만 건드려 조직을 분열시키고 통과도 못 시켰다면? 그 리더는 옷을 벗는다. 그게 관리자의 역할이자 의사결정에 따른 책임을 진다는 의미다. 나는 정말 의사결정에 따르는 책임까지 충분히 고려하면서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번지수도 잘못 찾았다.
그리고, 보통 그런 의사결정은 나 같은 평사원들이 부대끼는 사무공간에서 이뤄지지 않는다. 높으신 분들끼리 높으신 분들의 방에 모여서 굵직굵직, 큼지큼직한 의사결정을 한다. CFO는 CEO의 지시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고, 실장, 그룹장은 CFO의 지시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며 실장, 그룹장은 다시 부서장, 팀장들에게 업무를 지시한다. 아무리 내가 사무실에서 볼멘소리를 해봐야 부서장, 팀장들도 위에서 내린 결정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나랑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책임은 하달 받은 지시를 누구에게 업무를 어떻게 배분해서, 어떤 방식으로 처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정도이다.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항의는 업무배분이 공정하지 않다, 나의 인사평가기준이 업무성격에 맞는 것 같지 않다, 출퇴근과 근태 사용에 불만이 있다 정도일 뿐이다. 아무리 회사가 왜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식으로 사사건건 회사의 전략적 의사결정을 판단하고 평가해봐야 그들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내 목숨 줄, 밥줄을 쥐고 있는 윗분들에게 가서 "제 팀원들이 힘들어 합니다! 재고해주시죠!"라고 할 수 있을까... 없다. 같이 열심히 까자라는 말 말고는 할 수 없는 팀장, 사수, 팀원들 앞에서 종일 쓸데 없는 불만을 토로해 봐야 돌아오는 것은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소화불량, 탈모, 불면증 등등의 각종 side effects뿐이다.
짬이 찰수록 의사결정 권한은 많아지고, 그에 따른 책임 또한 무거워진다. 퇴사를 하기 전까지는 그 책임과 무게감은 결코 줄어들지 않고, 갈수록 가파르게 상승한다. 팀장들도 물러설 곳이 없다. 위에서는 조인트 까이고, 아래에서는 팀원들의 불만소리가 들리지만 내 집, 내 가족, 내 삶을 지키려면 존버 말고는 선택지가 없다. 최근 들어 중간에 끼인 40대의 스트레스가 최고조에 다다른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이제는 역발상의 시간. 실무자가 개꿀인 진짜 이유.
사실, 회사는 내 게 아니다. 정확히는 주주의 것이다. 애초에 나는 정해진 직무와 자리에서 정해진 기준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고, 정해진 기준에 따라 급여를 받기로 약속되어 있다. 회사가 잘되든 안되든 정해진 기본급과 기타 복지수당들은 100% 지급된다. 애초에 회사는 자신을 위하고, 고민해달라고 한 적도 없다. 대주주가 선임한 Top Management의 의사결정에 따라 세분화되어 분배된 업무들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나의 역할은 충분한 것이다. 피라미드 최상단에 들리지도 않을 회사 의사결정에 대한 불만이나 평가는 네이버 증권의 종목게시판이나 블라인드에서 풀면 된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의사결정이 번복되지는 않는다. 그 일이 비현실적이건 어떻건 간에 그냥 주어진 시간 만큼 일을 해주는 것, 그게 나의 소임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주어진 일을 정해진 시간과 자원 내에서 효율적으로 수행해 효과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실무자의 역할이고 실무자의 역량이다.
물론, 아닥하고 꾹꾹 참고 일만하자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 속 배우의 발연기를 보면서 느끼는 안타까움과 수백억이 투자된 졸작 영화를 보면서 그 손익을 내가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나는 재밋으면 보고, 마음에 안들면 시원하게 욕이나 한번 해주고, 지나가면 그만이다. 실무도 마찬가지다. ‘책임지지 않을 수 있다’는 실무자의 특권을 활용해서 잔뜩 의견을 던지되 과하게 몰입하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나는 의견을 전달했는데 팀장이 수용하지 않았고, 결과가 좋지 않았다? 내 의견을 수용하지 않은 윗사람 책임이다. 내 의견을 수용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내 의견을 수용한 윗사람 책임이다. 최종 결재자는 그 윗사람이기 때문이다. (결재를 잘 올리는 게 중요한 이유) 내 의견을 수용해서 일을 추진했는데 잘 됐다? “거 보세요. 제 말이 맞죠?”라고 잔망스럽게 내 탓이라고 자신 있게 얘기하고, 연말평가 때 으스대면 된다.모로 가도 개이득이다.
세상 모든 팀장, 임원들은 년차가 올라갈수록 표정이 굳어지고, 매사 심각해지고, 꼰대가 되어 있는 모습을 회사에서 빈도 높게 목격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을 이해해볼 생각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겟지만 사실 그들도 어떤 면에서는 불쌍한 부분이 있다. 왜냐, 집에는 부양해야 될 가족들이 있고, 자신의 의사결정 하나하나에 승진과 재계약 여부가 달려 있는데 뭐 하나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게 없다.
초년생들은 하루 빨리 의사결정 권한을 갖고 싶다고 입사 전부터 꿈을 꿨겠지만 그때야 말로 관리자들의 그늘 아래서 실무자의 특권을 누리고 꿀 빨 수 있는 마지막 시기다. 해달라는 일 해주고, 관리자들의 우산 아래서 결과를 관전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실무의 즐거움은 기간한정이다. 철없이 부모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으로 옷 사고, 맛집 탐방, 해외여행 다니는 것도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시절에만 가능하다.
나이가 먹을수록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삶의 무게는 갈수록 무거워진다. 조직생활도 그렇다. 가장 가볍고, 가장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시기가 신입사원, 초년생 실무자 때다. 짧게는 20년, 길게는 30년까지 해야 될 회사생활인데 뭐가 그토록 조급하고, 답답한가.
내가 다시 신입으로 돌아간다면 새로운 업무, 더 많은 업무에 눈길 조차 주지 않을 것이다. 주어진 일만 최대한 열심히 하고, 윗분들의 의사결정일랑 눈꼽만큼도 관심 주지 않고, 나의 칼퇴근과 주말 드라이브 코스를 짜는데 심혈을 기울일 것이다. 짬 차고 후회하지 말고, '기간한정' 신입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