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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하게 Oct 27. 2024

저세상 면담 (2)

소설 [저세상 미화원] 2화


공개 면담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마물들의 안내에 따라 한 명씩 단상에 올라가 위원회를 보며 최후 발언을 했다. 발언 시간은 30초도 주어지지 않았다. 시작이 늦거나 말문이 막히면 바로 다음으로 넘어갔다. 진정성이 없거나 우스갯소리를 하면 경비 마물들에게 끌려내려가야 했다.


면담을 마친 아이들은 전부 검은 문을 배정받았다. 아이들은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검은 문이었다. 기적은 없었다. 기적 같은 게 있었다면 살았겠지. 여기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 한 말이 여운처럼 남았다. 설득력 있었다.


단상 중앙으로 또 다른 아이가 올라갔다. 그 아이는 좀처럼 입을 떼지 못했다.


“저건 실패네.”


“다음!”


아이들은 악마 흉내를 내며 다음 차례를 기다렸다. 자신 앞의 줄이 줄어서 차례가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다음! 을 외치는 악마의 목소리가 나지 않았다. 뜻밖의 목소리가 울렸다.


“입을 열고 소리를 내보세요.”


6번 악마 옆에 앉아있는 4번 악마가 말했다.


“처음이라 낯선 거예요. 말할 수 있어요. 해보세요.”


“……아. 아…… 아…….”


6번 악마가 끄덕거렸다.


“좋은 목소리군. 멍청한 인간들이 손해 볼 짓을 했어.”


아이들은 놀라서 단상을 바라봤다. 악마의 반응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이 말한 1%의 인간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악마들의 반응이 저처럼 누그러졌을 리가 없었다.


아이들의 온 신경이 단상에 집중됐다. 1%의 아이는 작고 왜소했다. 서 있는 것도 어색했다. 제 몸을 다루는 것 자체가 서툴러 보였다. 아이는 악마들을 흘끔거리며 손을 꼼질거렸다. 왼손 엄지손가락이 쪼글쪼글 불어있었다.


“결정하기 쉽도록 선택지를 줄게요.”


4번 악마가 말했다.


“지금 당신으로서는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 하얀 문으로 가서 천국과 환생 중 고른다. 둘, 노예형을 받고 이곳에 남는다.”


답이 빤한 질문이었다. 그런데도 1%의 아이는 고민했다. 기다리다 지친 6번 악마가 우스갯소리랍시고 떠들었다.


“셋, 지옥에 가서 너네 엄마를 기다린다.”


순간 아이의 눈이 번뜩였다. 악마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봐 어린 인간.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


“다시, 만난다.”


“그래 만나기야 하겠지. 그때까지 너는 지옥의 노예로 살아야 해. 지옥이 뭔지 아나? 노예가 무슨 뜻인지나 알아?”


아이가 고개를 끄떡거렸다. 아이는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책자를 꺼내 보였다. 겉장에는 <신생아를 위한 저승 면담 자료- 속성 편>이라고 쓰여 있었다.


“갈게. 지옥.”


발언을 마친 아이가 엄지 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4번 악마는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 듯 재차 물었다.


“지옥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무섭고 끔찍한 곳입니다. 그곳은 고통 밖에 없고, 그곳의 노예가 된다는 건 죄인에 버금가는 고통을 받는다는 뜻이에요. 그 여자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나요? 다음 생의 안녕과 행복을 포기하고 스스로 고통을 자초할 만큼?”


“응.”


1%의 아이는 단호하게 끄덕거렸다. 그러곤 눈이 접힐 만큼 환하게 웃었다.


“그래야 죽여. 그년. 똑같이. 해줄 거야.”


4번 악마는 포기했다. 6번 악마가 아이의 서류에 검은 문 도장을 쾅 내리찍었다.


“가라. 열심히 일하면 원하는 만큼 죽이게 해줄 거다.”


“응. 고마워.”


“웃는 게 딱 악마상이네. 제 주제를 잘 알아.”


6번 악마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서류를 흔들었다. 아이가 잽싸게 그것을 건네받고 단상 반대편으로 뒤뚱거리며 뛰어가서 폴짝 뛰어내렸다.


