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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까치 Mar 17. 2024

어차피 찾아올 고요한 저녁인데 [20/365]

2024년 3월 17일, 21:00

꼭 가야 하는 먼 길이 있는데, 일어나 보니 비바람 몰아치는 궂은 때가 있다. 이런 경우 달리 선택지는 없다. 꼭 가야 하는 길이므로, 그냥 간다. 도착해서 쓸 우산을 하나 챙기고, 가는 길을 미리 한 번 훑거나, 평소보다 주의를 기울이며 느긋하게 운전하는 게 그나마 현명한 사람들의 대처다. 궂은 날을 개게 할 방법은 없다.


‘인생은 당해지는 것’이란 글을 본 적이 있다. 크게는 태어나는 것부터 작게는 매일의 날씨까지,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일은 사실 속수무책으로 당해지는 것이며,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한결 편하게 다룰 수 있다는 내용이다. 나는 이 명제가 ‘힘을 뺀다’는 말과 맥이 닿아있다고 생각했다. 운전이든 운동이든 힘을 빼고 그저 앞에 놓인 것에 집중해야 더 오래 더 멀리 도달한다.


오늘은 꼭 그런 날이었다. 간밤에 아들이 뒤척이는 통에, 아내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나도 요 며칠 무리한 통에 무척 피로했다. 엎친데 덮친 격 창밖은 황사로 희뿌옜다. 오늘의 육아가 녹록지 않을 것 같았고, 잔뜩 예민해져 종일 아내에게 날 선 말들을 건넸다. 아들을 재운 밤은 결국 여느 날처럼 고요했다. 침대에 앉아, 아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같이 나눠먹으며 사과했다.


당해진 상황은 무심하게 받아들이고, 눈 앞의 일들에만 느긋하게 대처하는 것. 오늘의 내가 잘 해냈다면, 어차피 찾아올 고요한 저녁이 덜 미안하지 않았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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