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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포케 Mar 21. 2024

R의 엄마예요?

졸업식

  작년 할로윈 즈음, 알라 모아나 몰에서 12월 중순에 있을 R의 졸업식을 위해 R 몰래 샀던 졸업 축하 카드를 오래전 빈티지 샵에서 산 갈색 핸드백에 챙겨 집을 서둘러 나선다. 비 소식이 있어 검은색 3단 우산도 잊지 않고 챙겨 나와 집주인의 온갖 잡동산이를 쌓아 놓고 창고로 사용되는 차고 앞에서 우버를 기다리지만 도통 오지 않는 차를 비바람 속에서 20분 넘게 서있었던 것 같다.

  오후 5시에 시작하는 졸업식. 리허설과 학과 기념 촬영 때문에 본식 보다 몇 시간 일찍 학교에 가야 하는 R이 혼자 학교까지 가야 하는 내게 어떻게 우버를 사용하는지 알려 줄 땐 공유 차량이 3분 안팎으로 빠르게 배치됐다. 그래도 혹시 바쁠지 모르는 졸업식 당일은 넉넉하게 4시 10분쯤에 차량 예약을 하면 괜찮을 줄 알았지만 외출 준비 중 우버를 확인해 보니 차량 배치에 20~30분 소요되는 게 아니겠는가..

  반쯤 막혀버린 오른쪽 귓볼에 귀걸이를 힘겹게 끼워보려 애쓰다가 예상보다 일찍 불러야 했던 공유 차량 도착 예상 시간이 되어 귀걸이 한쪽을 휴지에 대충 싸서 서둘러 나가 차고 앞에서 기다렸지만, 도착 예정 시간이 계속 지연되면서 차가운 비바람은 얼굴을 때리고 머리카락은 중력을 거스르고 휘날리며 눈앞을 가린다.

  4시 25분.

  차문을 닫는 순간까지 정신없이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기사님께 인사하며 드디어 공유 차량에 타니 어째서인지 기사님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렇게 침묵만이 흐르던 차 안의 공기가 열어둔 창문으로 빨려나가 사라질 즈음 5시 되기 10분 전에 학교에 도착했지만, R이 말한 학교 극장이 어디인지 몰라 엉뚱한 곳으로 가다가 저 멀리서 나를 부르는 R의 사자후 덕분에 시간 안에 졸업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졸업생과 방문객들은 떨어져 앉아야 하기 때문에, 각 졸업생의 이름이 새겨진 종이 팔찌를 차고 학교 극장 출입구로 안내해 주는 R의 학과 상담사인 백인 여자가 말을 걸어온다.


  'R과 무슨 관계예요? R의 엄마예요?'

  '예..?'

  '아..! 아니면 동생이에요?'


  이게 무슨..? 엄마..? 이제 막 도착해서 여전히 정신이 없는데 내가 R의 엄마라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나는 R의 배우자라는 대답을 한 후에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객 자리는 이미 꽤나 자리가 차서 무대에서 상당히 먼 뒷자리에 앉자마자 문자로 방금 학과 상담사가 한 말을 R에게 일렀다.

  평소에도 동안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 것에 익숙해 내가 동안이라는 것을 알고 지내는 사람에게 대학교 다니는 자녀를 둔 엄마의 연배로 보였다는 것에 너무 충격적이었다.

  곧장 R에게 온 답장에는 '그녀는 네 얼굴을 못 보고 그런 질문을 했대. 미안하다고 전해달래.'

  ...

  지금도 그녀의 무례함이 이해되진 않지만 한 번 보고 말 사람에게 감정소모만큼 피곤한 게 없으니 즐거운 R의 졸업식에 집중했다.


  졸업을 축하하는 하와이 전통 축하 무대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식이 시작된다. 졸업생의 축사 후에 졸업생들의 이름이 한 명씩 호명될 때, 무대로 오른 졸업생은 일렬로 서 있는 교직원 대여섯 명을 차례로 악수하며 퇴장한다. 가족, 친구들 그리고 학교 응원단처럼 보이는 유니폼을 맞춰 입은 사람들은 졸업생이 무대에 오를 때마다 엄청난 환호와 축하를 보낸다.

  뒷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열렬히 자신들의 졸업생을 환호하던지 유쾌하고 즐거워 보여 보였다. 내가 R의 가족과 친구들을 대표했다는 마음으로 긴 시간 모든 과정을 무사히 마친 R을 위해 진심으로 축하하고 싶었다.


  R의 이름이 호명됐을 때 어찌나 심장이 떨리던지.

  'R에게 축하한다고 있는 힘껏 소리쳐야지. 나 목소리 크잖아. 한 번으로는 안돼. 2~3번은 소리쳐야지.'


  'R!!! 축하해!!! R!!! 축하해!!!'

  그렇게 만족스러운 축하 사자후를 마친 후, 졸업장 수여식 마지막 과였던 R의 과의 마지막 졸업생이 호명됐다.

  몇 가지 식순 이후에 무대 앞쪽에 앉아있던 모든 졸업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려 방문객들이 있는 뒷좌석을 보며 파란 졸업모에 달린 노란 술을 반대편으로 넘기며 긴 과정의 끝을 새긴다.


  극장 문을 여니 이미 어둑해진 저녁 바람은 더욱 싸늘하다. 극장 옆 야외 주차장에는 각 과의 부스가 있고 R과 기념사진도 찍은 후 같은 과 친구들과 인사도 하고 그들이 직접 만든 사탕목걸이를 걸어주며 서로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새파란 졸업가운이 상기된 모든 이의 웃음과 목소리로 나부끼는 주차장은 차가운 비바람 속에서도 산뜻했다.


  오랜만에 오랜 시간 구두를 신어야 했던 R은 주차된 차로 가는 길에야 발이 아픈 기색을 한다.

  혹시 발이 아플 수 있으니 여분 운동화를 챙기라던 내게 고맙다며 트렁크에서 꺼낸 신발을 갈아 신는다.

  듬성듬성 있는 가로등에 어두운 주차장에서 R을 꼭 껴안으며 축하한다는 말과 그동안 너무 고생했다는 말을 전하고 얼른 차에 타 다시 한번 R의 학과 상담사인 백인 여자의 질문에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오늘 리허설은 어땠는지, 졸업한 기분은 어떤지, 처음 가는 멕시코 음식점이 맛있는 곳이면 좋겠다는 소소한 얘기를 하며 주황색 가로등이 늘어선 도로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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