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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까치 Mar 20. 2024

장모님 오시던 날 [22/365]

2024년 3월 20일, 21:27

아침 일찍 장인, 장모님이 올라오셨다. 수박 두 통, 복숭아 한 상자, 간시미 한 통에 온갖 반찬을 얼리고 넣어서, 동트기 전 어둑한 도로를 달려서 오셨다. 손주가 보고 싶으셨다고는 하나, 여전히 아기 같은 딸이 더 보고 싶으셨으리라.


두 분이 아침 일찍 올라오시는 게 참 좋다. 현관문이 열리고, 딸 위한 마음 그득 담긴 상자들이 옮겨지는 소리가 좋다. 내 아들과 두 분이 재회하는 장면을 보는 것이 좋다. 세 식구 살던 집이 아침부터 복닥거리는 게 좋고, 냉장고와 식탁이 손 넣을 틈 없이 빼곡해지는 게 또 좋다.


한 달에 한 번, 가정의 달과 두 분 생신을 얹으면 일 년에 대충 스무 번. 10년이면 이백 번, 20년이면 사백 번이다. 두 분과 얼굴 맞대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기회는, 만남의 횟수로만 치면 사백 몇십 번이 남아 있겠다는 이야기를 어젯밤에 아내와 나눴다.


서글픈 일이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저 빠짐없이 즐겁게, 즐겁게 보낼 수밖에.




작년 여름에 이런 토막글을 썼고, 같은 해 겨울에 장인어른이 세상을 떠나셨다. 퍽 와닿지 않아 무심히 세어봤던 앞으로의 수백 번 만남에서, 채 열 번을 제하지도 못한, 황망하기 그지없는 이별이었다. 그로부터 3개월 반이 지났고, 오늘 장모님이 무척 오랜만에 딸을 보러 올라오셨다.


한 동안 장모님과 통화할 때마다, 나는 ‘며칠 지내다 가시라’는 말씀을 잊지 않고 드렸다. 늘 알겠네 고맙네 하셨지만, 나는 그녀가 한 동안 그 어디에도 다니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장모님과 장인어른은 꽤 살가운 부부였다. 어딜 가든 함께였고, 혼자 다녀온 좋은 곳은, 꼭 함께 다시 찾는 분들이었다. 장모님이 홀로 어디엘 가시든, 가서 어느 방향을 바라보시든, 장인어른에 대한 생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딸네 집에 오는 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바람 많던 오후에, 아내와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장모님을 기다렸다. 두 분이 도란 도란 다니던 세 시간 남짓한 여정을, 낯설고 조용히 달려오고 있을 장모님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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