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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이 Nov 01. 2020

제 4 장

31. 당신이 모르는 나의 감정    


내가 무릎을 꿇을 일이 있다면

내 사랑의 간절함을 표현할 때

앉은 당신 무릎에 입맞춤하기 위함뿐이리    

내가 종달새같이 노래할 일이 있다면

당신을 향한 조용한 사랑이 흘러넘쳐

고요하게 담고 있기 어려울 때뿐이리    

내가 어둠 속을 참아낼 일이 있다면

한밤중 마을 앞 정원에서 나를 기다리는

당신의 그쪽으로 걸어갈 때뿐이리    

내가 부끄럽도록 질투심을 느낄 일이 있다면

함께 있는 예쁜 여자에게 당신이

다정한 눈빛으로 미소 지을 때뿐이리    

내가 입술을 닫고 미소만 지을 때가 있다면

빛나는 달빛이 앉은 창가로 스며들 때

내게 입 맞추던 당신을 생각할 때뿐이리    

내가 기쁨의 날들이었다고 말할 때가 있다면

오로지 당신을 사랑하던 순간뿐이리    

내가 슬픔으로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면

지난날 당신이 나를 모르고 살던 

그때라고 말하고 싶지 않으리    

나를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지금, 이 순간뿐이라고 말하리......    


덧붙임 : 해가 뜨고 지면서 그림자도 나타났다가 사라지 듯, 내 마음속에서 너도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하지만 너는 과거에도 존재했고 여전히 지금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계속될 존재로 내 안에 살아있다. 너는 내 안의 또 다른 세상이 되었으니 그 세상의 시간 또한, 해처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게는 엄마처럼 내 건강까지 진심으로 걱정해 주시는 선배님이 계신다. 그분은 적어도 나보단 열 살도 훌쩍 많으신 분이시지만 처음 뵈었을 때나 지금이나 항상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잃지 않으신 분이시다. 그분에게 나는, 매우 어색하면서도 과분하지만 뮤즈였다. 그 선배님은 언제나 내게는 소년이다. 아마 언제까지나 내게는 처음 뵈었을 때 그 감성을 그대로 느끼게 해 주시는 소년으로 남을 거란 걸 안다. 사람은 세월에 따라 외모도 함께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변해갈지는 모르나, 간직하는 영혼만큼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은, 참고 있는 사람은 더 아프다.    

회초리를 맞을 때 소리를 참으면 더 아프다. 어머니는 회초리를 들고 난 다음 날, 아침에는 항상 눈이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맞을 때, 때릴 때, 착착 감기는 회초리의 회오리 소리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미 어머니와 오빠는 계약을 끝내고 난 후였기 때문이었다. 잘못을 인정하는 의미로 회초리를 몇 대 맞아야 하는지, 오빠의 생각이 어머니의 뜻과 맞아 들면 그 숫자만큼의 매질이 끝날 때까지 둘 사이에선 숨소리만이 날 뿐, 회초리의 낭창낭창한 유연함만이 휘파람을 불었을 뿐, 그 공간엔 침묵뿐이었다. 맞으면 피멍이 들었다. 아팠었다. 소리라도 내면서 잘못했다고 빌어보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 차마 그럴만한 양심조차도 숨죽여야 했다. 때릴 때는 어머니도 참으니까, 때리는 사람도 아프다는 걸, 어머니는 눈빛으로만 표현하셨던 듯, 그래서 그런가, 사랑할수록 혼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왜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끼게 되는 걸까. 참는 것이, 사랑함에 있어도 용기이며 결국 자유롭게 해 준다는 것을.                                                                                                                

32. 나는 그대의 자유    


사랑하는 이여!