면담은 계속되었다. 검은 문 판정이 끝없이 이어졌다. 장미의 순서는 더디게 왔다. 잠든 동생을 깨울 수가 없어서 늦게 출발했고, 대열에 합류하고 나서도 동생을 업고 이동하느라 틈틈이 쉬어야 했다. 난리 속에서도 동생은 깨지 않았다. 죽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잘 잤다.


무대에 오를 차례가 되어서야 동생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동생이 쭈뼛쭈뼛 단상 위로 올라가 위원회 앞에 섰다. 장미는 괜스레 가슴 안쪽이 꽉 조여들었다. 멀찍이 떨어져서 보니 동생이 한참 더 작아 보였다. 습관처럼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도 악마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장미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1%까지는 아니고 1.5% 정도 되려나…….”


맙소사. 1.5%라니. 장미가 입을 틀어막으며 속으로 감탄했다.


“그러니까 너는 환생을 선택하겠다는 거지?”


“네!”


“‘가족 다 같이’라는 조건도 오케이고? 이건 너희 부모가 네 자식이 될 수도 있다는 거야. 물론 배우자가 될 수도 있고. 아무튼 결론은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너희 가족 넷이서 한 집에서 살게 된다는 거지.”


“네!”


“헌데 이건 가족 모두의 동의가 필요한 거거든. 네가 동의했다고 해도 가족 중 누군가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향후 너의 거취는 달라질 수 있어.”


“네?”


“환생 못하고 천국에서 계속 살게 될 수도 있고, 환생을 해도 인간이 아닐 수도 있고. 재수 없으면 여기 불려 나와서 판정 다시 받아야 해. 가족 담합력이 특별했던 거지, 솔직히 너 개인으로 따지자면 별로 볼 거 없거든.”


“아……. 괜찮아요!”


동생은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가족은 저를 혼자 두지 않거든요. 문제 없어요!”


동생은 하얀 문이 찍힌 서류를 받고 단상을 내려갔다. 장미를 돌아보는 얼굴이 꽃처럼 맑았다. 저 나이 때 동생과는 매일 같이 싸웠다. 싸우는 동안에는 미워서 울었고, 싸우고 나면 미안해서 울었다. 가장 미워했던 동시에 한없이 가엾어 하던 얼굴이었다.


동생이 떠났다. 하얀 문 너머로.


장미는 위원회 앞에 서 있었다. 방금 전 동생이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서 우리 모두의 내세가 결정된다니. 우리는 전생에도 이 순간을 거쳐 이번 생을 살게 된 걸까? 그렇다면 전생의 나는 어떤 결정을 했던 걸까?


“하얀 문이지?”


6번 악마는 장미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물었다. 그는 좀 지쳐 보였는데, 정말 지친 건지 장미의 마음 때문에 그리 보이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악마는 계속 말했다.


“다행이네. 너희 부모 장수할 거거든. 여기 오는 데 오래 걸릴 거야. 누나랑 같이 있으면 동생도 심심하지 않겠네.”


“…….”


하얀 문 도장을 들고 있던 악마가 그제야 장미를 보았다.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왜 반응이 없어. 싫어?”


“…….”


“야.”


“…… 그게 다예요?”


“뭐?”


“저에게 있는 선택지요. 그것뿐이에요?”


악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곧이어 그의 얼굴에 생기가 확 번졌다.


“왜? 천국 가기 싫어?”


“천국이 싫다기보다는……”


“그럼? 환생이 싫어?”


“환생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아! 너 가족이 싫구나?”


악마의 눈이 번뜩였다.


“네 가족과 같이 사는 게 싫어. 그들과 한 집에서 사는 게 싫어. 다음 생에는 얽히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치? 그걸 바라는 거지? 하! 하하! 재미있어! 아주 좋아!”


악마가 테이블을 치며 웃었다. 장미는 두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수치감을 느꼈다. 자신의 선택에 무엇보다 악마가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양심을 아프게 찔렀다.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자신이 먼저 스스로를 힐난했다. 하지만 어쩌라고. 내키지 않는 건 내키지 않는 건데.


“없어.”


악마가 갑자기 웃음을 멈추더니 정색하며 말했다.


“천국에 가거나 여기에 남거나, 야.”


“…….”


“가족에게 부려지거나 악마에게 부려지거나 .”


악마가 다시 웃었다.


“어느 쪽이 더 괴로울까?”


여섯 명의 악마들이 똑같은 미소를 그리며 장미의 답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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