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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 변호사 Jan 29. 2024

선물

피아노 연주

살다가 보면 선물을 주고 받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물건 사러 돌아다니는 일을 세상에서 제일 귀찮아하는 저로서는 죄송스럽게도 선물을 준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주변의 따뜻한 사람들로부터 선물을 받는 일은 가끔씩 생깁니다.


선물 중에는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 선물도 저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구정이나 추석 때 대량으로 뿌리는 상품권이나 갈비셋트라고 하더라도 그 리스트에 제가 포함되었다는 자체만으로도 마땅히 감사하게 생각하여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선물 중에는 넥타이나 양주 등,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 고르기 편안한 것이 있습니다. 브랜드에 따른 가격을 외우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종류의 선물이 숫자로 액면 금액이 표시된 상품권과 똑 같은 효과를 줄 수가 있으니까요.


제 개인적으로 감동을 받은 선물은 그런 브랜드 넥타이나 고급양주보다도 개성이 있는, 정성이 있는, 문화가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어느 은행 관계자 분은 시오노 나나미가 쓴 영화수필집을 멋진 프랑스풍 카드와 함께 지난 추석 때 선물로 주셨는데 그 분은 언젠가 깔바도스라는 제목으로 제가 쓴 글의 등장인물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 때까지는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가 뛰어난 고증 실력을가지고 있는 딱딱한 역사작가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 책을 읽고서는 제가 크게 시오노 나나미를 오해하였다는 생각이들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굉장히 운치있고, 유머 감각이 있고, 발상이 신선한 매력적인 할머니였던 것입니다.


그 은행 관계자 분은 불문학을 전공하셨는데 이 번에 파리 지점장으로 가신답니다. 언젠가 파리에 갈 기회가 있으면 그 분과 함께 의사 라비크를 추억하면서 제대로 깔바도스를 마시려고 합니다.


최근 들어 재미있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법연수생이 수료를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검사를 지망할 것이냐, 아니면 로펌에 갈 것이냐로 열심히 고민하던 차에 자기가 아는 후배로부터 저를 소개받고 상담차 저를 찾아왔습니다.


2시간 가까이 이야기 하였으나 저도 뾰족한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끝말미에 자신의 아버지는 검사로 가기를 강력히 원하고 있다는 말을 하기에 아버지가 뭐하시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호남의 어느 소도시에서 공무원을 하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렇다면 무조건 검사 지망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특히 호남지방에서는 아직도 공직자에 대한 평가가 높은데 평생 공무원을 하신 자네 아버지 입장에서는 누가 뭐라고 하여도 아들이 검사가 되길 원하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지금까지 이 자리에 있게 해 주신 아버지에게 이젠 자네가 선물을 드릴 차례가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 친구는 제 조언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그 친구는 검사 지망을 하였다면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수줍은 듯이 예쁘게 포장된 선물 케이스를 제게 줬는데 뜯어보니 음악 CD였습니다. “백건우가 연주한 가브리엘 포레”라는 타이틀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제가 클래식에 조예가 있는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래도 선물을 받았는데 들어는 보자고 하여 퇴근 길에 차 속에서 그 CD를들었습니다.


첫곡은 로망스 3번이었습니다. 앗! 너무 듣기 좋았습니다. 반복장치를 작동시켜 되풀이하여 들었습니다. 역시 좋았습니다.


얼마 지난 후 우리 동문 합창부의 후배가 제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합창부가 제1회 연주회를 하게 되었는데 관중이 너무 없을까봐 걱정이 되며, 특히 자신이 부모님 다음으로 존경하는 분인 고등학교 때의 음악 선생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제게 고등학교 동문 게시판에 합창부 연주회로의 초대 글을 하나 써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 후배는 자신은 남에게 부탁하는 것을 너무 싫어하지만 이 번에는 어쩔 수 없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런 부탁을 하는 그 후배가 아주 예쁘게 보였습니다. 그 부탁은 사실부탁도 아니었습니다. 동문의 잔치는 당연히 널리 홍보할 일이므로 그런 부탁이 없더라도 그 소식을 안 이상, 동문회 임원을 맡고 있는 저로서는 뭔가 기여를 하여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후배가 남에게 공짜로 부탁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였기에 그 후배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저도 부탁이 있다고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그 후배는 피아노 전공을 하였다고 하기에 가브리엘 포레의 로망스 3번을 연습하여 저를 위해 연주해달라고 하였지요. 그 악보도 후배가 직접 고르고 연주장소도 후배가 직접 골라야 한다고 하였으며 다만 합창부 연주 준비에도 바쁠 것이니까 시기는 합창부 연주회가 끝난 후에 아무 때를 선택하여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이윽고 합창부 연주회가 끝났습니다. 어느 날 제게 그 후배로부터 이메일이 다시 왔습니다. 악보도 구하였고, 연습도 하였으며 장소만 아직 구하지 못하였다고.


