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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이 Nov 01. 2020

제 5 장

41. 그래요, 나는 바보예요    


하루에도 몇 번을 

너에게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생각했었지만

마음의 걸음은 

늘 너에게로 향했다    

분방한 이 마음 어찌하면 좋을까

너의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얌전히 

제자리를 찾아갈 텐데    

그러므로 나에게,

너는 마법이었다

나를 변하게 만들었던

오로지 너만 볼 수 있는

주문에 빠지게 한 너는

나에게 사랑이었다    

너의 주문은 

너만 보는 바보를 만들고

너만이 풀 수 있는 열쇠를

깊은 강물 속에 던져버렸다    

"여름날의 소나기보다 시원하고

먼 산의 무지개보다 안타까운 그대,

이제는 사랑을 더 잘할 수 있는

주문을 나에게 외워주세요"    

그 안에서 숨이 멈춘다 하여도

그 안이 네 안이라면 

나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아!

겨울날 눈 덮인 골짜기보다 

푹신하고 따뜻한 그대여,

피할 수 없는 주문을 외워

나를 더 세게 안아주세요"    

다시는 너의 사랑을 의심 않으리

다시는 너에게서 도망치지 않으리    

내 모습 설령, 너에게

지평선 끝자락 소실점으로 사라져도

마법 같은 너의 주문은 언제라도

나에게로 와서 다시 데리고 갈 테니까    

축축한 안개 위에 누워만 있어도 좋으리

그곳이 너와 함께 있는 데라면    

다시는

숨넘어가도록 입 맞추지 않아도

나는 하염없이 좋으리

너만 내 곁에서 숨 쉬고 있다면    


덧붙임 : 나는 이렇게 희미한 현기증을 안고 작은 불빛 덮은 책장 넘기면서 나 혼자만 깨어난 이 시간이 좋다. 동이 완전히 터 밤이 잠옷을 갈아입고 새벽을 맞으면 내게는 더 무거운 현기증이 찾아 왔지만 그 흐릿한 숨결이 내 마음 완전히 풀어놓는 것도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42. 당신과 함께    


사람들은 말하죠

당신은 꿈만 쫒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나는 알아요

당신의 꿈은 모두에게 꿈을 준다는 걸    

사람들은 모르죠

꿈꾸지 않는 사람은 얼마나 바보인지

그건 마치 죽음과도 같아요

죽었을 때 자기 죽음을 모르는 걸요    

사랑도 그래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고 있는지를 모르죠

다만, 사람들은 알아요

당신 곁에 있는 내 작은 표정만으로도    

나는 당신의 손을 잡겠어요

당신의 길이 위험하다 하여도

당신의 꿈이 한낱 웃음이든

당신은 내 슬픈 과거를 잊게 해 주었죠

그러므로 당신은 지금이고 미래에요    

실망하게 될지 모르죠

결코 이어지지 않을 운명으로

하지만 나는 알죠

상처가 두려워 상처받기를 피하는 건

가장 뼈아픈 상처가 된다는 걸    

이제 내 손을 마주 잡아줘요

당신이 꿈꾸는 그 꿈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 세상으로

나갈 준비가 되었어요    

당신이 함께라면 

그 무엇도 나를 막지 못해요    

당신과 함께라면

그 어떤 두려움도 두려움이 아니죠    

나와 모든 것을 함께 해요

당신과 모든 것을 함께 할게요   

 

덧붙임 : 누군가 내 차를 긁고 갔다. 새 차나 다름없는데 벌써 두 번째다. 속상한 마음 접고 뜨거운 볕 아래에서 그 흔적을 벗겨냈다. 나는 경찰관이니까, 더군다나 교통사고조사계에서 근무라는 경찰관이니까 더욱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5분 만에 쓰고 다시 읽어보지 않아요. 떨림은 오로지 쓰는 순간 절정에 다다르는 법이니까요.                                                                                                                                                

43. 그리움    


달빛이 은은하게 풀어져

골짜기마다 흐르는 이 시간

나는 잠들어 있지 못하고 

너도 저 달빛을 볼까 생각한다    

그리움은 방황하게 만드는가

달빛에 이끌려 내 마음 갈 길도 모르면서

이 산 저 산을 넘어 다니네    

아! 

