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후 30일, 남편이 제 가슴을 보더니 말하더군요. "독립투사의 젖가슴이군." (남편은 교포인데 사극과 시대물을 좋아합니다.) 반박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잦은 마사지로 인한 피멍, 잘못된 수유자세로 인해 너덜너덜해진 꼭지 (불편한 표현 죄송합니다.), 아기의 날카로운 손톱에 여기저기 긁힌 자국은 흡사 독립투사의 가슴을 연상케 했습니다. (독립투사 선생님들, 죄송합니다. ㅠㅠ)
몸도 마음도 점점 더 만신창이가 되어 갔지만 엄마가 행복해야 젖이 잘 나온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사람이 행복할 때 분비되는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젖 분비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한대요. 잦은 수유로 목, 어깨가 쑤시고 꼭지가 아프고 밤중 수유로 잠을 못 자서 정신이 피폐해진 저는 눈물을 머금고 "아~ 행복하다. 나는 졸라 행복하다??!!!"를 중얼거리며 지냈습니다. 그 무렵 우리 남편은 저를 조금 무서워하는 눈치더군요.
며칠 후 지난 번 방문했던 퍼블릭 헬스 유닛에서 follow-up call이 왔습니다. 이번엔 다른 간호사였어요. 전화할 때마다 shift 간호사가 바껴서 매번 똑같은 설명을 하는 것도 귀찮고 이번에도 또 '넌 잘 하고 있어." 같은 의미없는 소리만 들을 것 같아서 짜증이 났어요. 그냥 무성의하게 단답식으로 대답하다가 설움에 북받쳐서 전화기 너머로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줄줄 풀어놨어요. 갑자기 영어가 잘 되더군요. 감정이 격해지니 목소리도 덜덜 떨렸어요. 웬만해선 간호사들이 직접 오라고 약속을 잘 잡아주지 않는데 오늘 바로 자기를 만나러 오라고 하더군요.
또 다시 얼룩덜룩한 수유쿠션과 크롱 인형을 바리바리 챙겨 나갔습니다. 그러나 큰 기대는 없었어요. 남편한테 "어차피 이번에도 중요한 건 의사 만나라. 넌 잘 하고 있다 같은 풀 뜯어 먹는 소리만 할 거야."라며 슈발슈발 하면서 (격한 표현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가긴 갔습니다.
갔더니 키가 190cm쯤 돼 보이는 파란 눈에 곱슬머리 간호사가 저를 맞아주었습니다.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제 수유 자세를 보더니 해 줄 말이 아주 많다고 하더군요. 순간 방어기제가 작동해 꼭지 타령을 늘어 놨습니다. '난 지금 꼭지가 매우 아프고 사실 내 꼭지는 모유수유에 적합하지 않은 꼭지다' 라는 내용이었어요. 그 때까지 산후조리사 샘의 떠나기 전 마지막 코멘트 "사실 산모님의 유두가 좀 짧아서 아기가 빨기 힘들어 하는 것 같아요..."가 제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어요. 제가 꼭지 때문에 고생하니 저희 엄마도 커밍아웃을 하시더군요. "사실 엄마가 함몰유두라 너희 모유수유를 못 했다." (엄마 실망이야...) 간호사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제 꼭지를 보자마자 말했어요.
"Your nipples are PERFECT!”
(너의 꼭지는 완.벽.해!)
누가 적합하지 않은 꼭지라고 했냐. 세상에 수유에 적합하지 않은 꼭지는 없다. 나는 수많은 꼭지들을 봐왔지만 다 수유가 가능했다. 사실 나도 함몰유두다. 하지만 두 아이 다 모유수유했다. 너의 꼭지는 정말 완벽한 꼭지다!
늘 문제거리로만 여겨졌던 너덜너덜한 꼭지가 갑작스런 폭풍 칭찬을 받으니 쑥스러워서 안으로 쏙 들어갈 뻔 했습니다.