삶이란 이다지도 잔혹하단 말인가요    

난 그대를 알고, 그대 말고는

내 눈은 다른 것은 못 보아요

내 귀는 오래전 닫히게 되었어요

그대의 목소리를 처음 듣게 된 날부터    

나 그대를 알고, 말을 잃어버렸어요

그대의 두 눈이 나를 본 그 순간부터

내 입술, 이미 당신 입맞춤만 받을 준비가 되었죠    

난 그대를 알고 나서

눈 귀가 멀어지고 말까지 잃었으니

내 삶은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나는 이제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내 가느다란 손가락 끝만이

그대의 몸짓대로만 

허공의 벽에 닿다 멀어졌다 할 뿐

내 가벼운 탄식만이 

그대의 숨결대로만 

돌아오지 못하는 메아리로 멀어질 뿐    

나는 이제 아무런 제약이 없어요    

내 안에 그대는 다른 세상이 되었으니 

그대는 나의 자유에요. 나는 그대의 자유에요    

내 세상에서 그대는 조금씩 멀어지고

그 공간 안에서 한없이 자유로운 나는,

오로지 끝없이 혼자로 남은 나는 

마음대로 사랑하고 이별할 수 있으니까요.   

 

덧붙임 :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묘비명.     

대학생이 되고 나서 교정에서 나를 가장 반하게 했던 곳은, 그야말로 중앙도서관이었다. 이상하게도 책의 종이 냄새는 쾌쾌히 나를 끌어당겼고 해가 지도록 물 한 잔 마시지 않아도 전혀 배고픔도 모르던 곳이기도 했었다. [그리스인 조르바] -, 알베르 카뮈가 노벨문학상 시상식 자리에서 수상소감에 덧붙였던 말이 오늘따라 유난히 뭉클하게 느껴진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리스가 아니라 러시아에서 태어났더라면 노벨문학상을 몇 번이라도 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던 카뮈의 인상 쓴 그 얼굴이 어떤 배우의 얼굴보다 멋있다고 느껴지던 건 아마도 우연은 아니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카뮈는 그래서 더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카잔차키스의 영혼은 더 순수하다고 느낀다.                                                                                                                                     

33. 사랑의 열쇠    


소년을 사랑하는 소녀는

사랑에 빠진 얼굴이 궁금해서

호수를 거울로 보려고

그곳으로 달려갔어요    

때마침,

골짜기부터 달려온 바람에

호수는 일렁였죠    

어여쁜 얼굴을 기대했지만

호수처럼 찌푸린 얼굴이었어요    

아!

바람은 언제나 부는 것

소년을 사랑하는 것도

언제나 참는 것    

사랑의 인내가 행복이던가요

그건 고통일 뿐,

견뎌낸 외로움의 보답은 아니었죠    

그렇게 소녀는

돌멩이 하나 호수에 던지고

바람이 멈출 때까지 울었어요    

눈물로 참아낼 그리움이라면

끝없는 인내만이 사랑의 열쇠이던가요    

아!

그리움이 없는 사랑은

또 견뎌낼 수 없단 걸    

바람은 막아도 부는 것

일렁이지 않는 호수는

고요함도 의미 없는 것    

소년이 그리운 소녀는 

호수 물에 얼굴을 담그고 

다시 웃는 연습을 했어요    

그리고 그 얼굴 그대로

소년한테로 달려갔어요.    


덧붙임 : 불 켜진 청사를 한밤중부터 새벽까지, 그것도 출입의 시작을 지키는 것, 동틀 녘을 기다리는 근무자의 간절함도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애탐이 아닐까.                                                                                                                                                    

34. 숲속에서    


오솔길 건너편에만 쏟아지는 비를

작은 나무숲에 있던 소녀는 보았어요

좀처럼 볼 수 없던 광경이었죠    

이해할 수 없었던 소녀는 물었어요

왜 저 비는 제 앞까지 오지 않는 거죠?

나도 저 비를 맞고 싶어요

어째서 내게는 더운 빛만 오죠?