네가 있는 곳으로 갈 수만 있더라면    

벌써 오래전 보았던 너의 모습이

내 기억 속에서 아련하게 흐려지는 것

그날,

너와 나는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아름답다는 것

언제나 덧없는 그리움 되어 

너만 생각나게 하는 것

아름다운 것들은 

그래서 이리도 쉬이 사라지는구나    

서쪽 하늘로 따라가는 내 마음

뜬 달 저물어 가는 움직임 소리에

내 모든 귀를 기울인다    

너도 내가 보고 싶다고 하는 말소리

그 말 들리는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

너도 같겠지    

달빛이 점점 더 흐려져가는 건

네가 바라보는 눈이 나와 같이

글썽이고 있기 때문이란 걸 안다    

너는 나만큼이나 나를 좋아했지    

이렇게 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너는 내 가까이에 있는 것

그러나 네 가까이에 내가 있어도

너는 아직 잘 모르고 있나 보다    

그리움이 사랑의 마약이라면

난 이미 중독된 것

저 달의 빛이 송곳이라면

난 이미 수천 번을 찔린 것    

내가 이 세상사람 아니면

너도 살았어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달이 완전히 기울었으니

서둘러 몸단장하고 

너를 잊어버릴 수 있는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해야겠다    

언제나 그리운 이여!

나를 그리워하는 그 마음 

나와 같이 잠시 접고

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길.  

  

덧붙임 : 장마의 시작. 구름이 유난히 변덕스러워지는 이때, 변하지 않는 건 오로지 구름 뒤에 몸을 감추고 있어도 햇볕에 못 이겨 잠시 그 존재를 몰라도 달 뿐이다. 달을 자주 본다는 것, 안 보이면 마음속으로 빌게 되는 마음, 그건 누군가를 사무치게 그리워할 때나 자신도 모르고 하게 되는 행동이다                                                                        

44. 이별하는 길   

 

그대, 이제는 눈을 떠요, 

이건 꿈이에요    

그녀, 그대를 잊었어요

하루 두 번, 생각하기로 했으니까요    

그대, 그녀는 알고 있었나봐요 

그대가 하루 중 단 두 번만 

그녀를 기억한다는 걸 

그렇지만 그녀는 빛과 어둠 안에서 

온종일 그대를 기다렸어요    

어떤 장식으로도 꾸미지 않던 순간, 

그때, 그대와 그녀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수 없는 색들로

물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한낮 정오의 그대만, 한밤중 자정의 그녀만

어둠의 흰 빛과 검게 투명한 빛만을 보았죠    

그 빛마저도 이제는 

그녀 혼자만이 볼 수 있어요    

그녀는 알고 있어요

그대가 그녀를 잊었다는 걸 

그녀에게 하루 단 두 번 멈추는 그대를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단 걸

흐르지 않는 해와 달로 알았어요    

그녀는 이제 전부 다 알아요

마음이 커질수록 그대 숨은 좁혀졌단 걸

하는 수 없이 마음 비울 때 

그대도 같이 꺼내주었어요    

그대를 죽이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그는 살아서 날아갔고

해와 달은 죽어서 영원히 멈췄죠    

그대여! 이건 꿈이 아니에요

그녀는 영원한 꿈을 꾸고 싶었지만

하는 수 없이 결국 눈을 떴어요    

눈떠 보니 헤어지는 길이었군요   

 

덧붙임 : 일보다 마음이 급하고 치워도 버려도 버려야 하는 건지 또 고민하게 되는 게 이사 준비하는 과정 같다. 아이들 등교와 등원을 쉬고 집에 갔다. 다행히 비는 알맞게 더위만 식혀줄 정도로 내렸고 내 마음처럼 아이들도 외갓집의 정경 모든 것에 들 뜬 모양이었다. 당일치기로 서둘러 다녀오는 길, 아버지는 부슬부슬 비를 맞고 아이들을 텃밭으로 데리고 가 한참 제멋을 부리는 고추, 오이, 옥수수, 가지, 토마토, 포도, 그리고 자두 열매를 보여 주시면서도 아이처럼 즐거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셨다. 나는 막 핀 연노랑의 땅콩 꽃을 보았다. 어쩌면 저리도 앙증맞고 예쁠 수 있을까. 아쉬움을 남기도 돌아오는 차에서 작은아이와 막내는 멀미 섞인 고단함에 잠이 들고 큰아이만이 깨어있는 시간, 큰아이 이 한마디 말에 난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할아버지가 부추 뜯으면서 엄마가 부추전 좋아한다고 얼마나 좋아 하셨는 줄 알아요?”     

