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저세상 미화원] 3화
눈꺼풀이 무거웠다. 장미는 겨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오랜만에 꾸는 꿈이었다. 몸부림치며 깨던 날도 많았는데, 이제는 그 정도로 괴롭지 않았다. 고통이 줄어든 건 아니었지만 면역이 생겼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장미는 습관처럼 두 손을 내려다봤다.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바닥과 굵은 손가락. 거칠고 갈라진 피부로 감싸인 골격은 여전히 여덟 살이었다. 여덟 살. 늙지 않는 몸에 갇힌 늙어버린 영혼.
꿈속의 그날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는 지 장미는 기억하지 못했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들이 영혼의 심장 안에 먼지처럼 쌓이고, 가끔 그것들이 재채기를 일으킬 때나 아, 멀리 왔군 알아차리는 게 전부였다.
심장의 먼지를 털어내면 재채기가 일어날 때까지 또 한참을 살았다. 저승에서의 시간은 그만큼 대중이 없고 아득하기만 했다. 그런 면에서 손은 훌륭한 시계였다. 시간이 흘렀음을 실감하게 해줄 뿐 아니라 지금도 흐르고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줬으니까.
장미는 생명선과 굳은살 사이에 길게 찢어진 상처를 빤히 들여다봤다. 길바닥에서 유리 조각을 줍다가 난 상처였다. 어젯밤만 해도 피가 스며 나왔는데 자는 사이에 딱지가 앉아있었다.
습관처럼 딱지를 떼려고 하던 장미는 멈칫거리며 동작을 멈췄다. 딱지를 떼면 피가 날 것이고, 피가 나면 일하기 불편해진다. 작업에 문제가 생기면 그만큼 퇴근 시간이 늦어졌다. 정시 퇴근을 사명으로 삼고 사는 장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장미가 하는 일은 위생적이지 않았고, 물에 젖는 일도 자주 있었다. 잠시 더 생각을 이어가던 장미는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따 밤에 떼자.”
장미는 이불을 젖히고 2층 침대에서 내려갔다. 천장이 낮았기 때문에 머리를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1층 침대에는 작업복이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그 옆으로는 청소도구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달리 보관할 장소가 없어서 침대를 보관함으로 쓰고 있었다. 그만큼 좁은 방이었다. 현관문을 열면 두 걸음 앞에 침대가 있는.
침대 바로 옆에 간이 싱크대가 있었다. 장미는 상부장을 열어 치약과 칫솔이 담긴 양치 컵을 꺼내 양치질을 시작했다.
싱크대 바로 옆에는 불투명한 유리가 달린 철제 미닫이 문이 있었는데, 문 너머로 뚜껑이 없는 변기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변기는 유리창에 유령처럼 비쳤다.
변기 맞은 편 벽에는 금이 간 거울이 붙어 있었다. 거울 아래에는 수도 꼭지가 하나 밖에 없었다. 따뜻한 물을 쓰려면 밖에서 물을 끓여와서 섞어서 써야 했다. 수도꼭지에 달린 파란색 고무 호스가 코끼리 코만큼 길었다.
장미는 살아 있을 때도 똑같은 욕실을 본 적이 있었다. 어릴 적 시골 할머니 집에 갔을 때였다. 할머니 집은 욕실과 변소가 따로였고, 그 시절에도 재래식 화장실을 쓰고 있었다.
좁고, 후락하고. 어느 면으로 봐도 쾌적하다고 할 수 없는 공간이었지만, 정작 장미는 그에 대해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더 좋은 집에 살았더라도 자신의 처우가 지금보다 좋았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장미는 종종 스스로도 어찌하지 못할 만큼 속이 뒤틀리곤 했는데, 집에 깃든 악마들의 변태성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악마들은 거의 전능에 가까운 힘으로 새 집을 만들 수 있었는데도 장미의 기억 속에서 가장 낡고 불편함을 느꼈던 공간만을 골라서 조합했다.