간호사는 저더러 수유를 직접 해 보라고 하더니 지금 아기가 꼭지만 물고 있다고 했습니다. 훨씬 더 깊게 물어야 한다며. 그리고는 아기가 입을 벌릴 때 아기 목덜미를 가볍게 잡고 제 가슴팍으로 확~ 쑤욱~ 밀어붙이는데 0.1초 만에 촵! 하고 도킹이 됐습니다.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도킹이었어요.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이게 이렇게 쉽게 될 일인가 당황스러워서 헛웃음이 다 나오더군요. 신기하게 꼭지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어요. 그렇게 간호사 앞에서 10분이 넘게 수유를 했습니다.
수유를 마치고 간호사한테 말했습니다.
"I am SO HAPPY to meet you, and I am SO MAD at the same time.”
간호사가 놀라며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더군요.
내가 오늘 너를 만나서 정말 기쁘지만, 내가 지금까지 만난 의사와 간호사가 10명도 넘는다. (출산 직후 모유수유 도와준 간호사들도 많았거든요.) 그런데 지금껏 아무도 내 수유자세에 대해 너 같이 이야기 해 준 사람이 없고 다 잘하고 있다고만 했다. 왜 아무도 진작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는지 정말 화가 난다.
간호사는 안도의 웃음을 짓더니 시범용 인형을 한 쪽 옆에 내려두고는 제 눈을 마주치며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나는 너의 멘탈 헬스가 정말 걱정된다고요. 전화할 때부터 느꼈다고. 주변에 너를 도와줄 사람이 있느냐, 혹시 뛰어내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느냐 하면서 질문지를 주면서 필요하면 내가 정신상담 리퍼럴도 해 주겠다고 했어요. 실로 용한 간호사였습니다.
신나서 집에 오자마자 수유 자세를 계속 연습했어요. 생전 처음 느껴보는 완벽한 래칭의 순간, 내 꼭지에 대한 자신감에 행복 호르몬 옥시토신이 마구 분비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간호사 샘 앞에서는 분명 잘 됐었는데 집에 와서 다시 하니 또 안 되는 겁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습니다. 답답해서 친구한테 전화하니 친구가 뼈 때리는 조언을 해 주었어요.
"각도 생각하지마. 자세 생각하지마. 인류는 수천 년 전부터 모유수유를 해 왔어. 너의 DNA가, 본능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이미 알고 있어. 인간도 결국 동물이잖아. (일부 그녀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냥 네 몸을 믿고 맡겨!”
자포자기한 상태로 쇼파에 등을 기대고 아기를 배에 눕힌 채로 힘을 빼고 멍 하니 있었는데 아기가 꾸물꾸물 꼼지락꼼지락 하더니 알아서 젖을 찾아와서 빨더라구요. 이 악물고 주먹쥐고 안간힘을 쓸 땐 안 되던 게 오히려 힘을 빼고 내려놓는 순간 돼 버렸어요. 아기가 스스로 엄마 냄새를 맡고 찾아와 준 것이었습니다. 너무 기쁘고 행복하고 고맙고 장해서 저는 소리조차 낼 수 없었습니다.
며칠 뒤 간호사 샘한테 follow-up call이 왔어요. 저는 전화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 날 처음 만난 외국인 간호사 샘한테 저의 모든 것을 (꼭지부터 멘탈까지) 내보인 탓인지 거의 정신적 탈진 상태였어요. 복기하고 싶지 않았고 대화를 나누면 감정이 또 터져버릴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제 상태가 진심 궁금했는지 그 후로도 몇 번 부재중 전화가 와 있더군요. 그렇게 제 은인이 되어준 간호사 샘과의 인연은 끝이 났고 그 분과의 만남은 제 험난한 모유수유 여정의 터닝 포인트가 되어주었습니다. 살면서 언젠가 보답할 날이 있기를, 다음엔 기쁘고 건강한 모습으로 (꼭지를 가린 채) 만날 날이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6탄에서 계속 됩니다. (이제 정말 끝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