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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포케 Dec 28. 2023

새벽 4시에 일어나면 될까?

호놀룰루 마라톤

  일어 나기에 너무 이른 것 같은, 잠들기에 너무 늦은 것 같은 새벽 4시. 눅눅하고 신선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도착한 알라 모아나몰에는 이미 형형색색의 반팔을 입은 사람들이 한 곳을 향해 가고 있다.

  차량통제한 널찍한 도로를 거리낌 없이 가로지르며 걷는 수많은 사람들은 새벽을 잊은 듯 가볍고 들뜬 발걸음으로 알라 모아나 공원으로 모여든다.

  노란색, 초록색, 빨간색, 주황색, 보라색 반팔은 입은 사람들 셔츠 앞에 각자의 번호표가 붙어 있다. 저러고 어떻게 달릴까 싶은 코스튬을 한 사람들과 호놀룰루 마라톤 티셔츠 대신 평상복을 입은 사람들, 다람쥐같이 재빠르게 달릴 것 같은 아이들, 두 손을 맞잡고 있는 노부부까지 가로등만 밝은 도로 위에서 서로의 거리를 유지한 채 5시가 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날, 일상적이지 않은 걸 할 때 느끼는 일탈감은 늘 짜릿해.

  익숙한 알라 모아나 공원 옆 넓은 도로는 차 대신 사람들로 가득 찼고, 별만 반짝이던 밤하늘에 다양하고 선명한 색의 불꽃이 터져 오를 때 절정에 다다랐다. 여기저기서 환호성과 우리 옆에 있던 어떤 백인 젊은 여성은 영화 아바타 나비족이 내는 소리를 내며 순간을 제대로 즐겼다. 새벽 5시가 되자마자 현란한 불꽃, 클럽음악과 함께 참가자들은 출발하기 시작했고, 우리 순서가 되어 출발한 5시 30분까지도 참가자들을 북돋는 클럽음악에 신나게 멘트를 하는 DJ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도 솟아나는 흥에 겨워 10km를 어떻게 완주할지 염려하던 마음도 잊을 수 있었다.


  10km 코스를 참가한 R과 나는 병아리 같이 귀여운 노란색 10km 참가자 반팔티를 입고 출발선을 지나서 3km 지점까지는 쉬지 않고 가볍게 뛰었다.

  차이나 타운을 지나는 3km 지점에서 여기서 더 뛰면 폐가 터질 수도 있겠다는 위협을 느꼈고 천천히 걸으며 숨을 고르는데 폐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의 선명한 고통이었다. 입에서 이상한 쓴 맛을 느끼며 숨 고르기를 하면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주위를 둘러보니 참가자들의 완주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악기를 들고 나와 캐롤을 연주했다. 태극기와 미국국기를 함께 흔들며 응원하시는 중년의 아저씨를 지나 조금 더 걷다 보니 오른쪽으로 한국 마라톤 동호회로 보이는 사람들이 유니폼을 맞춰 입고 웃고 떠들며 뛰어 지나쳐간다. 출발선에서 기다릴 땐 영어 이외에 다른 언어는 일본어가 제일 많이 들려서 한국인들은 생각보다 많이 참여 안 한 것 같다고 R에게 말했는데 뛰면서는 예상보다 한국어가 심심치 않게 들려서 괜히 반가웠다.

  곳곳에 설치된 간이 화장실을 기다리는 긴 줄을 구경하며 물을 주는 부스는 언제 나오는지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다.

  아, 목이라도 축일 수 있으면 지금보다 훨씬 나을 것 같은데.

  목마른 사슴이 우물을 찾듯이 겨우 겨우 걸어 4km 지점에 다다르니 멀리서부터 도로가 흥건히 젖어 있는 게 보였다. 여러 봉사자들이 손에 여러 개의 흰색 물컵을 들고 참가자들에게 나눠주는 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려 맛본 물에 기운을 얻어 조금씩 뛰다 걷다를 반복하며 도착한 5km 지점에 커다란 전광판 시계가 보인다.


  '우리 정확히 한 시간 걸렸네?'

  6시 30분을 지나가는 전광판 시계를 보며, 이미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다리를 겨우 옮기며 힘들어 죽겠는 순간에도 어제 우리가 한 걱정이 얼마나 민망하고 웃긴 오만이었는지 헛웃음이 난다.


  10K를 마치고 아이홉에서 아침을 먹고 집에 돌아가자던 R은 그들의 영업시간을 확인했다. 한 시간이면 10K를 완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우리는 아침 7시에 문 여는 아이홉에서 아침을 먹으려면 가게 앞에서 기다려야 할 수도 있겠다며 조금 더 일찍 문을 여는 브러치 가게를 살펴보기도 했다.