온몸이 다 젖을 때까지

나도 저 비를 맞고 싶어요    

소녀가 그렇게 말하자

비구름은 가까운 언덕으로 가서

말도 없이 도도하게 앉아 있었죠    

물러난 자리에 맺힌 빗물 방물이

나뭇잎 사이를 구를 때

미풍이 한숨 쉬며 지나가고

평생 노래한 적 없는 작은 새는

그 나뭇가지에 앉아 

막 지져 기고 있었죠    

소녀는 미풍 따라 한숨 쉬었어요

왜 새들은 노래하지 않고 울기만 하죠

나에겐 언제나 진혼곡 같아요    

소녀가 그렇게 말하자

구름이 앉았던 자리에 

오색 무지개가 걸렸어요    

소녀도 모르게 미소 지었죠

얼마 만에 웃는 건지    

그리고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어요

빗물의 담즙과 빛 번짐의 결속

오로지 그 둘만의 덧없는 유대감

무지개가 속임수란 걸 알 리 없었죠    

그 언덕에 주저앉아

소녀는 처연하게 외쳤어요

설령 누가 듣게 된다 해도

이제는 거칠 게 없었죠    

나는 

그대가

보고 싶어요    

그때 반대편 작은 숲에서

누군가가 대답했어요    

나는 나는

그대가 그대가

보고보고 싶지 않아요    

이제 다시는 속지 않아요

고백하던 그 날을 잊어버리고 싶어요    

비 맞고 싶어 못 견뎌서

무지개에 반해 언덕까지 올라왔건만

메아리마저 비웃어 바로 대답 않고

소녀의 수줍은 고백이 그에겐

고통의 절정이었단 걸

비를 보고 나야

무지개에 속고 나야

메아리에 놀림당한 뒤에야

알게 되었단 걸요.    

소녀는 앞으로 절대 두 번 다시

그 작은 숲엔 가지 않기로 했어요    


덧붙임 : 몸이 고단한 상태에서는 마음도 분명하지 않다는 걸 지금 저 소녀는 알고 있을까. 점점 새벽이 가까워오니 현기증에 걸음까지 조심해야 했다.          


                              

36. 사랑하는 사람    


나는 당신이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낱말입니다    

그대는 내가 말할 수 있는

수천 가지의 이름입니다    

그대가 나를

그 하나로 말해주면

나는 새벽의 문을 열고

그대를 맞이하여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대는 그렇게 

내 시작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 이름으로 나를 열면

나는 기쁨의 안내자로

그대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대가 나를

영혼의 눈빛으로 바라보면

하루의 고단함을 잊고

내 텅 빈 극장의 막을 올려

그대를 무대로 초대해

그 이름으로 노래 불렀습니다    

그대가 어느 곳에 있어도

나는 그대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내게 그대는

수천 가지의 이름이니까요    

나는 그대에게

단 한 낱말이고 싶습니다    

그대가 그렇게 말해주기를

얼마나 바라는지

당신은 알기나 할까요    

너는 나의 운명이라고    

나는 오로지 그 낱말로

그대 운명이고 싶습니다    


덧붙임 : 이별한 뒤 온 힘을 다해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만큼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없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듯, 세상일의 모든 것들이 이와 같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온 애정을 쏟지 못했던 순간을 아쉽고 미안해하며, 또 한편으로는 새벽 첫 기도의 마음처럼 간절하게 하루하루를 살고 싶다고 느끼기도 한다.                                                                                                                                                