어릴 때 고조할머니까지 함께 사셨던 것이 기억나니 삼촌과 같이 우리 집은 총 4대가 함께 사는 아홉 명의 대가족이었다. 그중에 나는 가장 어린 막내였다. 어린 엄마는 하필 종손이던 아빠에게 시집와서 그 많던 집안의 어르신들과 얼마나 고된 시집살이 하셨을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 맘이 짠하다. 나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아버지가 직접 만들어 놓은 그네 의자에 앉아 그 옆에 나와 함께 커가는 단풍나무와 한참 이야기 나누고 동산에 늙은 떡갈나무들이 비바람에 흔들릴 때 내는 음악 같은 소리에 마음 처연해 오기도 했다. 내게 소원은 몇 가지 없다. 정말로 몇 가지 없다. 엄마 아빠가 비록 조금은 건강하지 못하시더라도 오래오래 우리 곁에 머물러 계셔주길 바라는 게 그 소원이다.   

                                                                     

45. 사랑이 잔인한 이유에 대하여    


넌 내 첫사랑, 마지막 이별    

이제 넌 십진분류표를 달고

서가의 가장 편리한 위치

까치발 없이 뺄 수 있는 높이서 

사랑해 보지 않은 누군가에게

선택받아 읽히길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데리고 참 많은 델 다녔지

거기서 우리가 했던 일들, 이야기들

쪽 번호 매긴 목록이 되어 버리고

나는 순서대로 펴보지 않았어도

마치 수십 번도 더 읽었던

로체스터가 제인에게 고백하는 장면처럼

사진으로 현상한 듯 완전히 선명해서

그림으로 그리라고 해도 막힘없었지    

만발한 장미꽃이 무거워

가시 줄기도 늘어져 경의를 표하는

풀꽃 내음 마냥 번져가던 비 맞던 밤

너는 나의 첫사랑, 로체스터가 되고

나는 그렇게도 애원하던 제인이 되었지    

사랑이 왜 잔인해지는 줄 아는지 

언젠가 넌 내게 물었지    

묻던 내게 말하고 싶지 않았던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답이라

말이 현실로 된단 게 두려웠어    

사랑으로 아파본 적이 있으면

마음 먹은 대로 언제라도 연인을

증오의 대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사랑은 잔인한 거지    

너는 이제 책이 되었고

내 몸 가장 중요한 자리

하지만 가장 위험한 장소

무엇보다, 가장 버리고 싶은 데

그곳, 심장에 꽂혀있지    

앞으로 네가 있을 곳은 거기뿐

너를 쳐다보지도 만져볼 일도

다시 또 꺼내 읽어볼 일도 없다    

나는 제인만큼 어여쁘지는 않았어

그래도 그만큼 사려 깊고 영리했지

또 사랑할 땐 따뜻하고 숨김없었지    

사랑이 잔인하다고 단언한 건,

너는 로체스터처럼 대놓고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어    

나는 무척 제인을 따라 애썼지

하지만 그 흔한 슬픈 결말로도

맺어지지 못한 무엇도 아니었어    

내 몸 전체는 책장이야

넌 수천 권 책 들 중 단 한 권이고    

난, 네가 내게 꽂힌 줄도 모르는

한없이 게으른 책장 주인일 뿐    

넌 내 첫사랑

그리고 또 마지막 이별    

먼지 뒤집어쓰고 색 바래져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가도

네게 영원히 제목도 주지 않겠다    

그래서 사랑은 잔인한 것.    


