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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포케 Dec 11. 2023

3kg에 26달러

김치

  R은 이 집으로 이사 오기 전, 한 명의 하우스 메이트와 쉐어 하우스에서 살았기 때문에 짐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짐을 최대한 줄여서 이사 온 나 역시 살림살이라곤 자그마한 믹서기 하나 겨우 챙겨 온 게 전부였기 때문에 우리는 필요한 살림살이와 냉장고를 채울 음식들을 틈날 때마다 사 모아야 했다.


  '자기야, 우리 김치 가격부터 확인해 볼까?'

  하와이로 이사오기 전부터 이렇게나 다양한 김치를 더 이상 넉넉하게 먹지 못할 거란 생각에 심난했다. 특히나 파김치에 미친 자인 나는 한국에서 먹을 수 있는 최대의 파김치를 양껏 먹어뒀다. 하와이 도착 둘째 날, R과 나는 한인 마트인 팔라마마트로 향했다.


  '오? 가격 나쁘지 않은데?'

  무서운 하와이의 물가를 생각했을 때 나쁘지 않은 포기 배추김치 가격. 망설임 없이 두 손으로 김치통을 번쩍 들어 장바구니에 담았다. 투명한 플라스틱 통에는 팔라마 포기김치라고 표기되어 있다. '직접 담그신 김치일까?' 마트 안에 자그마한 푸드코트의 조리 공간이 있기 때문에 짐작만 할 뿐이다.

  뭐 대단한 걸 발견한 것처럼 3kg 김치 통을 들고 뿌듯한 발걸음으로 마트를 나섰다.


  '우리 김치 한 통을 거의 한 달 동안 먹는 것 같아.'

  크고 작은 크기의 배추김치가 4쪽 들어 있는 3kg 김치는 우리가 한 달 조금 안 되는 기간을 버티게 해 줬다. 가끔 김치찌개가 먹고 싶을 땐 과감하게 김치 한쪽을 넣고 끓여 먹기도 했다. 포기김치 가격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한 달 생활비를 모두 합친 걸 생각했을 때 매달 26달러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부담됐다. 이 생각을 하게 된 이후로 배추김치를 더 작은 크기로 자르고 아주 작은 크기의 김치 조각(조각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하나도 허투루 버려지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식사할 때마다 김치 조각을 세어 먹는 것도 한 두 달이지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을 해봐도 다양한 선택지는 없다. 돈을 지불하고 완제품을 먹는 대신 노동과 시간을 지불하는 방식을 택했다.

  매해 봐왔던 김장김치 철 덕분에 배추김치는 공정이 매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 선뜻 시도초자 못했지만 비교적 쉬운 오이김치나 섞박지에 도전해 봤다.


  '뭐야, 나 김치 만드는데 재능 있는 거야?'

  김장김치 때 엄마 옆에서 깨작깨작 돕던 것 말곤 직접 어떠한 종류의 김치도 담아 본 적 없던 사람치곤 첫 번째 결과물인 섞박지가 정확히 국밥집에서 먹던 그 섞박지로 나와서 깜짝 놀랐다. 물론, 유튜브에서 찾은 레시피를 흉내 낸 거지만 정확한 레시피를 고른 나의 안목에 박수를!

  5달러 안팎으로 한 달치 섞박지 먹을 수 있으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만들어야지. 아, 무는 한국 무로 세일할 때만 사기 때문에 조금 더 합리적인 가격으로 만들 수 있다.

  벌써 여러 번 만들어 본 섞박지는 요령이 생겨서 후다닥 만들 수 있게 됐다.

  오이김치를 좋아하는 R을 위해 한 번 만든 적 있는데 요즘은 도통 못 만들고 있다. 일본 오이의 가격이 많이 오른 상태라 언젠가 적정한 가격대가 되면 다시 만들어 보려 한다. 그때는 생양파를 못 먹는 R을 위해 양파 양을 줄여야지. R을 위해 만든 오이김치였지만 생양파 맛이 많이 난다며 잘 못 먹었다. 레시피보다 적게 넣었는데도 양파를 좋아하는 내가 만들어서 그런지 R에게는 여전히 많았나 보다.


  적당히 익은 김치보다 더 익은 약간 쉰 김치를 좋아하는 R과 나는 김치 취향이 같아서 다행이다. 김치 통을 따로 만들 일도 없으니. 갓 만든 무, 오이, 배추김치 모두 실온에서 하루 반만 두면 완벽하게 익는다.

  그래서 무, 오이김치는 한 시간 안팎으로 만들고 하루 반만 기다리면 되는데 배추김치는 배추를 반나절 동안 미리 절여야 하는 공정이 있어서 훨씬 손이 많이 가고 시간도 오래 걸려 한 번 만들려면 큰 각오가 필요하다. 그런 수고로움 때문에 다른 채소 재료를 생략하고 절인 배추만으로 만드는 세상 간단한 레시피를 골랐는데도 배추를 꼭 절여야 하는 공정은 간소화하기 어려워서 그런지 여전히 손이 많이 간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인생 첫 배추김치는 생강 맛이 약간 강하게 나지만 걱정했던 거 보단 잘 나와서 뿌듯하다. 특히 라면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맛이다.

  배추 두 포기로 만든 김치는 15달러 안쪽. 더 많은 양을 더 적은 금액으로 먹을 수 있게 된 배추김치를 왜 지금도 아껴 먹고 있는 걸까.

  사실 반찬으로 먹는 배추김치는 사 먹던 김치보다 더 작은 크기로 자르고 있는 것 같다. 하하.

  지금은 다른 의미로 아껴 먹게 된 배추김치.


  엊그제도 잔뜩 새로 담근 섞박지. 섞박지야 네가 있어야 배추김치를 천천히 소진할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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