37. 무릅쓴다는 것    


모두가 나를 비난한대도

나는 나의 길을 걷겠어요

물결 따라 떠내려가는

죽은 물고기처럼 되진 않아요

난 내 꿈을 사랑해요

꿈꾸는 인생으로 사는 건 아니죠

오로지 그 꿈으로 살 뿐이에요    

나는 그래요

당신이 나에게 딱 맞는

완벽한 사람이기에

사랑하는 건 아니에요    

당신 생각만으로도

온통 기쁨으로 가득 차기에

그런 것도 아니죠

때때로 나에게 애달픈 그리움인

당신을 원망하기도 해요    

당신은 그러므로 

나에게 안타까움이죠

사랑받지 못할 수 있는 

두려움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당신을 사랑해요    

슬픔이 없는 사랑은

감정 없는 항상 웃은 그림

빈틈없는 몸매의 마네킹

소망 없는 기도문일 뿐    

나는 그러므로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받지 못할지 몰라도

나를 꿈꾸게 해 주는

당신을 사랑해요    

덧붙임 : 여름이 빨리 왔단 건 이번 여름은 길다는 것, 가을이 더 간절해진다는 뜻이다. 나는 지금 덥지 않다. 땀이 목을 타고 내릴 때, 바람에 식을 때, 시원하고 간지러운 그 느낌을 자주 느끼고 싶을 뿐이다.     


사라져 버린 기쁨의 시간이여    

한 달에 한 번은 꼭 중식을 주문해서 먹었다. 둘째 선우가 배 속에 있을 때 이곳으로 왔었고 이제 그 아이가 10살이 되었으니 10년간 여기에서 지낸 것이다. 대용량 분리수거 봉투를 사들여 주말마다 묵은 물건을 정리해왔다. 평일에 하기엔 무리가 있어서 토요일 센터에 다녀온 오후에 하거나 일요일 아침 일찍부터 정리를 시작했었다. 그러면 어떤 날은 오후 2시가 훌쩍 넘을 때까지 물 한잔도 마시지 않고 5시간을 넘도록 짐 정리를 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하고 나면 그 순간 몰랐던 현기증과 나른함이 전신을 흔들어서 아이들 밥도 챙겨줄 기운도 남지 않았었다. 그러면 거의 10년의 절반이 넘도록 단골집이던 중식당에 음식을 주문했다. 배달된 음식 포장을 뜯어내고 먹기 시작하길 기다리고 있다가, 그건 엄마가 먼저 먹어야 먹겠다는 준비의 의미, 내가 좀 뜸을 들이면 내가 빨리 먹어주길 한마디씩을 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큰아이 정우가 하는 말이 이 집은 너무 서비스가 안 좋다는 것이다. 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빛으로 이유를 물었고 아이는 곧 말을 이었다. 엄마는 그동안 음식을 시켜 먹고 나면 항상 그 그릇들을 깨끗하게 설거지까지 해서 집 밖에 내 놓아두었는데 그 집은 그게 고맙지도 않은 지 군만두조차 서비스가 없다는 것이다. 난 그냥 웃었다. 그래 아이 말이 맞을 수도 있다. 나는 배달 음식을 먹고 다시 그릇을 되뇌어놓아야 할 일이 있으면 꼭 우리 집 그릇처럼 깨끗하게 설거지를 해서 집 밖에 내놓았었다. 한 번도 그걸 거른 적이 없던 것 같다. 그냥 별다른 뜻으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우리 식구들이 맛있게 먹은 것에 대한 어쩌면 고마움의 표시 같은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아이 말도 일리는 없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는 한 번도 배달 음식 그릇을 설거지해놓고 밖에 내놓은 집을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 아이에게 한마디만 해 주었다.     

“물론 엄마가 무슨 대가를 바라고서 그런 일을 여태까지 했던 것은 아니야.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 때 어떤 보답을 기대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친절일까? 단, 반대로 너의 말대로 네가 누군가한테 친절을 받았다면 꼭 감사하다고 고맙다고 표시할 줄 아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지. 그런데 아마 그 집 아저씨도 우리가 음식을 주문하면 다른 집보단 기분이 더 좋으셨을 거야. 그래. 엄마는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깨끗한 그릇 돌려드리는 엄마 기분도 좋았으니까 그것으로 됐던 거야. 알았지?”    

아이는 무뚝뚝하게 한 마디 ‘네’ 하고선 크게 한 젓가락 면을 집어 올렸다.     