덧붙임 : 현재가 그 자체로 실재하기에 중요한 게 아니라 과거와 어떻게 잘 화해했는지, 또 미래와 어떤 식으로 계약을 했는지, 그래서 당장 무엇을 하면서 지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다. 분명히, 누구에게나 이제 사랑을 할 수 있는 청춘은 끝났다고 느끼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실제로는 그 느낌보다 더 훗날의 일이 될 것을 깨닫게 될 것을 알고 있다. 아닌 것을 억지로 맞추려다 보면 결국 잊어버리기도 어려운 비겁한 후회만 남는 것, 대상에게 원망이 쌓여가는 만큼 마음도 괴로워지는 법. 사람들은 종달새 지저귐이 듣기 좋다고,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나에게는 매일 같은 노래만, 흘러간 노래만 반복해서 부르는 거로 들릴 뿐이다.  

  

46.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는 것    


산자락에 걸린 구름이 심상치 않다

무엇을 감춘 사람처럼 안정은 없고

흰 구름 어울린 하늘과 동떨어진 것이

무엇보다 너 가는 길이 바쁘구나

모든 바람과 새를 앞질러 가는 게 보인다    

나도 모르게 가던 걸음 서고

그 구름에 온통 마음 뺏긴 줄 모른 채

왜 다른가만 을 궁금해 한다    

오늘같이 해가 높은 날

너 같은 잿빛 구름은 필터에 불붙인 신사 꼴

나는 내 가던 길 어디인지 까맣게 잊어먹고

너, 잿빛에 영혼까지 팔린 듯 딴생각만 난다    

아, 그래

네 근원은 저 산 중턱 불꽃이었구나

고상한 구름인 척 속이려 들던 연기에

난 한눈팔아 속아 넘었구나

그래봤자, 넌 물방울도 없어 비도 못돼

내 몸 갈증도 풀어주지 못하는

허영만 꽉 찬 오색 애드벌룬 같다    

구름과 섞여 나 좋아하는 구름 인체

발랄한 나와 어울리고 싶어서

왜 다른 구름과 쉬이 친하지 못한 연기일 뿐

쾌쾌한 먼지 덩어리였던 거로구나    

한낱 먼지였던 네게 

내 마음 모조리 뺏기고

갈 길도 잃어버리고 

얼마나 여기에서 방황했던가.    

넌 냄새를 못 감춰 내게 들킨 거다

그 옛날 사랑하던 나처럼

내 맘 못 감춰 그에게 들켰던 것처럼    

그러고 보니 너도 측은하다

나, 너 아니면 

이미 저 산 넘고도 남았을 텐데

지금 막 도망친 해가 그 자리에다

불을 질러놨구나    

차라리, 저 노을, 불꽃같이 타올라

내 온몸 쉬운 먼지처럼 변해서

미풍에도 이리저리 쓸려 다녔으면

그렇게 해서 다 잊어버릴 수만 있다면

당장 저 불길 속으로 뛰어들 텐데    


덧붙임 :  안의 너를 한번은 떠나와 봐야 너에게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늘 별자리로 운세를 점쳐 미래를 약속하던 점성술사같이 너의 말 모든 것이 내 마음 두근대게 했지만, 허공에 쓴 언약처럼 헛된 기대만 가득 남기고 소멸한 공허한 약속들뿐이었다. 난 그래서 나부터 죽이고 다시 태어나야지 그런 맘 든다.                                                                                                                    

47. 원 투 쓰리    


초록 지붕은 1980년대 집

지붕 아래 붙어 하늘 닿은 집

원, 투, 쓰리, 그리고

숫자를 잘 세는 한 사람 살죠.    