저승에 생긴 최초의 인간 노예에게 가장 어울리는 집을 만들었다며 저들끼리 의기양양 킬킬거리던 얼굴을 장미는 두고두고 잊지 못했다.
장미를 가장 힘들고 가난하던 시절에 묶어두고 영원히 부려먹을 거라고 면전에서 선언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청소하는 인간이라면 응당 이런 집에 살 거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빈곤한 상상력에도 장미는 분노를 느꼈다.
세안을 마친 장미가 양치컵을 정리해서 제자리에 두고 침대로 향했다. 작업복을 입을 차례였다.
작업복은 방수가 되는 일체형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하얀 색으로 되어있었다. 입고 벗기도 힘들었지만 관리하기가 더 까다로웠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작업복을 빠는 데만 족히 한 시간을 매달려 있어야 했다.
저승에서 흰색은 하얀 문 너머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색이었기에, 처음 악마들이 이 옷을 노예 전용이라고 만들어냈을 때 저승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장미는 내심 작업복이 바뀔 거라고 기대했지만 악마들은 뻔뻔한 얼굴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오염물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다가 작업자를 감시하기에도 쉽다! 왜 이 옷이 아니어야 하는가?”
천국은 결국 악마들의 뜻을 받아들였다. ‘인간들은 모두 지옥에 간다’는 이유로 저승의 전반적인 실무를 악마들에게 떠넘기고 있어도 저승에 관한 한 그들의 지향점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천사도 악마도 저승의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 인간 노예가 얼마나 갈려나가든 그들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하얀 문을 넘지 못한 자는 모두 벌을 받아 마땅했으므로. 죄인들은 지옥불에 튀겨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저승에 속박되어야 했다.
장미는 작업복 지퍼를 턱 끝까지 올린 뒤 소매 단추를 꼼꼼히 채웠다. 밀대칼과 청소 집게를 허리춤에 끼우고, 세제 스프레이와 소독제, 걸레는 바지에 달린 넉넉한 주머니에 나눠서 넣었다.
마지막으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챙길 차례였다. 장미는 가볍게 심호흡하며 손목을 살살 돌려 풀어주었다. 빗자루는 장미 몸무게의 절반 되는 무게가 나갔다. 쓰레받기는 그의 반 정도가 됐다.
다시 말해 장미는 자신의 몸무게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청소도구를 들고 온종일 저승 바닥을 치우고 다녀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저승에서 취업한 최초의 인간에게 주어진 벌이었다.
“육신의 무게만큼도 나가지 않는 벌이라니 얼마나 가벼우냐? 너 인간은 우리 악마들의 관대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장미는 잊지 않았다. 몸무게의 3분의 2라는 값을 도출해낼 때까지 자신이 어떤 과정을 겪어야 했는지를.
악마들이 만족할 만한 벌을 받는 동시에 잡역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장미는 끝도 없는 실험에 동원되어야 했다.
악마들은 무식했고, 실수가 잦았으며, 피실험자를 배려하지 않았다. 아무런 성과도 없는 실험을 반복하면서 실험의 주체라는 자신들의 역할에 심취하여 으스대기 바빴다.
1g, 0.1g씩 무게 추를 옮겨가며 낄낄거리던 그들의 얼굴을 표백제로 지워버리는 수억 번도 넘게 하는 동안 장미의 몸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변해가기 시작했다.
돌덩이처럼 단단한 근육과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혈관. 작업복 속에 가려진 신체를 떠올릴 때마다 장미의 내부에선 정체불명의 초인적인 힘이 솟았다.
분노였는지, 살의였는지. 광기였는지, 고통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설움이었는지.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온 자아를 초월한 힘이.
장미는 빗자루를 들고 가볍게 휘둘러보았다. 언젠가 이 손짓에 사고인 척 악마의 뒤통수를 까버리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쓰레받기를 마저 챙기고 두 걸음 앞에 놓인 현관문을 열었다.
출근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