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차 베를린
2019/10/08
예전엔 공항 하나은행에서 환전을 하면 자동으로 여행자보험에 가입되어서 보험에 대해선 별 신경을 안 썼는데 환전하면서 물어보니 서비스가 끝났다고 한다.
막상 보험 없이 가려니 좀 불안했다.
출국장 입구에 있는 보험사에서 여행자 보험에 가입했다.
기간이 한 달이라 88,000원으로 생각보다 비쌌다.
역시나 미리미리 준비를 안 한 대가다.
꽤 많이 준비했다고 생각해도 늘 구멍이 있다.
비행시간은 11시간 30분 정도.
독일과의 시차는 서머타임 적용 시 7시간, 아닌 경우 8시간이다.
오후 12시 비행기이니 프랑크푸르트 도착하면 pm 4:30이다.
긴 비행을 마치고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여 게이트를 빠져나와 유리문을 통과하는 순간 아차! 면세점에서 산 향수와 샴푸를 비행기에 두고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돌아가서 물건 좀 가지고 오면 안 되냐고 물었더니 안내 데스크에 앉아계신 중년의 여직원은 표정의 변화 없이 No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역방향으로 열리지 않는 유리문이 너무 야속했다. 저 문만 지나서 돌아가면 되는데..
아시아나 프랑크푸르트 지사에 전화를 걸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승객들이 다 나오고 난 후 승무원들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승무원에게 부탁하여 함께 갔더니 데스크 직원이 남자로 바뀌어 있었다.
승무원의 힘일까? 아니면 사람에 따라 융통성의 차이가 있는 것일까?
내가 아는 한 독일인은 융통성이라곤 1도 없다고 들었는데 말이다.
게이트 쪽 직원이랑 전화통화를 하더니 다시 출국 검색대를 통하여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심지어 미소까지 지어 보이면서 말이다.
다시 짐을 검색대에 올려놓고 심사를 받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덕분에 또 하나 새로운 경험을 얻었다.
시간은 꽤 오래 걸렸다.
베를린 연결 편을 3시간 정도 여유 있게 예약하길 다행이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독일 직원들은 대체로 친절했다.
독일 공무원들 차갑고 깐깐할 거 같다는 건 괜한 선입견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오래전 독일을 처음 방문했을 때 언어도 통하지 않는 환경 속에서 만난 그들의 무뚝뚝함이 불친절함으로 각인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짐을 찾느라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잠시 의자에서 쉬다가 일어서 가려는데 옆에 에어팟 이어폰이 떨어져 있었다. 내건가 하고 확인해보니 아니길래 그냥 자리에 두고 자리를 떴다.
100미터 넘게 한참을 걸어간 거 같은데 뒤에서 어떤 할머니가 힘든 걸음으로 따라오시며 Hallo~ Hallo~ 하신다. 보니까 내가 물건을 떨어뜨리고 간 줄 알고 따라오신 것이다.
놀라웠다. 이런 친절은 대체 얼마 만에 느껴보는 것인지.
독일인은 차갑고 불친절하다는 편견을 반성함과 동시에 삶의 여유와 배려가 담긴 친절함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
루프트한자 국내선으로 갈아타기 위해서는 다시 검색대를 통과해야 했다.
대체 하루에 몇 번 검색대를 통과하는 건지..
샴푸가 액체이다 보니 포장을 다 뜯어서 기계에 넣어 돌리고 확인에 확인을 거듭한다. 그리고 다시 정성스럽게 밀봉을 하고 친절하게 웃으며 물건을 돌려주는 직원의 모습이 뭔가 새롭게 느껴졌다.
할 일을 기계처럼 정확하게 반복하면서도 삶에 찌든 기색 없이 동료들과 잡담도 하고 여유롭게 일하는 모습이 낯설어 보였다.
아마도 자신의 삶을 즐기지 못하고 오랜 시간 빨리빨리에 길들여져 일하느라 삶에 찌든 모습일 수밖에 없는 한국의 풍경과는 달라서였을 것이다.
과연 저들의 삶의 여유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이 궁금해졌다.
아마도 한 달 동안 살아보면서 아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을 가져보았다.
독일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실수를 하고 도움을 받으며 많은 것을 깨달았다.
역시 인간은 실수를 통해 배움을 얻고 겸손해지는구나.
베를린행 루프트한자 비행기로 환승했다.
비행기가 작아서 그런지 엄청나게 흔들렸다.
인상적인 것은 나이 지긋한 여성 승무원이었는데 비행기가 출렁거리는 상황에서도 웃으며 잡담까지 나누며 서비스하는 모습이었다. 저 베테랑 승무원이 저 정도로 여유 있다면 이건 일상적인 상황일 뿐 아무런 문제가 없겠구나라는 안도감이 들게 하는 장인의 모습이었다.
짧은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베를린 테겔 공항.
독일 수도의 메인 공항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오래되고 작은 규모였다.
수하물을 찾고 문이 열리면 바로 밖으로 연결되는 구조였다.
밖으로 나가니 날씨가 쌀쌀했다. 10월 초인데 한국 11월 초 정도의 느낌이었다. 기온 자체는 그리 낮지 않은데 뼛속을 후벼 파는 특유의 추위가 있다.
고맙게도 마중 나와준 조카와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버스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구글맵으로 측정을 해보니 택시로는 13분 거리인데 대중교통으로 40분이 나온다.
대중교통으론 시내를 거쳐 돌아가야 했다.
장시간 여행으로 지치긴 했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베를린의 대중교통 시스템은 저렴하고 환승이 촘촘하게 잘되어있어서 굳이 승용차를 이용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밤에 도착한 베를린의 첫 느낌은 오래되었고, 어둡고, 조용하다 였다.
숙소는 Theodor-Heuss-Platz역 근처의 예쁜 집 4층이었다.
동네도 조용하고 거리도 아름답고 집은 지하철 역에서도 가깝고 다 좋은데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독일의 경우 층고도 높고 1층이 ground floor고 2층부터 1층이 되는 개념이라 한국식으로 따지자면 6층 높이 정도는 되어 보였다.
무거운 짐을 낑낑거리며 끌어올리고 나니 유럽에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호스트가 영화계 의상 디자이너라 그런지 집은 깨끗하고 느낌 있게 인테리어 되어 있었다.
샤워를 하려고 물을 트니 수압은 낮지만 따뜻한 물은 잘 나왔다. 다행이었다.
현지에 사는 사람들이 하도 춥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라디에이터도 잘 돌아갔다.
침대는 푹신하고 이불도 두꺼웠다.
현지인들 얇은 이불 덮는 게 아닌지 우려되어 침낭까지 가져왔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난방이 잘 안 되는 으슬으슬 추운 나라에 사는 사람이 얇은 이불 덮을 리가 없지 않은가.
역시 사람 사는 거 어디나 다 비슷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