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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포케 Mar 25. 2024

우와! 저것 봐 자기야!

비숍 박물관 1

  4년째 구글지도에 '가고 싶은 장소'로 저장되어 있는 이곳을 언제쯤 R과 함께 갈 수 있을까.

  하와이로 이사 온 이후에도 가고 싶은 곳이 생겨서 새로운 장소를 저장할 때마다 보이는 오래된 바람을 '언젠간' 가겠지.라는 마음으로 들여다보다 적당한 기회가 생겼다.


  '우리 그럼 비숍 박물관 가볼까?'

  R의 이번 가을 학기의 끝은 2023년의 끝자락이기도 하며,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긴 학사 과정의 끝이다. 그래서 명분은 '모든 과정을 무사히 끝마친 자랑스러운 너를 위해, 그런 너를 위해 기꺼이 수고한 나를 위한.' 거창하기 그지없는 이유를 세워야만 갈 수 있는 곳은 아닌데 말이지. 그런데 가끔은 상황을 어렵게 만들거나 뜸을 들여 시기를 기다리면 애틋함이 더해지는 게 좋다.


  성인 한 사람당 25달러 정도의 입장료가 있는 비숍 박물관의 티켓을 인터넷에서 미리 구매했다. 정가는 30달러가 넘는데 시기적으로 운이 좋았는지 쿠폰혜택을 받아서 조금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었다.

  

  '나 그럼 점심으로 스팸무스비 도시락으로 준비한다!'

  R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야외활동으로 지출이 생기면 끼니를 도시락으로 준비하거나 집에서 식사하려고 한다. 식비라도 아끼고 싶은 마음에.

  폴리네시안의 역사와 생활을 볼 수 있는 박물관이라기에 하와이에 처음 방문 했을 때부터 가보고 싶었던 비숍 박물관의 리뷰 사진을 보니 꽤나 넓은 곳 같아서 2시간이면 넉넉하게 관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전날 밤 예약 취사 해놓은 전기밥솥의 알람 소리가 침대방 문으로 넘어온다. 달큼하고 촉촉한 흰쌀밥 냄새에 먼저 깬 잠이었지만 더 이상 뭉그적 거릴 수 없어 일어나 창문 하나 없어 아침에도 동굴같이 어두운 주방 불을 '탁' 켠다.

  처음 만들어보는 스팸무스비가 잘 나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무스비틀을 대신한 빈 스팸캔으로 밥의 모양을 잡고 데리야끼소스에 졸인 뜨끈한 스팸을 올리기 전에 볶음 김치도 얹어 준다.

  다 만들고 나니 얼추 맞는 시간. 그 사이 R도 일어나 외출 준비를 한다. 우리가 평소와 다르게 분주하고 옷을 갈아입으면 복실이도 덩달아 바빠진다. 우리가 외출할 걸 알고 설렘 반 걱정 반인 복실이에게 삶은 단호박과 간식으로 꽉 꽉 채워 얼린 빨간 콩을 주고 집을 나선다.


  쾌청하고 선명한 하늘에 쨍한 볕.

  비숍 박물관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주차장이 널널하다. 평일 오전이라서 그런 걸까. 그늘에 주차한 후 박물관 쪽으로 걸어가다 보니 젊은 커플이 어떤 기계 앞에서 뭔갈 하고 있다.

  설마. 는 그 기계에 가까워질수록 확신으로 바뀌었다. 주차비는 별도. 언제쯤이면 이놈의 주차비 별도에 익숙해지려나.

  주차티켓을 운전석 앞 공간에 잘 보이도록 놓고 온 R과 드디어 비숍 박물관 입구 문 열고 들어가니 직원이 온라인 예매표를 확인한 후 놀이공원에서 채워주는 종이 팔찌를 채워준다.

  들뜬 마음으로 기념품 샵 겸 출입구로 사용되는 공간을 지나 산뜻한 초록 잔디밭 뒤로 거친 질감의 회색빛 벽돌로 지어진 웅장한 박물관이 보인다. 박물관 앞에서 열심히 기념사진을 찍는 중년의 커플을 뒤로하고 들어선 입구엔 세 개의 다른 전시장으로 이어진 또 다른 입구가 보인다. 메인 전시회장을 들어서니 탁 트이면서도 높은 층고의 전시공간에 폴리네시안의 역사가 시작된다.

  여러 언어로 무료 오디오 해설 서비스가 된다는 걸 조금 더 일찌감치 찾았다면 영어 해설을 일일이 사진 찍어 번역하는 수고로움을 덜었을 텐데. 이상한 고집이 있어서 한국에서도 미술관을 가더라도 작품과 작품 해설을 모두 읽는 습관이 다른 나라라고 달라지지 않네.

  무튼 첫 번째 공간을 지나니 '우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의 규모의 전시장을 본 눈엔 이미 흥미로움으로 가득 찼다. 진한 갈색의 목재로 지어진 내부는 차분하지만 자연광이 들어오는 높은 천장 덕분인지 이 오래되고 낡은 전시물들은 생동감을 머금고 있다.

  무슨 연유인지 간혹 빠져있는 한국어 오디오 해설을 띄엄띄엄 들어도 이미 들떠버린 마음으로 부족함 없이 관람했다. 한옥의 중정처럼 전시장 중앙의 커다란 공간을 중심으로 3층 높이의 직사각형 가장자리의 전시공간 곳곳을 가득 채운 폴리네시안이 살던 여러 섬에 걸쳐 발견된 유물과 전통 어업방식과 도구, 토종 동식물, 수많은 토템들을 주로 이루던 1,2층을 지나면 근대의 하와이 왕족들 그리고 전쟁에 사용된 무기 및 전통 스포츠 등의 기록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층을 올라가면서 전시장 중앙 천장에 매달린 하와이 토종 새, 어류, 거북이들 모형을 볼 수 있는 귀여운 재미도 있는데, 그중 전시장을 들어서자마자 압도되었던 실제 크기의 향유고래를 설명과 함께 실제 뼈 일부를 사용한 모형을 3층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이 순간은 마치 산 꼭대기에 올라서 마침내 멋진 풍경을 보는 것만큼의 쾌감마저 들게 했다.


  그렇게 메인 전시장 관람을 끝내고 출구로 나오면 다른 전시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내려와 하와이 왕족의 초상화가 가득한 전시장을 빠르게 둘러보고 애니메이션 영화 '모아나' OST가 절로 떠오르는 또 다른 전시장의 폴리네시안의 전통 모형까지 보고 나오니 벌써 오후 1시가 되어 간다.


  박물관 앞 잔디밭엔 몇 개의 테이블과 의자가 있다. 준비해 온 도시락을 차에서 가져온 R과 나무 그늘 아래의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허기진 배를 채운다. 청명한 하늘과 속도감 있게 이동하는 뭉게구름 사이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거대한 나무의 초록잎 멀리로 다른 전시동에 단체 관람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삐뚤빼뚤하지만 줄을 이뤄 인솔 선생님을 따른다.

   김치 스팸무스비가 너무 맛있다며 식사에 집중하다가도 우리가 3시간 동안 관람했지만 두 개의 다른 전시동은 아직 시작도 못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마치 모든 수수께끼를 풀어야 탈출할 수 있는 거대한 방탈출 게임 안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저기 먼저 가볼까?'

  식사를 마친 후 테이블 뒤에 있는 뭔가 조금 허술해 보이는 'Playing with Light'라는 전시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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