기침 소리, 밥 먹는 소리, 잠꼬대 소리

옆집 아저씨 기상 시간, 잠든 시간

설마 하겠지만, 방귀 소리까지 들리던

마법 같은 집이에요    

원투쓰리는 꼬마 요정들

원은 자유로운 영혼

신발도 집 밖에 벗기 일쑤

투는 셈하기 왕

열 개의 폐로 온종일 달리는 선수

쓰리는 한 입술 오케스트라 지휘자

노벨문학상 꿈꾸는 사탕 수집가    

원투쓰리를 본 적이 있다면

한 번만 보지는 않아요

그 모습 하도 특별하여

누구라도 돌아서 더 한번 보죠    

나는 숫자를 아주 잘 세요

그래도, 원투쓰리까지만 똑바로 

그다음부터는 못 세어요

셀 줄 알아도 몰라요

마음속으로만 세다 보니

어디만큼 세고 있나 잊어먹죠    

초록 지붕 아래 꼭대기 집

서랍장은 층계참이 되고

작은 욕조는 세상 넓은 시냇가 되고

모든 벽 암벽타기 기둥 되어

천정은 숨바꼭질 최고의 숨을 곳

주황색 전등은 세상 멋진 불꽃놀이 되어요    

원은 열 둘

투는 열, 

쓰리는 일곱

그리고 숫자를 잘 세는 나, 마흔둘

모두 합하면 예순일곱

백까지는 남았지만

넷 같이 사는 이 집에서는 금방이죠    

나는 숫자 세기 문제없어요

그렇지만 언제나

원투쓰리밖에는 안세죠    

예순일곱은 아주 쉬워요

당연히 가장 쉬운 백도 잘 알죠

그러니까 난 언제나 가장 어려운

원투쓰리까지만 세어요

더 셀 줄 알아도 셀 줄 모른다 하죠

그냥 기다려요, 그냥 바라봐요

그러다 또 세죠

원, 투, 쓰리, 이렇게

원, 투, 쓰리까지만    


덧붙임 : 여름이 좋은 점, 이른 새벽도 전등 없이 글자를 쓸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조금씩 밝아지는 것이 확실하다는 점. 어렴풋한 풍경이 점점 선명해지는 걸 경험 할 수 있다는 점. 나에게는 사내아이가 셋. 남들이 아들만 셋이라고 말하면 웃으며 그런다. "아들만! 이라고 말하면 왠지 실패한 느낌이잖아요. 아들이 셋이에요!!" 라고 해야 그 원투쓰리 존재가 더 소중해진다. 난 우리 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여자주인공. 나보고 예쁘다고 말해주는 유일한 이성이 집안에 하나도 아니고 셋이다. 그러니까 나는 행복한 여자이다. 원투쓰리의 또 다른 의미- 잘못한 행동을 꾸중하기 전 기회를 주는 마지막 순간이자 기다림,     

“자, 이제부터 열까지 셀 때까지 원래대로 해 놓지 않으면 혼난다.“    

그래도, 나는 언제는 원투쓰리까지만 반복해서 세었지 열까지 세 본 기억이 없고, 또 다른 의미는 원투쓰리를 속으로 말하면서 나 자신의 감정도 함께 다스리는 것이다.     

”아! 또? 얘들아, 엄마 원투쓰리 하신다. 어서 장난감 정리하자.“    

                                

48. 쿤데라의 농담처럼    


7월이 비구름 봇짐 가져다 놓으면

게으른 해는 놀란 척 한발 높이 물러나지만

그 움직임에 나도, 너도 그만큼 높아져

더운 볕 못 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음에도 없는 고백하고 돌아서면

바람 소리도 야유로 들리고

어깨 위 공기마저 젖은 솜 같았다

그때, 가슴 철렁하고 떨어져도

주워 담지도 못할 미련한 후회만이

한 겹, 두 겹 축축한 종잇장으로 

얼굴 가려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거짓으로, 숨기며 사랑이 아니라고 고백한 것

결국, 나에게 돌을 던지던 일이었다는 걸    

참아야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지

웃음도 미움도 없는 표정, 무표정해야지

눈 한번 깜박이지 말아야지    

그러면 나는 완전히 거짓말쟁이

두 눈 속 고인 눈물이 쇠구슬처럼

둔탁한 소리로 뚝 뚝 뚝 떨어질 테니

그럼 네 앞의 나는 끝장이다    

7월이 두고 갔던 비구름 봇짐

이제라도 풀어놓아 마음껏 맞아야지

그러면 속일 수 있을까    

숨을 참지도 말고

눈 깜박거릴 때

눈물 감출 이유도 없으니까    

비구름 덕에 너를 속일 수 있었다

나만 알고 있는 은밀한 만족감

이다지 큰 서글픔이 될 줄 몰랐네    

잊을 수 있을 때,

온전한 정신 오기 전에

해 다시 나타나기 전에

모두 다 잊어버려야지    

너무나 기쁘다

이 비를 맞을 수 있어서    

이제, 5분만 미워하고

단 1분만 울어야지

7월 소낙비는 금방 끝나니까    

안녕!

