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hms Jun 17. 2021

S급 인재들은 왜 비서실에서 잡일을 할까

가벼운 일을 가볍게 보지 않는 묵직한 책임감이 리더를 만든다


샐러리맨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엘리트 코스가 있다. 그룹사의 전사 전략실 또는 최고임원 비서실로 가는 것이다.


가고 싶다고 지원할 수도 없고, 마냥 기다린다고 기회가 오지도 않는다. HR팀에서 핵심인재로 분류된 일부 인원들을 대상으로 철저한 Reference 체크와 까다로운 검증과정을 거쳐 극소수의 인원만에게만 그 기회가 주어진다. 멀리서 보기에는 화려해 보이는 일이지만 전사 핵심인재로 손꼽히는 이들이 비서실에서 수행하는 업무는 임원의 뒤치다꺼리처럼 느껴진다. 당일에 있을 주요 미팅일정과 참석자, Agenda 확인은 기본이고, 식사장소 예약과 메뉴, 좌석배치도 확인, 그리고, 귀빈을 모시기 위한 배차부터 픽업, 이동동선 하나까지 확인해 분 단위로 일정을 관리한다. 남들은 진작 퇴근해 혼맥을 즐길 시간에 1분 대기조의 긴장상태에서 무한대기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필자도 B2B수주 해외영업에서 사장단 미팅을 주선해야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번 미팅이 성사되면 몇 주간은 행사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했다. 해외 귀빈들의 직급부터 이름 스펠링, 오찬/만찬 코스메뉴, 항공편 코드, 비행기 도착시간 하나까지 수도 없이 재차 확인하고, 또 확인하면서 일정표와 미팅자료를 수정하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대체 왜 이렇게 유난을 떨고 오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업과 조직 관점이 아닌 개인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절대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다. 나도 젊은꼰대의 문턱에 들어서고 나서야 그 의미를 겨우 헤아릴 수 있었다.


관점을 바꿔보자. 연봉 10억을 받는 CEO가 쓰는 한 시간, 하루의 가치는 일반 직원의 시간과 의미가 다르다.  물론, 밥 많이 먹고 오래 다녔다고 주는 돈이 아니다. 주어진 역할과 책임이 다르다. 나는 하루를 꼬박 투자해서 주월간 실적집계와 추이를 분석하는 게 일이지만 CEO는 연 매출 수천억원을 좌지우지하는 주요 고객사의 CEO, 최고임원을 만나 밥을 먹는 게 일이다. 가볍게 보면 나이든 아재들끼리 밥 먹고 떠드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Business에 대한 이야기 보다 가벼운 대화가 80% 이상이다.) 1년에 한번 성사되기도 힘든 1시간 남짓의 사장단 미팅에서 수천억원 규모의 수주가 결정된다고 생각하면 상대편의 표정과 심기, 기업의 전략부터 동향, 자사의 문제점과 니즈까지 무엇 하나 사소하게 보고 넘길 게 없다.


완벽하지 못한 의전과 엉성한 준비는 우리회사의 수준으로 비춰질 것이고, 현재 프로젝트 진행상황과 주요 이슈 하나 제대로 체크하고 있지 못한 CEO는 상대편 입장에서 우습게 보일 수밖에 없다. 또한, 상대 임원진의 주요 커리어와 업적, 취미생활, 학적 등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파악할 수 있다면 공감대를 이끌고, 심리적 교감을 이루기도 용이하다. 비서실 혹은 의전 과정에서 내가 수행하는 일 자체만 보면 무의미해 보이는 것들 하나하나가 쌓여 우리 회사의 격을 높이고, 최고임원과 경영진이 짧은 미팅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상대방을 공략하고, 압박할 수 있는 무기를 손에 쥐어 줄 수 있는 일인 것이다. 10년 간 거래를 이어온 최대 거래처에서 갑작스런 계약해지를 통보해왔는데 어떤 임원이 “밤 11시니까 내일 아침에 합시다”라고 얘기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사장이라면, 당신이 주주라면 그를 태평하다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인정 받는 이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일에 대한 투철한 책임감이 있다는 것이다. 단순하고, 사소한 일을 맡겨도 꼼꼼하고 신속하게 해낸다. 그 하나, 하나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무엇을 맡겨도 책임감 있게, 오차 없이, 정확하게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만큼 불필요하게 신경 쓸 일이 줄어들고, 자신이 해야 될 의사결정과 다른 업무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자신이 잘나고, 뛰어나며 내 인생과 내 삶이 소중하다는 자아도취에 빠진 직원들은 짬이 찰수록 주변에서 찾지 않는다. 연차와 직급이 올라갈수록 감당해야 될 의사결정의 크기는 커지는데 조직 보다 자신의 안위를 더 챙기는 이를 요직에 앉힐 수는 없다.


나는 부서에 앉아 투털대며 일을 고르고, 퇴근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S급 인재들은 그렇게 중역들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사소하고 별 볼 일 없어보이는 일을 맡으며 일의 의미와 중요성을 배워간다. 그들도 처음부터 순순히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피곤하고, 힘들고, 현타도 세게 온다. 다만, 본인들의 생각과는 달랐던 반강제적인 하드 트레이닝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을 대하는 태도와 관점이 변화되고, 현안을 파악하고 대처하는 속도가 달라진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일에 대한 강한 집념과 책임감, 그게 바로 S급 인재들이 리더로 성장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물론, 모두가 사소하고 잡다구리한 업무에 최선과 열정을 다하고, 무조건 조직이 개인에 우선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조직은 책임감의 무게를 아는 이에게 더 큰 중책을 맡길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자신이 회사생활에서 성공하고, 인정 받기를 원한다면 회사생활에 대한 관점을 바꿀 수 있어야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일 뿐이다. 인생은 Birth와 Death 사이의 Choice라는 명언이 있다. 적당한 회사업무와 적당한 나의 삶이라는 밸런스를 유지하면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다.


필자도 혈기왕성한 신입시절엔 내 인생을 갈아넣고 회사에서 인정 받아 멋진 중역이 되는 상상을 했다. 처음에는 수만명의 직원들을 이끌고 진두지휘하는 슈퍼멋진 모습만 생각했을 뿐 수십 년간 끊임 없이 단련되고 반복된 Choice에서 책임감을 따랐다는 점을 간과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내 삶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나의 회사생활 목표는 무엇일지. 회사생활에서 인정 받을 수 있는 진짜 탁월함이란 게 무엇인지. 나는 정말 주변에서 인정 받을만한 탁월함을 갖고 있는지. 각자 생각해볼 문제다.




Ohms



p.s. 카톡 채널이 개설되었습니다.

http://pf.kakao.com/_CtiT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