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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al Stem Nov 29. 2020

죽음이 주는 또렷함

미래를 위해 현재를 지불하지 않도록


 수학 전문학원 강사. 나는 첫 사회생활을 수학강사로 시작했다. 수학과를 졸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등 수학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 했다. 글씨를 예쁘게 쓰는 편이 아니었다. 글씨 연습을 했다. 나름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풀이를 쓰는 훈련. 학생들과 소통하는 방법도 익혔다. 빠르게 지나가는 하루 속에서도 나는 학생들에게 진로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 노력하려 했다.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업무도 힘겹게 끝내는 초보 수학강사였다. 학생들과 함께 1학기 중간고사, 기말고사, 방학, 다시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치렀다. 그렇게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익숙해졌다. 그리고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조차 잊은 채 1년이 지나갔다.



 2년차 학원 강사를 시작하며 생각했다. 이렇게 생활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전 시간에 여유롭게 보내고 오후에 출근해서 강의하는 삶. 페이도 나쁘지 않았다. 초중고 학생이 100명 이상 다니고 있고 지점도 2곳이 있는 나름대로 규모가 있는 학원이었기에 미래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나름대로 가르치는 일도 재미있었다.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것이 주 목적이었기 때문에 진로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시간을 부족했지만 이미 그것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내가 일했던 학원은 그 지역에서 특목고, 외고를 가장 많이 보내는 수학학원이었다. 학원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테스트를 봐야 했고 불합격을 받으면 학원을 다닐 수 없었다. 부모님들은 자녀를 학원 테스트에  합격시키기 위해서 과외를 하기도 했다. 심지어 테스트를 합격시켜주겠다며 마케팅을 하는 다른 학원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레벨이 가장 낮은 반 학생들도 학교 수학 시험은 90점 이상이 보통이었다. 80점은 좀 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이하의 점수는 큰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학원 시스템은 나에게 약간의 거부감을 느끼게 만들긴 했지만 이 일을 그만두게 만들 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2년 차 마지막에 강사 일을 그만뒀다. 또다시 경험한 죽음으로 인해서 나는 강사 일을 그만둘 수 있었다. 


 학생들은 시험기간에 학원을 일주일 정도  나오지 않는다. 다음날 수학시험이 아닌 이상 학원을 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학생들이 시험기간에 학원을 오지 않으면 교육비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한 주 학원을 오지 않는다고 해서 학원비를 받지 않을 수 없다. 학원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말에 보충을 한다. 근데 학원비 때문에 보충한다고 하면 당연히 학생과 학부모가 받아들일 수 없으니 합리적인 보충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심화문제다. 중학교 때부터 심화문제를 풀어봐야 고등학교 때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논리로 주말 보충을 진행한다. 이 심화문제는 선생님들도 힘들어서 늦게까지 문제풀이를 준비한다. 하지만 실제로 수업을 해보면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주말 보충 심화문제풀이는 필요가 없다는 것을. 



 물론 상위 10% 정도의 학생들에게는 필요한 교육이다. 그 친구들은 오히려 선생님보다 더 빨리 문제를 풀고 가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풀이를 들어도 다시 풀어봐도 대체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를 정도의 문제를 붙들고 있다. 그렇게 학생들은 토요일 하루를 학원에서 보낸다. 학생들은 학원의 운영을 위해서 그리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지불한다.


 4월 16일 나는 전날 늦게까지 주말 보충수업을 준비했다. 11시쯤 일어나 아점을 챙겨 먹으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세월호 사고 소식을 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어떤 사고가 발생했구나” 정도로 받아들였다. 나는 평소와 같이 수업 준비를 했다. 강의를 마치고 오후 11시쯤 퇴근했다. 그리고 나는 오전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다. 단원고 학생들이 아직 배에 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원의 아이들이 떠올랐다.

 

 주말에 놀지도 못하고 무슨 말인지도 모를 문제풀이를 듣고 있는 학원 아이들. 오전부터 수학학원에 붙잡혀 있던 친구가 나가기 전 “이제 영어학원 가요”라고 말하며 씁쓸한 인사를 전하던 아이. 내가 고등학생도 아닌데 고등 문제를 왜 배우는지 모르겠다며 의문을 던지던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렇게 또 갑작스러운 죽음이 나에게 다가왔다. 내가 가르치던 학생이 죽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분명 내가 가르친 학생들과 똑같은 상황에 있던 친구들이 있었을 것이다. 대학이라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살지 못하는, 현재를 미래에 지불하고 있는 학생들. 학생들 스스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지불하겠다고 선택한 것이라면 조금이라도 위로를 할 수 있을까? 실제로 단원고 학부모 중에 이런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떠날 줄 알았다면 학원이라도 보내지 않았을 텐데…


 4월 16일 학생들의 죽음은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학생들을 만나서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라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이렇게 아이들을 강제로 가르치는 일만 해서는 내 삶에 의미가 없어 보였다. 주말에 휴식할 권리도 얻지 못한채 학원에 오는 학생들이 너무 힘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도 힘들었다. 


 이러한 생각들로 나는 안정적인 미래보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기로 결정했다. 학생들 또한 현재에 집중해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나는 죽음이 주는 또렷함을 좇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2년이라는 수학강사 일에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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