‘녀석, 너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만하지.’    

며칠 전, 큰아이 작년 담임 선생님을 만나 뵙고 왔다. 선생님도 나에게 학부모 이상의 감정이 있었고 나 또한 아이의 선생님 그 이상의 존경심과 애정이 있었기에 선생님께서 학년 초에 다른 학교로 전근하시게 된 후에도 우리 둘은 아주 가끔 연락하면서 지내고 있던 차였다. 예상하지도 못했던 바이러스가 유행해서 학교도 문을 닫았었고 사람 사이의 교류도 조금씩 뜸해지고 있었다. 교육부에서 개학을 좀 무리하다시피 해서 강행해서 아이들이 학교에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은 뒤, 어쩐지 그날따라 선생님이 너무나 보고 싶단 마음이 불쑥 들었던 거다. 천안지청으로 송치하러 다녀오는 길에 화원이 있었다. 일부러 거기로 가 주황색 장미꽃 한 단에 흰 안개꽃으로 꾸며 한 품에 안길만한 꽃다발을 만들었다. 계시는 학교까지는 갔는데 선뜻 만나 뵙는 것이 망설여졌다. 왜냐하면, 코로나 19로 모든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고 불쑥 전화를 드리기엔 선생님께서 혹시나 지금 곤란한 사정이 있다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도 언제까지나 거기에서 기다리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정문에 계시던 배움터 지킴이 어르신께 선생님의 성함을 말씀드리고 이걸 여기에 두고 가면 아마 선생님께서 찾아가실 거라는 양해 말씀을 드리니까, 이 어르신은 교육을 아주 잘 받으신 모양이신지 요즘 이런 거 주면 안 된다고 하던데…. 하시며 말끝을 흐리시는 거였다. 아예 교무실에 전화를 걸어보라고 하셨고 난 선생님께 문자를 남겼다. 사정이 이러하니 정문 앞 화단에 꽃다발을 두고 간다고. 그러고 5분 정도를 기다리다 발길을 돌리는데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스크 쓴 얼굴이었지만 선생님 두 눈에도 나처럼 반가움의 눈물이 맺혀있단 걸 볼 수 있었다. 우린 가볍게 서로를 안아주었다. 선생님은 나보다 두 살 많으셨고 중학생인 딸이 있는 나와 비슷한 워킹 맘이었다. 체격도 나와 비슷하고 무엇보다 우리 정우를, 내가 알고 있는 그대로, 어쩌면 내가 모르는 아이의 모습을 더 정확하게 잘 알고 계신 분이기도 하였었다. 선생님과 만남은 10여 분 만에 끝났다. 선생님은 장미꽃다발을 선뜻 받으시고 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주황색은 선생님과 너무나 꼭 닮은 색이었다. 작년 가을, 아이 학예회 때 반 친구들 모두에게 장미꽃 한 송이씩을 선물하면서 선생님께 노랑이 섞인 주황색 장미를 한 단 드렸던 게 생각났다. 그때도 다른 의미는 없었다. 아이가 학생회장을 맡고 있어서 난 반 아이들에게 아이를 대신해서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해 겨울, 선생님 책상 위에서 곱게 말라 있던 장미를 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돌아오면서 얼마나 마음이 흐뭇했던지 자동차에 에어컨을 켜는 것도 잊어버린 채 등허리가 땀으로 다 젖는지도 모르고 그대로 사무실로 돌아왔다. 꽃은 금방 시들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시들지 않으면 꺾은 꽃이 아니니까. 다만, 여름처럼 무더워질수록 선생님, 아이들, 그리고 나, 우리 각자의 마음들은 더욱더 푸르고 싱그러워질 것을 기대한다.     

