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포케 Dec 18. 2023

상자가 정말 무거워!

추수감사절

  '푸드랜드가 가성비 제일 좋아 보이는데?'

  11월이 된 첫날, R과 나는 추수감사절 음식을 주문하기 위해 여러 업체의 음식 구성과 가격을 찾아봤다. 

  추수감사절 메인 요리에 사이드 메뉴가 포함되어 있는데 대체로 4인분으로 시작해 10~12인분 까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기며 먹을 수 있도록 넉넉하게 구성되어 있다. 2~3인분 정도로 구성된 메뉴는 찾아보기도 어렵고 추구감사절에는 우리나라 명절처럼 명절 음식을 하루종일 그리고 다음날까지도 먹는다고 하니 넉넉하게 3~5인분으로 준비된 요리로 주문했다.


  홀푸드, 푸드랜드처럼 식료품 체인점에서 일반 음식점 그리고 고급 레스토랑까지 그들만의 추수감사절 구성품이 있고 예약 주문을 할 수 있는데 어떤 고급 레스토랑은 11월 초임에도 벌써 예약 주문이 마감된 곳도 있었다.

  

  짙은 회색 하늘에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추수감사절 점심시간, R과 나는 주문한 음식을 찾으러 알라 모아나 몰에 있는 푸드랜드로 향했다. 일주일 이상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중의 하루였던 그날은 쌀쌀한 공기에 정도의 바람까지 불었다.

  함께 간 복실이와 나는 푸드랜드 뒤편으로 난 길을 좀 걸었고, R은 추수감사절 음식을 찾으러 갔다. 


  '나 지금 푸드랜드 앞이야. 우리 음식이 든 상자가 생각보다 너무 무거워서 트렁크에 넣어 놓고 다시 마트 앞으로 왔어!'

  오잉? 그렇게나 무겁다고?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양이 더 많은가?

  R의 전화를 받고 궁금한 마음에 복실이와 마트 앞으로 냉큼 돌아갔다.


  매주 목요일은 빨래하는 날. 2시간 정도 걸리는 빨래 건조기를 돌려놓고 점심시간에 음식을 찾아오면 바로 식사를 할 요량으로 오후 12시에 픽업 예약한 우리는 집에 도착해 추수감사절 음식이 잔뜩 든 무거운 상자를 들고 긴 담벼락을 지나 현관문을 열고 바닥에 내려놓고 기대감으로 상자를 열었다.


  '뭐야 이게..?'

  영어가 잔뜩 써진 A4 용지 아래로 쌓여 있는 음식은 누가 봐도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냉동 완제품들로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있었다.


  '어쩐지 상자가 너무 차갑더라..'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진 그들이 직접 조리한 요리를 냉장고에 보관해서 차가워진 음식을 데워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R은 상자가 유난히 차가웠던 이유를 알고는 헛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추수감사절 음식을 주문한 건 처음인 R은 식당에 포장 주문하면 조리된 음식을 포장해 주는 것처럼 식료품 점도 같은 식일 줄 알았던 거다. 더군다나 푸드랜드는 샐러드바처럼 직접 조리한 샐러드와 간단한 요리들도 판매하고 있기에 R과 나는 이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냉동식품 플라스틱 용기를 차례대로 꺼낼 때마다 헛웃음이 멈추질 않았고, A4 용지에 적힌 냉동 칠면조를 조리하는 법을 읽으며 거의 둔기에 가까운 무겁고 단단한 칠면조 표면에 올리브유를 바르다 보니, 푸드랜드 추수감사절 음식 구성이 다른 곳에 비해 가격이 왜 합리적이었는지를 깨닫는 과정일 뿐이었다.


  거의 한 시간 반이 소요되는 냉동 칠면조 조리를 하는 동안 그레비 소스, 매쉬 포테이토, 칠면조 속을 채우는 스터핑을 데웠다. 칠면조 가슴살 부위만 있어서 속을 채우기 어려웠기 때문에 스터핑은 따로 데워서 사이드 음식으로 먹었다.

  그렇게 점심에 추수감사절 음식을 맛있게 먹을 걸 기대하면서 아침부터 공복이었던 R과 나는 차디 찬 냉동 음식들을 데우다 이미 건조가 끝난 빨래도 가져와야 했고, 오후 3시가 돼서야 식탁에 앉을 수 있었다. 


  '음? 나쁘지 않은데?'

  플라스틱 용기에서 꺼낸 냉동식을 따듯하게 데우고 접시와 그릇에 담아 놓으니 그럴듯한 명절 음식 구색이 갖춰졌고 허기진 배는 난리가 났다.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아서였을까. 맛도 나쁘지 않았다.

  삶은 닭가슴살, 삶은 단호박을 섞은 복실이의 특식까지 준비가 끝나니 우리 가족의 첫 번째 추수 감사절이 시작 됐다.


  칠면조를 조리하고 남은 오븐 잔열로 차가운 호박파이가 데워지면서 향신료가 섞인 달큼한 호박파이 냄새가 주방을 채우기 시작할 때, 생각보다 괜찮은 음식을 먹으며 우리가 처음 이 냉동 간편식 플라스틱 용기를 발견했을 때 얼마나 당황스럽고 웃겼는지 떠들며 식사를 이어갔다.

  내가 따로 준비한 샐러드까지 곁들여 먹으니 많이 허기졌던 거에 비해 금방 배가 찼다. 그렇게 접시 한가득 담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따듯하고 달달한 호박파이까지 먹으니 시간은 벌써 오후 5시에 가까워졌다. 


  R은 많이 들떠 보였고 즐거워 보였다.


  배가 너무 고팠지만 우리의 첫 추수감사절을 기념하고 싶었던 R과 나는 식사 전 사진도 몇 장 남겼다.

  'R은 행복하겠다~'

  작년, 여자친구 가족들과 함께 추수감사절을 보내려 하우스 메이트도 외출한 텅 빈 쉐어 하우스에서 홀로 명절을 보낸 R을 아는 엄마는 내심 마음이 쓰였는데, 올해 추수감사절은 풍성한 음식과 웃고 있는 우리의 사진을 보며 가족과 함께 명절을 보내는 R의 모습이 행복해 보였나 보다.


  먹고, 미식축구 경기 보고, 낮잠 자는 게 추수감사절에 할 일이라고 말하던 R이지만 미식축구를 즐기지 않기에 식사 후 한국 영화 한 편을 봤다.

  흐린 날씨와 이른 일몰 덕에 오후 5시부터 어둑해진 바깥은 벌써 쌀쌀해진 공기에 두꺼운 담요를 덮고 R과 5년을 함께한 쇼파에 앉아 본 영화 한 편은 이상하게 한국에서 보내던 추석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쌀쌀해진 공기 덕분일까.


  다 먹는데 거의 일주일이 걸린 커다란 칠면조. 너무 달았던 호박파이는 거의 2주일이 걸렸나 보다. 매쉬 포테이토 두 팩 중 한 팩은 뜯지도 않고 지금도 냉동실에 보관되어 있다. 


  내년 추수 감사절은 어떠려나. R과 나는 푸드랜드 추수 감사절 음식을 정말 맛있게 잘 먹었지만 내년에 또 주문할지는 모르겠다. 우리가 재 주문을 하지 않는다면 그건 아마도 너무 다디단 호박파이 때문일 거다.

  

이전 25화 창문을 열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