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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포케 Dec 14. 2023

창문을 열면

우기 1

  외부 자극에 취약한 게 좋을 때도 있다. 일 년 내내 온몸으로 계절을 즐길 수 있기 때문에. 답답하고 괴로울 때면 다음 계절로 넘어가는 환절기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며 위로를 얻고 끝을 알 수 없는 텁텁한 길 위에 다시금 설 수 있게 했다. 습기와 더위로 모든 걸 녹여버릴 듯한 여름 후에 어김없이 차가운 공기로 콧속을 건조하게 해 줄 가을이 온다는 것 만으로 여름은 그저 끝이 있는 과정이라는 걸 알기에 버틸 수 있고, 때론 그 무성한 초록을 즐기기도 한다. 모든 걸 무르익게 하는 가을을 기다리며.


  한국을 떠나면서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언제나 위로받던 다양한 모습의 계절을 보고, 맡고, 들을 수 없다는 것에 깊은 슬픔을 느꼈다.

  '언제쯤이면 다양한 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기약 없는 만남을 기다리는 것. 그리워하는 것 말곤 방법이 없어 보여.


  '거의 일주일 넘게 하루종일 비가 내리네?'

  일 년 내내 온화한 하와이는 계절에 상관없이 한낮에는 쏘아붙이는 볕에 따갑도록 덥다가 해가 저문 저녁이 되면 조금 선선해지는 기후가 지속되는 줄 알았다.

  우기인 지금도 한낮에는 여전히 꽤나 덥지만 한 여름의 더위와는 다르다.

  특히나 시원한 비가 일주일 넘게 내린 후, 요즘은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해서 집에서도 양말을 신거나 남방을 걸치기도 한다. 그러면서 전혀 기대하지 않던 가을이 오는 환절기 냄새를 이른 아침 거실 창문을 열 때 맡을 수 있게 됐다.

  만날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오랜 친구를 만날 기대감으로 아침마다 창문을 연다. 밤새 내린 비로 차가워진 공기를 콧속 가득히 들이마시며 풍경이라곤 옆집과 구분하는 담 밖에 없는 창문 앞에 잠시 서서 담 위로 뻗은 촉촉해진 나무와 이름 모를 식물을 쳐다본다.


  아직 잠든 R을 뒤로한 채 조심히 침대방 문을 닫고 나와 나를 따라온 복실이를 보며 '오늘 아침 날씨가 쌀쌀하네.'라고 말하는 입가엔 잔잔한 미소를 띤다.

  한국에서부터 사용하던 겨울용 베이지색 털조끼를 입은 복실이는 동그랗고 반짝이는 까만 눈으로 바라볼 뿐이지만, 혹시 몰라 버리지 않았던 베이지색 털조끼를 입은 복실이를 보니 우리가 함께 한 지난가을과 겨울이 떠오른다.

  

  엄청나게 내린 함박눈으로 무릎까지 빠질 만큼 눈이 쌓인 날 태어난 나는 처음으로 눈이 없는 겨울을 맞이한다. 하지만 쌀쌀해진 하와이 아침 공기를 맡으며 한국의 가을과 겨울을 너무 그리워하진 않을 있을 것 같다.

  시원하게 내리는 비도 한 동안 볼 수 있으니 거기서 위로를 얻는 것도 괜찮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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