이 집에서 떠나갈 날이 가까워질수록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물건들이 눈에 자꾸 들어오고 쓸 때는 그렇게도 애지중지했던 것을 막상 버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이렇게 냉정하게 변할 수 있구나 싶어서 스스로 잠깐씩 서글픈 맘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물건은 버려져도 기억마저 내다 버리지는 않으니까 그걸로 괜찮다 위안 삼는다. 이 집에서 딱 한 가지만 가져갈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단연코 이것이라고 말하련다. 석양이 질 때의 베란다 창을 그대로 떼가고 싶다고. 아마 어디에 가서도 그 석양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음 주에는 더 사소한 작은 것들을 정리하려고 한다.     

이런 생활이 거의 두 달째 이어지니 가장 정직하게 반응하는 건 역시 내 몸이다. 양쪽 가슴이 숨 쉴 때마다 결려 웃음조차 크게 웃지 못하고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할 때 힘을 주지 못해 엉거주춤한 자세가 된다. 그리고 내 유연한 손가락이 뻣뻣해져 영 맘에 안 든다.      

                   

38. 언제나 변하지 않는 것    


여름이 되면, 우리는 

떡갈나무 숲으로 달려갔어요

여름이 무더울수록

숲의 그늘은 더욱더 시원했고

햇볕이 높아질수록

숲의 그림자는 더욱더 짙어졌죠    

나는 무릎까지 오는 치마를 입고

너는 무릎까지 오는 바지를 입고

갈수록 힘이 세진 풀잎에 

온통 종아리는 생채기로 가득했죠

우리는 그것도 너무나 좋았어요    

나는 저 바위 끝에 피어난 개망초 꽃이 좋아

나는 저 개망초가 얼마나 슬픈 꽃인 줄 알아

하지만 몇 송이라면 너에게 꺾어다 줄 수 있어.

아니, 슬픔이 있는 꽃이라면 나는 싫어

그냥 여기에서 좀 떨어져 바라보기만 할래    

우리는 바위 끝에 서서 개망초 몇 송이와

그 아래로 서로의 팔목을 잡고 떨어졌죠    

손목의 푹 팬 상처에 선명한 붉은 피가

우리에게 살아있는 꽃송이로 피어났어요    

나도 너도 손목에서 붉은 꽃이 피었고

꽃이 시들어가듯 상처는 흉터로 남았죠    

나는 너는, 우리는 그날의 그 시절을

손목의 흉터로 기억하고 있어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밋밋한 팔목 따위에

남은 흉터가 때론 훌륭한 장식이 된다는 걸

우리에게, 서로에게 그날의 징표가 된다는 걸

죽는 순간까지도, 아니 죽어서도 남는다는 걸

나는 너는, 우리는 서로 알고 있을 테죠    

우리는 단 한 번도 다시 만나지 못했죠

떡갈나무 숲의 나무들은 30살을 더 먹고

이제 모두 늙었거나 늙어가고 있는 데도요    

나는 너는, 우리는 이제 그 숲에서 못 만나요

다만, 안개 달빛이 숲을 아련하게 비추면

숲은 반쯤 눈을 감고 그때 우리를 맞아요

결국이네, 내 마음도 완전히 풀어지고 말죠    

달빛에 가는 손목 들어 안녕하고 손 흔들며

그 좋았던 것에 나에게도 있었군요. 말하면

상처의 붉은 피는 진정한 꽃으로 피어나고

시간의 흔적으로 남은 흉터는 서로의 징표로

왜 지나간 시절은 한참 후에야 설렘이 되어

이다지도 가슴이 저리도록 아픈 걸까요   

 

덧붙임 : 어릴 때 나는 언제나 우리 집과 딱 붙어있는 동산에 올라가 온종일을 보냈었다. 가장 많던 떡갈나무는 언제나 짙은 그늘이어서 희귀하게 생긴 버섯들이 땅에서 살고 있었다. 이제야 알지만 그건 독버섯이었다. 모양과 색은 화려하지만 먹거나 만지면 안 되었던. 그렇게 숲속에서 놀고 나면 언제 다친 줄도 모르는 상처들이 팔다리에 많았고 그중에 몇 개는 아직도 내 몸 이곳저곳에 흉터가 되어 있다. 시간이 흘러도 절대 지워지지 않을 추억들, 그날의 친구들, 우리 팔목에 남은 흉터 자국은 이제 어른인 나를 안내하는 징표가 되었다.                                                                                                