는 장소를 구하는 것이 가장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었기에 아는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피아노가 있느냐, 그리고 최근에 조율은 하였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집에 피아노가 있으나 안방에 들어간 지 오래되었고, 조율은 본인 기억으로는 최근 수년간 한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연신 왜 그런 것을 물어보느냐고 하셨습니다. 상상력이 부족한 그 선배가 스스로 알아 맞출 수는 절대로 없기에 정답을 말해 드리려고 하다가 재미가 없을 것 같아 그냥 침묵하였습니다.


친한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손님이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카페 같은 곳을 혹시 아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씩씩하게 “형님, 제가 알아보지요” 해놓고서는 무책임한 젊은이답게 그 후에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얼마 뒤 피아노 치는 후배로부터 이메일이 왔습니다. 장소를 구하였고, 날짜도 정하였다구요.


그 장소가 어딘 줄 아시겠습니까.


예식장이었습니다. 얼마나 발상이 뛰어납니까? 예식과 예식이 교대되는 중간에 딱 10분을 빌렸다고 하더군요.


약속된 날에 그 선배 부부를 같이 모시고 가서 surprise party를 열어주려고 하였으나 그 날 따라 이 노친네 부부가 강원도 어디로 부부동반하여 놀러 가신다고 하더군요.


친한 후배는 숙제를 하지 못한 잘못이 있기에 결국 저 혼자 그 황홀한 연주회에 가기로 하였습니다.


약속된 시간에 저는 그 예식장에 갔습니다. 앞의 결혼식이 막 끝나고 종업원들이 부산하게 청소를 하고 있더군요.


그 후배는 종업원들이 대충 청소를 마칠 때 쯤을 기다렸다가 날렵한 정장 옷차림으로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저는 몇 미터 떨어진 곳에 그 후배가 지정해 주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윽고 종업원들이 청소를 끝내고 나가자 문을 닫고 피아노 쪽만 조명을 밝힌 채 저만을 위한 연주가 시작되었습니다.


후배는 연주하기 전에 이야기하였습니다. 백건우 CD를 일부러 한 번도 듣지 않았다고. 대학교 때 교수님이 말씀하셨답니다. 남이 연주한 것을 들으면 원숭이 밖에 되지 않는다구요.


연주가 시작되었을 때 처음에 매우 낯설었습니다. 템포가 전혀 달랐기 때문이지요. 백건우의 연주는 매우 경쾌하였는데 그 후배의 연주는 상당히 느렸습니다.


그러나 그 후배의 연주도 물 흐르듯이 참 듣기 좋았습니다. 그 곡이 끝나고 가브리엘 포레의 로망스 1번을 보너스로 연주해 주겠다고 하면서 1번도 연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백건우가 연주할 때는 3번이 1번보다 좋았는데 그 후배가 연주하는 것은 1번이 더 좋더군요.


1번 연주가 끝났을 때 3번을 한 번 더 연주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앵콜 공연으로 3번 연주가 다시 시작되었을 때 눈치 없는 하객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좀, 조용히 해주면 좋으련만 연주는 아랑곳없이 떠들기 시작하더군요.


이미 충분히 행복하였습니다. 넓디 넓은 예식장에서 저 혼자만을 위한 피아노 독주를 듣는 행운을 누리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저는, 최근 들어 그 피아노 독주가 제가 받은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피아노 치는 그 후배에게 다시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

2003-03-17 오전 11:17:56에 고등학교 동문 사이트에 올린 글이다. 요즘 옛날에 내가 쓴 글들을 비공개 블로그에 옮기면서 정리하고 있는데 가끔 이렇게 공유하고 싶은 글이 발견된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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