  발바닥과 무릎이 아플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고관절과 엄지발가락이 빠질 같이 아픈 고통이 뛰는 내내 지속 됐다. 그래서 걷다 뛰다를 반복할 수밖에 없던 나를 옆에서 응원하며 속도를 맞춰준 R에게 너무 고마웠다. 오아후 섬에서 매년 12월에 열리는 호놀룰루 마라톤은 큰 규모의 행사 중 하나로, 5년 전 마라톤 풀코스로 참가한 R은 완주도 했다. 어떤 지점부터는 발에 감각이 없어서 발목으로 달리는 느낌이었지만 피니시 라인만 생각하며 계속 뛰었다고 한다. 완주 후 몸이 회복되기까지 한참을 고생했다던 R의 도전에 감탄과 존경을 보내며 마라톤 참가가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던 나는 이 순간을 얼마나 기대하며 기다렸는지 모른다. 비록 누군가에겐 병아리처럼 귀여운 노란색 10K 코스 일지라도..!


  마라톤 코스 곳곳에서 손뼉 치고 환호하며 응원하는 사람들, 간이 의자를 펼치고 반려견과 함께 여유롭게 앉아 참가자들을 보는 사람들, 그중 가장 반갑던 사탕 꾸러미를 들고 당 떨어진 참가자들에게 박하맛 지팡이 사탕을 나눠 주던 사람들.

  정말 너무 고맙다고 인사를 건넨 후 집어든 박하맛 지팡이 사탕을 입에 털어 넣고 조금씩 다시 뛰기 시작해서 피니시 라인에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와이키키 도심까지 접어들 수 있었다.

  와이키키 해변을 지날 때는 이미 동튼지 오래된 해가 높은 빌딩 사이로 강하게 내리쬐기 시작했다.

  

  이미 메달을 목에 걸고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걷는 10K를 마친 사람들 사이로 힘을 쥐어짜며 걷듯이 뛰었다.


  '너희들 피니시 라인이 바로 앞이야! 조금만 더 힘내!'

  피니시 라인 바로 앞이라는 걸 알리는 것처럼 참가자들을 목놓아 응원하는 사람들 사이로 와글와글 모여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메달을 양팔에 주렁주렁 걸고 완주한 사람들에게 메달을 전해주는 무수한 자원봉사들 뒤로 하얀 천막들이 곳곳에 있다. R과 기념사진을 찍은 후 달큼한 튀김냄새가 나는 천막을 찾아가 보니 십 대로 보이는 자원봉사자들이 설탕이 잔뜩 묻은 도넛 한 개와 바나나 한 개를 나눠주고 있었다.

  도넛과 바나나를 손에 꼭 쥐고 메달은 목에 건 채 그곳을 빠져나와 와이키키에 있는 아이홉으로 향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조금이라도 뛰는 척해야 이 행사에 참여한 의미가 있지 않겠니.라고 계속 압박하던 생각에서 자유롭게 됐지만, 내 신체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다리를 이끌고 알라 모아나몰에 주차된 차까지 걸어갈 생각을 하니 울고 싶어졌다.

  

  어찌어찌 도착한 아이홉은 웨이팅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노란색 반팔티를 입은 사람들. 미국에 유명한 브런치 프랜차이점 아이홉은 마라톤을 마친 사람들의 만남의 장 같았다.

  

  식사를 하고 나니 기분은 훨씬 나아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강렬해진 햇볕 아래를 걸어서 알라 모아나몰까지 가면 된다.


  '축하해!'

  그렇게 R과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걷고 있는데 우리를 보며 축하해 주는 낯선 이들을 5번 이상 것 같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우리 목에 걸린 반짝이는 메달 때문이지 않았을까. 낯선 이들의 축하를 받으며 주차장에 도착한 우리는 오늘의 도전을 무사히 끝낸 것에 서로를 축하하며 자동차에 올라탔다.


   '이 사람들 시간 동안 풀코스 때, 우린 10K 뛴 거야?'

  참가자 번호표에 함께 부착되어 있는 무언가가 피니시 라인을 지날 때 시간 기록을 하는데 호놀룰루 마라톤 홈페이지에서 내 기록을 확인해 볼 수 있다. 풀코스 1등 한 선수와 10K를 뛴 우리는 같은 두 시간 만에 결승선에 도착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심한 고통을 느꼈던 내 엄지발가락은 발톱 밑으로 멍이 들었다. 지금도 푸르뎅뎅한 내 엄지발가락은 좀비 발가락 같다. R과 나는 적어도 이틀 동안 앓는 소리를 내며 엉거주춤 걸어 다녀야 했다.

  낯선 이와 전혀 부딪칠 수 없는 널찍한 도로에서 마라톤 중에 음침한 일본인 할아버지가 내 오른쪽 엉덩이를 손으로 치고 간 거 빼면 즐거운 도전. 아니다 낯선 이와 전혀 부딪칠 수 없는 널찍한 인도에서 집 가는 길에 이상한 동양인 여자가 커다란 쇼핑백으로 내 오른팔을 치고 간 것도 빼면 즐거운 도전이었다.


  우리 내년에도 도전하자! 그땐 사탕도 조금 챙겨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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