39. 춤추는 우리

   

펜이 종이에서 미끄러지면

단어와 단어는 손을 맞잡고

왈츠를 춘다    

흰 종이에다    

"난 널 쓰고, 널 안고

너에게 이야기한다"    

라고 적으면    

넌 정말로 내 품 안으로 와서

내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우리는 

맞춘 눈 돌리지 않은 채

손부터 맞대고

내 문장들과 어울려

춤을 춘다    

그렇게 내 문장은

너만 있다면

언제나 춤을 추었다    

도나우 강의 잔물결이

문장을 흘러가면

서로 손끝만 건드린

자음과 모음은

둥글게 선회하며

박자를 맞춘다    

노래는 너를 완성하는데

필수조건이었고

춤은 내 문장에서 빠지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너를 빼고는

나를 생각할 수 없는 이유이다    


덧붙임 : 웃음이 없는 공부는 진정한 배움이 아니며, 행복이 없는 사랑은 진짜에서 멀어진 것이다. 오늘도 나는 전혀 덥지 않다. 여름빛은 장맛비처럼 깊은 산골짜기마다 쏟아져 빛의 홍수가 나고 땅의 모든 것들은 빛에 질식한 채 나른한 단잠에 빠져든 날이었다. 나는 늙더라도 젊고 싶다. 마치 활기찬 나른한 월요일, 오늘같이.                                                                                                                                                        

40. 나를 사랑하면 그대는 왕이에요     

   

이렇게 말없이 기다리면

나를 만나러 올 줄 알았어요    

기다림은 두근대는 떨림에서

조바심으로 간절해진 고통까지

천국과 지옥을 알게 해 주었죠    

그대를 알기 전 나는

하늘의 자유로운 작은 새

그대를 알고 난 뒤 나는

새장 속에 갇힌 잡힌 새    

그대를 알기 전 나는

들판의 들꽃과 풀벌레에게

인사 받는 공주님

그대를 알고 난 뒤 나는

세상 모든 것이 아쉬운 하녀    

그대를 알기 전 나에게 인내심은

삶의 안전한 안내자였지만

그대를 알고 난 뒤부터 인내심은

옥중에 나를 가둔 간수가 되었죠    

생각해 보세요

그대를 알기 전의 내 모습을요

그대가 내 마음이 탐난다고 하여

나는 고민도 없이 기쁨으로 드렸어요    

잘 보세요

내게서 망설임도 없이 받은 내 마음을

지금은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그대는 안중에나 있나요    

그대를 알고 나서부터는

때때로 삶의 바른길을 외면했어요

그러고 나서 나를 인정하지 않았죠

나보다 소중한 그대 때문에요    

나는 이제

당신의 감옥에서 자유로울래요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내가 받을 종신형이라면

감옥 안 평생의 자유를 택하겠어요    

그 어떤 망설임도

나를 흔들지 못해요    

그대가 둔 사랑의 덫에

내 모든 것이 빠지게 하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그대    

어디로 가고 있나요    

이렇게 애원해도 모른다면 

차라리 그리워도 그리움이

영원으로 치유되어

아픔을 모르게 되는

단두대에 올라가겠어요    

그대,

나를 한 번이라도 

만나러 와 주세요    


덧붙임 : 이제는 노래도 부르지 않고 시도 쓰지 않으리. 부르던 노래도 관두고 쓰던 시도, 써진 시도 모두 다 강물에 흘려보내리. 내 행동을 다스리는 것도 바로 나 자신이어야 하며 결코 주변의 영향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항상 신중하게 처신하고 본분의 의무를 다하며 무엇보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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