이제는 영원히 안녕!   

 

덧붙임 : 결말이 불행하다는 것을 생각한 이상, 현재로서 가장 현명한 대처는 그 일을 최대한 열심히 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실패하는 중일 줄 알아도 실패할 걸 알고 있더라도 해 보는 것, 지금 해 볼 수 있는 여건이 된다는 자체로 만족할 줄도 알아야 한다.                                                                                                            

49. 가장 예쁠 때

   

나 그때 스물 넷

태어나 예쁘단 말 가장 많이 듣던 때

죽음의 유혹을 알면서도 넘어갔죠

내 문제 아니어도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건, 내 생명의 은인

당신의 문제였으니까요    

당신은 다섯 번째 주인공

5번 자리 주인이 되었어요

내 문제 아니니 나는 자리도 없었죠

하지만 머물 수밖에 없었어요

당신은 손발 묶인 채

온몸 절망뿐이었으니까요    

나는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죠

앉은 당신 한걸음 뒤에서 보았던걸

파란 무명에 눈물방울들

물속 잉크처럼 번지던 것을    

소리 없이 흐느낌도 없이 운다는 게 

얼마나 가슴 철렁 무너지는 건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알았으니까요    

거친 가위 소리에 눈 따라가면

땅바닥 긴 머리카락 수북수북 쌓이고

어쩌면 이렇게 가벼울 수가

당신은 그날 갓난아기 머리 같았어요    

아기처럼 잠든 당신 보고 나도 따라 했죠

태어나 처음으로 단 두 번의 가위질

등허리 덮던 그 긴 머리 귀밑머리 되었죠

나도 울었어요. 당신처럼

소리 없이 흐느낌도 없이 그렇게    

나 그때 스물넷, 

눈만 내놓고 살았죠

그래선지 예쁘단 말 참 많이 들었어요    

당신은 5번 자리 주인

나는 당신의 모든 것    

내 나이 스물넷 

눈으로만 말하니 더 예뻤어요

당신은 그곳의 꽃

M3은 그것의 꽃이었으니까요    

20년 된 꿈같은 이야기죠

나는 오늘도 눈만 내놓고 살아요

그래선지 예쁘단 말 참 많이 들어요    

머리 깍지 않아서 좋아요. 여기는

눈만 내놓고 다녀도 좋아요. 지금은

비 오면 그 비 그대로 맞을 수 있어요

유리 사이 가림 막으로 구경만 하지 않죠

눈 오면 아무 데나 거닐며 만질 수 있어요

유리 벽 너머 그 촉감 상상만 하지 않죠    

그때 나는 가장 예쁜 스물넷

지금 나는 나를 가장 잘 아는 마흔둘

가장 예쁠 때는 오래전 일이죠    

하지만 나는 지금이 좋아요

마음대로 숨 쉬며 계절 가는 거

구경만 하지 않는 여기가 더 좋아요    


덧붙임 : 엄마가 아주 편찮으실 때 나는 한창의 아가씨였다. 언제 돌아가시게 될 줄 모르는 엄마와 나는 누구도 모르는 곳으로 들어가 머리 깎고 두건 쓰고 마스크 쓴 채 1년을 넘게 살았었다. 봄에 개나리꽃 한참일 때 가서 이듬해 그 개나리 다시 필 때 나왔으니까 모든 계절을 똑같은 옷을 입고 지난 것이다. 문득 돌이켜보니 4번 민영이도 9번 자영이도 내 동갑내기 예쁜이들이라 그 모습 변하는 게 두려워 더 서둘렀단 생각도 든다. 난 서글프지만, 그 애들이 과자 먹던 모습도 기억난다. 엄마는 내 곁에 계시고 내 머리카락은 다시 또 등허리 덮여있다. 엄마는 그 무균실의 꽃이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M3을 백혈병의 꽃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어쩌면 엄마는 여전히 내 곁에 계시는 줄 모른다. 마스크를 쓰고 지낸 지 몇 달째 되고 나니 새삼 그때가 생각난다..                            

