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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과향이 나는 사람

못생긴 열매 몇 알에서 삶의 향기가...

by 물들래

거울을 자주 보는 편이 아니야

화장대 앞에 서있는 시간도 많지 않아
어려서 예쁘다는 소리 듣지 못했지
못난이 세 자매라는 인형이 있어
화난 표정, 우는 표정, 웃는 표정의 세 자매
인형 셋 앞에 서면 나를 보는 것 같아 정겨웠지
그럴 때 언제나 떠오르는 향기가 있어, 바로 모과향이야

유년의 뜨락 서성이다 기억 하나 건져 올렸어

여섯 살 한 여름, 하얀 바위 위 봉숭아 꽃물
조그만 돌멩이로 짓이긴 기억이 뚜렷해
검붉은 봉숭아물 바위에 엉겨 붙어 있었지
그 시절 노을 사이로 퍼지는 향기가 있어, 바로 모과향이야


초등학교 여름방학 외갓집
외삼촌 지게 위에서 만나는

초록초록한 시골풍경은 경이, 그 자체
키다리 외삼촌 건강한 보폭으로

기분 좋게 흔들리는 지게 위에서 만난 경치는

황금박쥐 만화영화보다 흥미로웠어

지게에서 만난 세계는 외로움을 달래기에 충분했지
가까운 하늘에서 마주한 나무, 선홍빛 탐스러운 열매

손끝으로 감지한 여덟 살 꼬마, 복숭아 한입 베어 물지

온 세상이 입안 가득 담기고 터지고 섞이고 어우러졌어

그 순간 녹색풍경 사이로 퍼지는 향기가 있어, 바로 모과향이야


숙모 따라 계곡 빨래터에 갔어

돌이끼에 미끄러져 깊은 수렁에 빠졌지

공포였고 환희였지, 동시에 두 눈 뜨고 바라본

물속 세상은 신비로웠지, 죽었구나 했을 때

숙모가 손목을 낚아챘어, 지금도 여덟 살 그 시절

물속 풍경은 강렬하게 각인되어 쉽게 퇴색되지 않아
암갈색, 녹색 이끼, 검은 동공, 은빛 물살, 따뜻한 손길
낱낱이 떠올릴 때마다 퍼지는 향기가 있어, 바로 모과향이야


자연방향제 자동차 안에 두곤 해
가장 만만한 방향제로 모과만 한 게 있을까
모과 껍질 만질 때의 끈적거림조차 다정한 인간 체취 같아
모과가 풍성한 계절 오면 그리운 추억 조각 모으곤 해
조각 속에서 맡게 되는 향기가 있어, 바로 모과향이야
많은 이들에게 모과향기로 기억되는 사람이면 좋겠어

못생긴 열매 몇 알에서 삶의 온기가, 삶의 향기가

많은 것을 견뎌낸 사람의 고유한 향기가 있어, 바로 모과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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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2001년 겨울에 쓴 글을, 2024년 12월에 시로 다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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