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저세상 미화원] 8화
열두 살들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인간성을 사수한 인간이라는 자부심을 알게 한 이가 이제는 그 인간성을 버리는 게 어떠냐고 묻고 있었다. 결국 다른 길은 없던 걸까. 악하게 살아서 지옥에 왔는데 더 악해질 것을 강요받고 있었다.
어쩌면 답은 정해져있던 걸지도 몰랐다.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미 지옥에 떨어진 인간들이 무슨 인간이겠는가. 일찍이 나이를 먹은 아이들이 현명했던 것이다. 적어도 그들은 굶지 않아도 됐으니까.
무대 위의 성인들이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그들의 크고 강인한 몸이 두려움을 넘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일부의 아이들이 그런 자신의 심경 변화를 깨닫곤 퍼뜩 놀랐다. 지미는 괜찮다고 말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거치는 감정일 뿐이라고.
“처음 겪는 일이라 낯설어서 그래. 하지만 생각해 봐. 우리는 어차피 죽을 거야. 여기 온 사람들 중에 대다수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걸? 그러니 오늘 죽든 내일 죽든 다를 게 없지. 오늘 밤 이후의 삶은 어차피 덤이니까.”
지미는 32번에게서 지휘봉을 건네받았다. 끝이 가늘어서 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지휘봉으로 복면의 사람들을 건드릴 듯 건드리지 않으며 무대의 끝과 끝을 오갔다.
“나는 우리가 지극히 인간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는 살아있을 때 희생이라는 걸 배웠잖아? 그걸 잘 못해서 여기 떨어진 거지만, 지금도 못한다는 보장은 없지. 너희가 바로 그 증거잖아. 기어코 아무도 죽이지 않겠다는 숭고한 정신. 당장 내가 오늘 죽을 지언정 절대 나이를 먹지 않겠다는 의지! 너무 멋져. 진심으로 존경해.”
지미가 무대 중앙에 섰다.
“그러니 계속 보여줄래? 어차피 죽을 거라면 하루 정도 빨라도 상관 없잖아. 이틀 정도도 별 차이 없지 않나? 많은 사람들이 하루씩만 양보해도 세상은 달라질 수 있어.”
“그렇게 좋은 거면 먼저 죽어보지 그래?”
누군가 소리쳤다. 조용히 술렁거리던 굉장히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죽음 같은 침묵이었다. 지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소리는 지미의 등 뒤에서 나고 있었다.
“우리를 위해서. 네 말 대로라면 그건 아주 숭고하고 존경받을만한 일이 아닌가? 왜 실천하지 않는 거지?”
중앙에 꿇어 앉은 남자였다. 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하늘이 둘로 나눠지더니 새로 생긴 자리에 그의 모습을 상영했다. 32번이 그에게 다가가 거칠게 복면을 벗겼다.
죄인의 얼굴이 드러나자 사방에서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라고 다르지 않았다. 귓가에 문득 낯익은 목소리가 울렸다.
‘셋 하면 오른쪽으로 뛰는 거야. 알았지?’
그는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강해 보였다. 이마에서 검붉게 발광하는 숫자가 피에 젖은 악마에 눈동자처럼 보였다.
66
열두 살의 몸을 갖게 된 후 처음 보는 숫자였다. 아마 여기 있는 열두 살 모두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
“나는 노인이 될 거야.”
중학생은 말했다.
“중학생이 아니고, 태오라니까.”
그렇게 말하던 그의 이마에는 숫자 14가 붉게 새겨져 있었다. 살인자와 말을 섞는 건 처음이었다. 살인자를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살아있을 때도 죽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우스웠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살인자를 만나는 인생이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걸까. 내가 자조하며 웃자 태오도 생글 웃었다.
“웃는 얼굴이 보기 좋네.”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서 등을 돌린 채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자리를 떠나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열 시간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기 전에 스스로 죽을 판이었다.
다행히도 중학생은 나와 상태가 비슷했다. 하기야 중학생 뿐일까. 나이를 먹고 무리 지어 몰려다니는 깡패들이 아니라면 이곳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굶어 죽거나 졸려 죽거나. 시비가 붙어서 싸우다가 죽거나 싸우는 것을 구경하다가 밀쳐 넘어져 죽거나. 재수 없게 깡패들 눈에 띄어 개죽음을 당하거나.
모로 가든 죽는다는 결론 밖에 나오지 않는 세상 속에서 의식을 놓고 단잠에 빠질 멍청이는 없었다. 내가 그 멍청이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긴 했지만.
“……꺼져.”
천근만근 감기는 눈을 까뒤집으며 한숨처럼 말했다. 대꾸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눈꺼풀에 세상이 올라앉아있는 것 같았다. 너의 쓸모는 이제 끝났다고, 잠자코 꺼지라는 노래를 부르며 세상이 방방 뛰었다. 의지가 팍팍 꺾였다. 나의 완전한 패배였다. 깊은 잠 속에 까무룩 의식이 삼켜지면서 확신했다.
나는 이제 죽겠지.
그리고 궁금해 했다.
너는 나를 먹을까?
살인자들이 사람을 먹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돈 지 오래였다. 그들이 피둥피둥 살이 찌고 얼굴에 기름기가 흐르는 건 자기가 죽인 사람을 잡아먹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중학생이 나를 죽이고 먹을 거라고 생각했다. 뼈만 남기고 내 작은 살점까지도 남김없이 해치운 다음 내가 찾아낸 은신처에서 안전하게 몸을 지킬 거라고.
내가 그였어도 그랬을 거라는 생각을 하다가 구역질이 나서 속을 게워냈다. 시큼하고 고약한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정신이 번뜩 들었다.
“참 나. 오바이트하면서 일어나는 애는 또 처음 보네.”
툭툭 등이 두드려질 때마다 몸이 같이 쏠렸다.
“욱. 하지 마.”
팔을 뒤로 휘저으며 간신히 말했다.
“토할 건지 내 팔을 잡을 건지 하나만 해.”
“둘 다 안 해.”
“하게 될걸?”
“욱.”
그의 팔을 잡고 속을 게워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태오는 묵묵히 내 등을 쓸어주고 있었다. 가슴에서 무언가가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간다 했더니 태오의 점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