50. 거짓말    


나 꼬마일 때 우리 아버지 항상 그러셨지

'모름지기 사람은 정직해야 해'

그러니까 우리 집 가훈은

'거짓말을 하지 말자'    

그 액자 우리 집 가장 잘 보이는 곳

아버지 거기에 걸어 둔 게 싫었어

학교에서 우리 집 가훈 발표하기 할 때

친구들 모두는 '화목, 평화, 사랑' 

부끄러운 나 모기 목소리로 말하면

눈치 없이 착하기만 한 우리 선생님

미리 알고 계셨던 모양이야    

다 듣도록 큰 소리로 말해 볼까?    

부끄러워 나, 울기 직전에야 겨우

'우리 집 가훈은, 거짓말하지 말기'    

내 마음도 잘 모르는 우리 선생님

'정말로 훌륭한 가훈이구나' 하셨지    

나는 거짓말하고 싶을 때 많아

거짓말 하면 얼굴이 울상이 되어

금방 들키고 오빠같이 언니같이

아버지께 손들고 무릎 꿇기 벌 받았어    

그런건 좋았어. 장난 같았거든

하지만 가끔 통증 느꼈어

마음속 나를 겨눈 활에 맞은 것 같이    

난 늘 생각했어, 이 담 어른 되면 

우리 집 가훈은 영원히 안녕이라고    

나는 너를 알았어! 만났으니까

그날부터 거짓말만 하려고 했었지

내 마음 보여주는 건 싫었으니까

거짓말로 감추면 되는 줄 알았거든

거짓말도 억지로 하면 역시 탈이 나    

너를 점점 더 잘 알게 되면서

너는 나 같지 않더라 그랬어

너의 말을 믿기 어려운 거야

믿기지 않은 말 믿고 싶은 거야    

나도 따라 변하는가 봐    

밥은 먹었니? 응 먹었어요

아픈 데는 없고? 괜찮아요

잘 지내는 거지? 아주 잘 지내요    

밥을 먹어야겠다. 마음 없고

한여름 솜이불 모자란 열이 나고

하도 웃어 난 눈물에 눈이 부은 거라

난 너에게 뻔한 거짓말을 했지    

웃음이 나왔어.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데

등줄기에 서늘함까지 

나도 할 수 있구나! 맘만 먹으면

그 어려운 거짓말    

보고 싶다, 보고 싶지 않아요

그리워, 난 그리운 맘 몰라요

너 예뻐 정말, 예쁜 척할 줄 몰라요

정말 정말로 보고 싶다, 

'정말'이란 말, 믿음 없어 듣기 나빠요    

그럼, 난 아주 잘 지내

언제보다 지금이 좋은걸

난 이제 거짓말 선수 된걸

꼬마 때도 말 안 듣던 아인걸

난 지금이 가장 좋아

기분이 좋단 게 이런 줄 처음 알아    

난 거짓말 참 잘하지

어릴 때 가훈, 지금 내 가훈 되었지만

난 여전히 말 안 듣는 어른인걸    

거짓말하기 정말 쉬운 줄

난 무엇이든 더디게 아니까

늦게 배워 겨우 따라 한 정도    

거짓말하기는 정말 쉬워

그래서 지금 너무 좋아   

 

덧붙임 : 오전 중 현관 근무를 서니 오후와 다 못 풍경이 다르다. 사람들 옷차림이 더 반듯하단 거, 머리 모양이 조금 더 정돈되어 있다는 거, 그리고 반전으로 보이지만 오후보다 더 오후 같은 표정들을 짓고 있다는 거. 난 싱그럽고 기분 좋다. 무엇을 해도, 어디에 있어도 좋다. 종이와 연필 한 자루만 있다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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